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로만 Narrative

[단편소설] 파산세일 - 백민석

버블건 2007. 11. 1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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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세일

백민석


ꡒ밴댕이 소갈머리!ꡓ

박태자는 거실 소파에 앉아 졸았다 깨었다 하면서, 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배앤댕이, 배앤댕이…… 그녀는 그닥 추위를 타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히터도 얼마 전에야 켰다. 히터를 켜니, 실내온도를 겨우 19도로 맞춰놓았는데도, 기분이 나빠졌다. 실내온도가 높아진 탓이 아니었다. 히터에 의해 데워진 공기가 기분을 가라앉히고, 탁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지를 벗어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돌아갔다. 손님이 찾아오거나 외출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팬티에 히프를 덮는 기다란 티셔츠만으로 온 집 안을 쏘다닐 것이었다. 겨울이 지날 때까지 항시.

박태자는 깜빡깜빡 정신이 나갔다 들었다 하다가, 문득 눈을 떴다. 흐렸다. 수정체가, 박아넣은 유리 눈알처럼 투명하니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뻑뻑했다. 손을 뻗어 소파 옆의 전화 테이블을 더듬었다. 내려놓은 수화기 옆에서, 흰 약종이에 놓인 캡슐 두 개가 만져졌다. 그녀는 캡슐 두 개를 잠시 조몰락거리다, 입께로 가져갔다. 그리곤, 호흡이 차분해질 때까지 숨을 골랐다. 캡슐 두 개를 입속 깊이 밀어넣었다. 위아랫어금니 사이에 끼우곤, 침이 고일 때까지 기다렸다간, 깨물었다. 틱.

ꡒ틱, 틱, 틱, 틱…….ꡓ

입 안이, 쓴맛으로 온통 환해졌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박태자는 입속말로 캡슐이 깨지는 소리를 흉내내며, 차분해질 때까지 계속 숨을 골랐다. 킥, 킥, 킥, 킥…… 풀린 홍체 위로, 뭔가가 날렸다. 노란 털빛의 치와와 강아지들이었다. 홍체 위로, 셀 수도 없을 만치 많은 수의 치와와들이 날리고 있었다. 긱, 긱, 긱, 긱…… 재수없어, 재수없어, 그녀는 숨을 고르고 또 골랐다.

얼마쯤 지나자 빛이 돌아왔다. 맞은편 저쪽에서, 무언가 네모난 형상의 검은 윤곽이 잡혔다. 전원이 나간 텔레비전 세트…… 맞은편 저쪽 벽에도, 색이 돌기 시작했다. 실크 벽지, 미들 크롬 색상의…… 박태자는 차분하게 숨을 내뱉으며, 혀로 입술을 닦았다.

박아넣은 유리 눈알이 빛으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수정체가 다시 빛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 빛은, 조명기구의 그것처럼 터지듯 오는 게 아니었다. 그 빛은, 수정체 벽을 스미듯 핥듯 흘러내리듯, 왔다. 끈적끈적하니, 끈적끈적하니. 박태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끈적끈적한 질감의 빛이, 어디서 오는지. 빛은, 그녀의 위아랫어금니 사이에서 왔다.

황색과 회색이 반반인 캡슐에서 왔다. 캡슐이 틱, 하고 깨지는 순간에 왔다. 약으로부터 왔다.

박태자는 비스듬히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위에, 머그잔 두 개가 놓인 게 보였다. 테이블 이쪽에, 또 저쪽에. 저쪽에 놓인 머그잔은 테두리 한 쪽이 깨져 있다. 누군가 꼭, 한 입 베어먹은 것 같다. 비디오 데크 패널의 디지털 시계는 8:35를 가리키고 있었다. 거실 창밖은 벌써 어둡다. 거실 창 바깥쪽 창틀에 달아놓은 조명등 불빛이, 잔디밭 위에 노란빛의 짧은 반원을 그려놓고 있다. 빛의 세기로 봐선, 거의 쓸모가 없는 조명등이었다. 그저 장식 차원에서, 지난 여름 이쪽 저쪽 두 개 설치한 것이었다. 지난 여름엔 그 조명등 아래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놓곤 수박 화채를 먹곤 했다. 둘 중 왼편 것은, 벌써 나갔다. 불쾌한 얼굴로 거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그녀는 남편을 찾았다.

