서사로만 Narrative 29

[단편소설] 육교 위에서 - 조세희

육교 위에서 조세희 신애는 시내 중심가를 걸으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사람·건물·자동차뿐이었다. 거리에서는 기름 타는 냄새, 사람 냄새, 고무 타는 냄새가 났다. 잠시 서서 주위를 둘러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인도에 사람들이 넘치고, 차도에 자동차들이 넘쳤다. 몸둘 곳이 없었다. 단 몇 초 동안이라도 걸음을 멈추고 우울을 달랠 곳이 없었다.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밑의 동생이 입원을 했다. 아직 마흔도 안 된 나이인데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다. 동생은 내과 의사들만 찾아다녔다. 위가 나빠져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사들을 찾아다녀도 동생의 병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 육십삼 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오십일 킬로그램으로 줄었다. 신애의 남편..

[단편소설] 흰 얼룩말 - 이윤기

흰 얼룩말 이윤기 “……마당에 놓인 널평상에 세 사람이 앉아 있다. 스무 살 먹은 청년, 청년의 아버지 그리고 청년의 할아버지다. 마당과 길 사이에는 판자를 격자(格子)로 세워 만든 울타리가 있다. 지금부터 내가 묘사하는 울타리 모양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울타리 만드는 데 쓰인 판자의 너비는 한 뼘쯤 된다. 울타리의 판자는 서로 딱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판자와 판자 사이가 대략 한 뼘쯤 벌어져 있다. 그래서 마당에 놓인 널평상에 앉아 시선을 옮기면 울타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 모습이 보인다. 예전에는 이런 판자 울타리가 많았다. 판자를 촘촘하게 짜 놓으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울타리가 통째 쓰러지는 일이 흔했다. 청년은 울타리를 등진 채 앉아 있다. 그 청년이, 무언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이청준 - 잔인한 도시

잔인한 도시 이청준 날씨가 제법 싸늘해지기 시작한 어느 가을날 해질녘 그 사내가 문득 교도소 길목을 조그 맣게 걸어나왔다. 그것은 여간 희한한 일이 아니었다. 근래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교도소는 도시의 서북쪽 일각, 벚나무와 오리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조림된 공원 숲의 아래 쪽에 있었다. 그리고 그 무질서한 인조림이 끝나고 있는 공원 입구께에서 2백 미터 남짓한 교도소 길목이 꺾여들고 있었다. 공원 입구에선 교도소 길목과 높고 음침스런 소내 건물들 을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한눈에 모두 내려다볼 수 있었다. 교도소 골목을 오르내리는 것이 면 강아지 한 마리도 움직임이 빤했다. 하지만 그 길목은 언제부턴가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움직임이 끊어진지 오래였다. 교도 소와 관련하여 길목을 오르내리는 사람..

[단편소설] 나는 아름답다 - 김영하

나는 아름답다 김영하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기형도의 "비가 2" 중에서 그해 7월. 아직 여름은 오지 않았다. 마치 종말이라도 닥쳐올 듯이, 나는 여름을 기다렸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막이 더욱더 황량해지기를 갈망했다. 그 목마름이 미처 우물을 파기도 전에 어느 날, 하늘에서는 천사들의 나팔소리처럼 시원한 뇌성 한 줄기가 울려 퍼지며 그 여름이 당도했음을 알렸다. 그 나팔소리와 함께 몰려온 비구름은 내리 나흘낮 나흘밤 동안 빗줄기를 뿌려댔다. 그리고 나자 빗발은 서서히 실팍해지면서 아스팔트 위로는 여린 김이 모락거리는 것이었다. 세상은 이그러진 채로 승천하고 있었다. 서서히 몸을 일으켜 창을 열고 밖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뛰어다니고 ..

[단편소설] 포스트잇 - 김영하

포스트잇 김영하 처음으로 산 수동 카메라. 36~72mm 렌즈가 장착되어 있고 모터 드라이브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수동이다. 이 카메라는 빛이 들어오는 구멍, 그것을 조절하는 조리개, 그리고 셔터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필요하거나 과장된 기능은 하나도 없다. 간혹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기가 막힐 정도로 멋진 사진을 뽑아낸다. 나와 함께 유럽과 터키,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를 여행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카메라를 통해 본 것만을 기억하게 되었다. 내 눈의 기계적 확장태라 할 수 있겠다. 중학교 3학년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소풍 전날이어서 오후가 되자 학교는 묘지처럼 텅 비어버렸다. 나는 혼자 도서실에 가서 소설을 읽었다. 그러자 뿔테안경을 쓴 국어선생이 다가와 나를 귀순용사 보듯 들여다보..