남편이 집 안 어디선가 왜? 하자, 박태자는 다시 소리쳤다.

ꡒ리모컨이 없어! 리모컨이 보이질 않아!ꡓ

잠시 후, 현관으로 통하는 복도 모퉁이에서 남편이 나타났다. 손엔, 플라스틱 솔의 자루가 삐죽이 고개를 내민 양동이가 들려 있다. 꼼짝도 하기 싫어, 박태자는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편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동이를 내려놓곤, 성큼성큼 걸어왔다.

ꡒ어디에 둔 거야!ꡓ

ꡒ여기 있잖아.ꡓ

남편이 허리를 굽히며, 볼멘소리를 했다. 테이블 아랫선반에 손을 집어넣곤 리모트 컨트롤을 꺼내, 여기 있잖느냐는 듯 흔들어 보였다. 그리곤 다시 허리를 굽혀 박태자의 꼭 다문 손을 폈다. 됐어? 그녀 손에 리모트 컨트롤을 쥐어주면서 남편이 말했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손바닥엔 손톱 자국이 빨갛게 나 있었다.

ꡒ고마워.ꡓ

박태자는 리모트 컨트롤의 파워 버튼을 눌러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곤 손톱 자국이 난 손바닥을 가슴에 대고 몇 번 문질렀다.

ꡒ지하 작업실에 내려가?ꡓ

박태자가 채널 서핑을 하며 물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찾고 있었다.

ꡒ좀 씻기게.ꡓ

남편은 내려놓았던 양동이를 다시 들곤, 거실을 나갔다.

박태자는 뒤숭숭한 기분으로 테이블 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제, 남편이 과천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다녀와선 그녀 신경을 건드렸다.

머그잔 입술 닿는 자리에 때가 꼈느니 어쩌느니 퉁을 놓더니, 여자 얘기를 꺼냈다. 들소사 앞에서 웬 여자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가, 한 무리의 버팔로를 향해,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박태자는 그때, 과외에서 막 돌아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홀짝이고 있었다. 무슨 노래? 그녀가 물었다. 머그잔엔, 알리샤 실버스톤의 상반신이 프린팅돼 있었다. 브래지어도 없이 카우보이 재킷만 한 장 걸치고 있었다. 알리샤 실버스톤은 스테픈 타일러의 록 뮤직비디오로 데뷰했다. <늪>, 조관우의. 남편이 대답했다. 수업이 짧은 것이건 긴 것이건 애들을 상대로 수학공식을 짰다 풀었다 하는 작업은, 그녀를 아프게 했다. 그래서 과외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꼭 우유를 데워 마셨다. 뱃속에 따뜻한 우유라도 한 잔 들어가 있지 않으면 목소리가 떨리고 시야가 흐려졌다. 어제도 그랬다. 무슨 노래? 그녀는 말꼬리를 높였다. 히스테리가 발동했다. 남편은 둔하게, 실실 웃으며 다시 대꾸했다. 하, 조관우의 <늪>.

남편이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박태자는 머그잔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머그잔이 깨어지면서, 조각이 그녀의 이마에까지 튀어올랐다. 그녀는 데운 우유를 흠뻑 뒤집어썼다. 머그잔의, 한 입 베어먹은 듯하게 깨어져나간 부분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었다. 테이블을 덮고 있는 투명한 청색의 강화 유리판엔 금 한 줄 가지 않았다.

박태자가 소릴 질렀다.

ꡒ딴 사람 기분 파악도 좀 하고 그래!ꡓ

남편은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박태자는 짜증이 나서 그랬을 뿐이었다. 남편이 걸레와 쓰레받기를 가져와 사방에 튄 우유를 닦고, 머그잔 조각들을 주워담았다. 깨진 머그잔을 치우려는데, 그녀가 짜증으로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ꡒ그건 놔둬. 딴 사람 기분 파악을 못 하면 어떻게 되는지, 교훈으로 삼게. 며칠만.ꡓ

박태자는 남편이, 버팔로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는 그 여자와 뭘 했는지 그런 따위는 묻지도 않았다. 빠안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커피나, 뭐 밥 한 끼 먹고 헤어졌겠지.

박태자는 거실 전면창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티셔츠에 팬티만 입고 나다니기엔 추운 날씨였다. 잠도 깨고 리모트 컨트롤도 찾고 히스테리도 부려봤지만, 개운치가 않았다. 아직 씻겨내려가지 않은 뭔가가 있었다. 뭐지? 박태자는 고개를 몇 번 가로저었다. 가냘프게 잉잉거리는 듯한 소리가 귓불을 간지럽혔다. 굳이 찾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소리였다. 저 너머, 과천 서울대공원 서울랜드의 폐장을 알리는 음악 소리였다. 그녀의 집은 과천 서울대공원과 면해 있다. 그래서, 폐장음악이건 개장음악이건 무엇이건 들려오지 않는 게 없었다. 그렇지만 그 음악들은, 그녀의 집까지 달려오는 동안 대기(大氣)에 조금씩 닳고 닳아 결국엔 뭔지 모를, 잉잉거리는 소음이 돼버린다.

박태자는 음악이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쪽 밤하늘의 한 귀퉁이가, 서울랜드에서 쏘아올린 레이저 광선들의 파장(波長)들로, 창백하고 파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빛으로 짠 커튼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모양이다. 폭죽도 솟아올랐다.

늘상 겪고 보는 일이었다. 처음 이사 와서 그 광경을 보았을 땐 그런 대로 볼 만했지만, 나중엔 잇새로 한숨이 새나올 만치 신경에 거슬렸다. 이사온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밤하늘에 별이 뜨는 것만큼이나 당연히 여기는 광경이 돼버렸다.

싫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천 서울대공원 옆구리에 꼭 끼어 있는 줄 알고, 이 집을 샀던 것이니까.

박태자는 몇 발짝 앞으로 나갔다. 발 밑으로 흐릿하게 늘어진 자기 그림자가 보였다. 맨발바닥에 흙알갱이와 마른 풀이, 따끔따끔 밟혔다. 티셔츠 밑으로 바람이 새어들어왔다. 그녀는 옴찔하며 허벅지 새를 다물었다. 찬 바람이, 히터에 데워진 실내공기의 답답한 맛을 쓸어가주긴 했지만 여전히 께름칙했다. 뭔가 질서에서 벗어나 있었다. 매일 매순간을 익숙히 느껴왔던 질서의 감각 어딘가가, 뒤틀렸다. 뭘까, 어딜까. 팔짱을 끼곤 몇 발짝 앞으로 더 나갔다. 이제 그림자는 더 흐릿해지고, 길어졌다. 개운치가 않았다.

질서란, 평소의 박태자에겐 그닥 신경이 쓰이는 요소가 아니었다. 질서에 집착을 보이는 쪽은 오히려 남편이었다. 남편의 집착은 그녀를 짜증나게 했다. 그녀는 살림하는 데 있어, 그저 흉 잡히지 않을 정도의 성의만 보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이순간 당황하고 있는 건 그녀였다. 그 질서 감각이라는 것 때문에 불안한 것은, 그녀 쪽이었다. 어디가 어긋났을까.

박태자는 몇 발짝 더 나갔다. 그림자는 더 흐릿해졌다. 그림자가 발 밑으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 문득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ꡒ아.ꡓ

박태자는 거실로 뛰어들어왔다. 소파에 엎어지듯 하면서 손을 뻗어, 내려놓은 채인 수화기를 잡았다. 과외를 끝내고 와 잠깐 졸면서, 방해받기 싫어 전화를 꺼놓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었다. 재빨리 도로 전화를 켰다. 수화기를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올려놓자마자, 주홍빛 표시등이 빠르게 깜박였다.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졌다. 꺼놓은 전화기 때문에 박태자 그녀가 께름칙했던 게 아니었다. 께름칙했던 건, 바로 이 전화를 놓치게 될까봐서였다. 수화기를 낚아채듯 들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그게 무슨 전환지 알 수 있었다. 수화기를 귀에 바싹 갖다댔을 때, 날카롭게 째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였다. 남자는 흥분 상태에 있었다.