[희곡] 바보각시 - 이윤택

바보각시 이윤택 작/이윤택 연출/ 연희단 거리패 (등장인물) 각시 맹인가수 걸식소년 미카엘 (맹인가수와 걸식소년 역은 한 인물로 표현될 수 있다.) 취객 파출소장 실직청년 밤처녀 (소외자 뒤에 종말론 교주가 됨) 우국청년 앵벌이 춤추는 꼭두 노래하는 꼭두 [경] 1경 아름다운 사람을 기다리며 ((무대는 신도림역전 풍경이다. 신도림은 新都林으로 그 뜻은 수풀 속에 난 새로운 길이다. 수풀 속에 난 새로운 길, 상당히 의미심장한 상징을 내포하고 있는 지금 여기 신도림역 일대는 서울의 도시 빈민 밀집지역으로 주의로 구로공단을 끼고 서울과 주변 위성도시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계지로서 지금 여기 신도림은 유난히 종말론이 성행하고 온갖 야바위꾼이 들끓는 서울의 오지이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 [안내..

[희곡] 이강백 - 자살에 관하여

자살에 관하여 / 이 강백 등장인물 남지인 - 라디오 방송국 프로듀서 유경화 - 소설가 무대 독신자 아파트, 라디오 방송실 이 연극은 남지인이 살고있는 독신자용 아파트와 라디오 방송실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아파트와 방송실이 각각 별도의 무대로 독립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 방송실 장면에서는 아파트의 붙박이 장롱이 두 쪽으로 나뉘어 벌어지면서, 벽 뒤에서 방음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이 「방송중」이라는 전광표시판과 함께 나타난다. 독 신자용 아파트의 구조는 침실, 거실, 부엌의 구분이 없는 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침대가 놓인 곳이 침실, 식탁과 냉장고가 있는 곳이 부엌, 소파와 탁자가 있는 곳이 거실의 용도로 쓰여진다. 남지인은 그러한 비좁은 공간 속에 크고 작은 생활도구들과 장식품들을..

[단편소설] 파산세일 - 백민석

파산 세일 백민석 ꡒ밴댕이 소갈머리!ꡓ 박태자는 거실 소파에 앉아 졸았다 깨었다 하면서, 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배앤댕이, 배앤댕이…… 그녀는 그닥 추위를 타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히터도 얼마 전에야 켰다. 히터를 켜니, 실내온도를 겨우 19도로 맞춰놓았는데도, 기분이 나빠졌다. 실내온도가 높아진 탓이 아니었다. 히터에 의해 데워진 공기가 기분을 가라앉히고, 탁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지를 벗어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돌아갔다. 손님이 찾아오거나 외출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팬티에 히프를 덮는 기다란 티셔츠만으로 온 집 안을 쏘다닐 것이었다. 겨울이 지날 때까지 항시. 박태자는 깜빡깜빡 정신이 나갔다 들었다 하다가, 문득 눈을 떴다. 흐렸다. 수정체가, 박아넣은 유리 눈알처럼 투명하니 텅 비어..

[단편소설] 백민석 - 없는 작가

없는 작가 백민석 ci가 찾아왔다. 뭘 잃어버렸으니, 행방을 좀 알아봐달라는 것이었다. 미망인이 되기엔 너무 젊지 않아? 하고 항의하는 표정이었다. 당혹이나 놀람보다는, 노여움이 느껴졌다. 아직 대상을 찾지 못한. 그래서 나는 ci의 얘기를 귀담아듣는 척하다가,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거절한다면 그녀 이마를 벌겋게 물들이고 있는 노여움이 대상을 찾게 될 것 같아서였다. 격한 김에 과장된 표현을 쓴 것이겠지만 ci는 역시, 미망인이 되기에는 너무 젊다. 나는 그녀의 실제 나이도 안다. 결혼까지는 봐줄 수 있어도 임신이나 아기, 더욱이 미망인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게, 낯 뜨겁게 들릴 나이다. 몇 년째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 싱글인 총각의 편협해진 눈엔 거의 그렇다. ?결혼은 안 해?? ci는 그제..

[단편소설] 너의 의미 - 김영하

너의 의미 김영하 1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뇌 속에 숨어 있던 작은 성기가 힘차게 발기하는 느낌을. 저 지중해 어딘가에 있다는 누드 비치에 처음 당도한 관광객처럼 독자들은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책은 밝게 웃으며 어서 오라고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요염한 그 책들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암시를 풍기면서 손만 대면 가랑이를 벌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르가슴이 멀지 않았다. 바야흐로 우리의 뇌는 팽창하여 부풀어오르는 중이다. 우리는 허겁지겁 아무 책이나 뽑아 펼쳐댄다. 외설스런 장면이다. 그러나 이 누드비치의 풍경이 눈에 익으면 어느새 정신의 성기는 늘어지고 광대무변해 보였던 가능성의 세계는 1제곱미터 면적의 책상으로 한정된다. 졸음이 쏟아지거나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