ꡒ박태자씨 댁이죠?ꡓ

박태자는 예, 했다. 예상이 빗나간 걸까. 수화기를 들면서 기대했던 건 여자 목소리였다. 과천에 있는 찻집 ꡐ뷰티풀 피플ꡑ의 언니 목소리였다. 남자가 아니었다.

ꡒ무슨 통화가 그리 길어요?ꡓ

남자가 다시, 째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흥분 상태에 있고, 알코올이 꽤 들어간 목소리였다. 박태자는 당황해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통화가 그리 길어요? 황당한 질문이었다. 응답이 없자, 남자가 다시 말했다.

ꡒ내 마누라를 지금 세일할 건데, 와보겠소?ꡓ

남자는 이제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내 마누라를 지금 세일할 건데 와볼 거야, 말 거야.

ꡒ와서 내 마누라를 사가지 그래? 응? 내 집에서.ꡓ

ꡒ……아.ꡓ

박태자는 풀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제야 이 남자가 누군지, 이 엉뚱한 통화의 배경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제에길, 그녀는 입속말을 했다. 일을 저질렀군. 남자는 뷰티풀 피플 언니의 남편이었다. 널 팔아버릴 거야, 널 세일해버릴 거야, 라는 협박을 입에 달고 다닌다던 바로 그 남편이었다. 그 남편이 지금 세일을, 공고하고 호객하는 것이었다, 언니를 팔아버릴 거라고.

ꡒ처음 인사드리는 거네요.ꡓ

박태자는 너무 건조해서 숨이 막힐 것 같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뭘 파신다구요? 그리곤 저쪽에서 듣지 못하게 수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ꡒ잔말 말고, 지금 사러 와. 파산 세일 기간은 오늘 밤뿐이거든.ꡓ

박태자는 몇 박자 늦춰서, 몇 박자 어긋나게 해서, 다시 물었다.

ꡒ……파산? 파산 세일요?ꡓ

ꡒ세일 기간은 지금 이 밤뿐이니까, 알아서 해. 오늘로 팔리지 않으면 이년은 폐기 처분될 거야. 썰어서, 썰어서 50리터짜리 쓰레기 봉투에 넣어버릴 거야.ꡓ

박태자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차 키를 꺼내고, 잡히는 대로 주워신곤, 뒤뜰을 가로질렀다. 뒤뜰 주방 환풍장 아래, 지하 작업실 출입구로 갔다.

박태자는 바닥에서 약간 돌출해 있는 널빤지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들어올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흙바닥에 널빤지 한 장이 버려져 있는 것으로 알 것이었다. 널빤지 문 아랜 지하실로 통하는 쇠사다리가 있고, 그 아래 작업실이 있다. 그 작업실엔 침실이 있고, 침실엔 남편과 거름이 있을 것이었다. 널빤지 문 밑으로 고개를 디밀곤, 남편을 불렀다.

ꡒ한창림! 한창림!ꡓ

ꡒ뭐!ꡓ

지하 작업실 저 안쪽에서 남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와봐, 박태자는 소리쳤다. 잠시 후, 수직 통로 쇠사다리 끝에 남편이 나타났다.

ꡒ뭐 해?ꡓ

ꡒ저놈 아직 길이 안 들었어, 어떡하면 착한 학생이 되는 거지?ꡓ

남편 투덜대는 목소리가 수직통로를 타고 올라왔다. 가만 보니, 거름과 또 다투는 모양이었다. 기가 막혔다. 서른 넘은 어른이 고등학교 2학년 사내애를 다루지 못 해 저토록 쩔쩔매다니. 평소에 그토록 자부하던 진짜 수컷은 다 어디 갔나.

ꡒ언제까지 어린애랑 장난만 치고 있을 거야, 씻! 수컷들은 애고 어른이고 따로 없다니깐. 뭐 해, 빨랑 올라오지 않고.ꡓ

ꡒ왜 그래?ꡓ

남편이 어깨를 으쓱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난 할 일이 좀 남았어.

ꡒ나랑 갈 데가 있어. 빨랑 올라와! 차에 시동 걸어놓을게.ꡓ

차에 올라타는 남편의 행색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트레이닝 복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뷰티풀 피플 언니한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런 행색으론 무슨 일이든 처리하기에 불편할 것이었다. 박태자 자신의 차림도 볼 만했다. 티셔츠 한 장에 팬티뿐이었다. 신발도 그랬다. 꺼내 신고 보니, 낙엽 쓸 때나 신는 단화였다. 잘못하단 우스운 꼴을 당하겠어. 그녀는 일단 가봐서 상황이 좋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 생각을 했다. 그릇이나 집어던지는 부부싸움이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그 이상이면……. 그녀는 인덕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ꡒ이러고 가?ꡓ

남편이 슬리퍼 신은 발을 까딱까딱해 보이며 물었다.

ꡒ파티에 가는 게 아냐. ……전화가 왔어. 뷰티풀 피플 언니 남편이야. 언니 남편이 언니를 지금 팔아버리겠대. 세일해버리겠대.ꡓ

남편이 심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알아먹은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ꡒ우리더러, 지금 당장 와서 사래. 미친놈.ꡓ

남편은 여전히 심상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남편의 무반응이 답답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ꡒ가봐서, 상황이 나쁘면 경찰을 부르자. 끼어들지 말고.ꡓ

ꡒ상황이 나쁘면? 얼마나 나쁘면?ꡓ

그제야 남편은 입을 열었다. 표정엔 드러나지 않았지만, 귀찮은 일에 말려들었다고 불평하는 빛이 역력했다.

ꡒ얼마나 나쁘면? 글쎄, 누가 다쳤거나 하면. 언니가 다쳤거나 할 정도로 나쁘면.ꡓ

ꡒ하. ……깨져서 피가 나든, 어디가 부러졌든, 경찰이 와도 할 수 없어. 부부싸움은 둘 중 하나가 고소해야만 경찰이 개입할 수 있어. 부르면 오긴 오겠지, 하지만 우리 말은 듣지 않을 거야.ꡓ

ꡒ그럼 언니더러 얘기하라고 하면 되잖아. 언니가 경찰한테 얘기하면…….ꡓ

박태자는 또 뭔가가 뒤틀려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 뭔가가. 남편이 하, 하고 쇳소리를 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ꡒ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면? 언니라는 사람이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상황이면?ꡓ

남편의 그 말을 들으니, 박태자는 더 불안해졌다.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이 어떤 상황일지 떠올려보았다. 입을 러닝 셔츠로 틀어막았다면?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어딘가 가둬놓았다면? 정신을 잃었다면? 그러다 끔찍함에 소름이 돋았다. 입을 재봉바늘로 꿰매놓았을 수도 있었다. 뷰티풀 피플의 언니는, 자기 남편에게서 무서운 냄새가 난다고 했다. 공장을 팔아치운 올해 초부터, 정신이 조금씩 이상해졌다고 했다. 전에 없이 수다를 떨어대고, 언니의 손가락을 지끈 밟고 때리고, 유일한 재산인 과천의 가게를 팔아치우자고 대책도 없이 요구해오고, 무서운 냄새까지 난다고 했다. 바로 얼마 전엔 언니를 뷰티풀 피플의 층계 난간에 거꾸로 매달아놓기까지 했다.

그 일은 박태자가 잘 알고 있었다. 현장에 갔었으니까. 119 구급대를 부른 게 그녀였으니까. 언니 남편은 언니를 거꾸로 쥐곤, 와인 병처럼 흔들다 층계 아래로 던져버렸다. 그때 남편을 고소했어야 했었는데. 고소하도록 언니를 설득했어야 했는데. 후회스러웠다.

도로 양편으로 희끄무레하게, 비닐 하우스들이 보였다. 화훼 농가들이었다. 여름이면, 드라이플라워 다발들이 도로변을 따라 몇 백 미터나 늘어서 있곤 했다. 뷰티풀 피플 언니의 집은 이 지역의 깊숙한 데 있었다. 차는 좁다란 비포장 도로로 올라섰다. 속도를 줄였다. 언니가 남편한테서 난다는 무서운 냄새는, 박태자도 익히 알고 있는 냄새였다. 언니는 그 냄새를 무서운 냄새라고 불렀지만, 그녀는 그 냄새를 나쁜 냄새라고 불렀다. 나쁜 냄새는 그녀 남편인 한창림한테서 나는 냄새였다. 언니 남편과 박태자 남편의 냄새는 아마도, 같은 종류의 냄새였다.

박태자는 여지껏, 자기 남편 하나뿐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 냄새를 피우는 수컷이. 그런 수컷이 세상에 또 하나 있다란 생각에, 끔찍해졌다. 나쁜 냄새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진 결코 맡아본 적이 없는 냄새였다. 그녀의 어휘 실력으로선, 형언키 어려웠다. 어떤 악취도 그보다 더할 순 없었다. 세상 악취들을 몽땅 증류해, 몇 방울의 익스트랙트로 만든 것 같았다. 남편의 몸뚱이가 그런 냄새를 어떻게 해서 풍기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생리작용이 그런 냄새를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수백만 개의 땀샘과 수백만 개의 기름샘들이 극한까지 활성화되어, 활짝 열리어, 한꺼번에 내뿜은 듯한 냄새였다. 냄새가 지나간 다음엔 남편이 입고 있던 팬티며 러닝 셔츠며 와이셔츠가, 싯누런 분비물들로 역겹게 구토나게 절어 있곤 했다. 악취가 폭풍처럼 쓸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독취(毒臭)였다. 아니, 그 표현도 부족했다. 얼마나 독한지 코로 맡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에서 흔히 나는 액취(腋臭)도 아니었다. 남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그건, 수천 세대 이전에 존재했다가 지금은 잊혀진 냄새였다…… 인간 염색체의 유전물질 중엔, 휴면(休眠)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형질로서 밖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저 가능성만으로 존재하는. 그런 비활성 유전물질 중엔 휴면 기간이 수천 세대에 이르는 것도 있다고 했다. 남편이 언젠가 말했었다, 그것이 깨어났어, 그게.

수천 세대만에, 활성화됐다는 얘기였다. 남편은 그걸 수컷 냄새라고 불렀다.

무서운 냄새건, 나쁜 냄새건, 수컷 냄새건,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줄 수가 없었다.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무엇보다, 박태자 자신의 몸에선 그런 냄새가 나지 않으니까. 그것―비활성 유전물질의 정확한 명칭은 남편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이상 체질(異常體質)에 대한, 자가 진단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자기의 특이 체질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켜줄 필요를 느껴, 억지로 짜맞춘 해석일지도 몰랐다.

실은, 이상 체질을 가진 사람들은 드문 게 아니었다. 해외토픽이나 초자연 깜짝 쇼(weird show)에서 이따금 보듯이. 어떤 이상 체질은 몸 안 가득, 콜레라 균을 싣고 다녔다. 말하자면, 콜레라 균의 인간 배양기 같은 존재였다. 정작 자신은 콜레라 균에 절대적인 면역을 갖고 있었다. 걸어다니는 콜레라 균 배양기는, 콜롬비아에서 교통사고로 죽는다. 늑대인간처럼 짧고 검은 털로 온몸이 덮인 이상 체질도 있고, 전기에 유달리 민감한 이상 체질도 있다…….

흔치는 않지만 이상 체질이란 확실히 존재한다. 사람들이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나쁜 냄새를 풍기는 남편 역시 그런 부류일지 몰랐다. 어쨌거나 그녀에겐, 이런 식의 설명 역시 얼토당토않아 보였다.

박태자 그녀가 자신을 갖고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라곤 냄새, 자체뿐이었다. 냄새의 존재, 자체까지 부인할 순 없었다. 남편의 냄새와 비교할 만한 냄새를 굳이 찾자면, 과천 서울대공원 동물원의 악취를 들 수 있다. 대기(大氣)가 무거운 날, 동물원 실내 관람장에 터질 듯 포화돼 있는 독취를 들 수 있다. 콘크리트와 플렉시 유리의 사육장에 갇혀, 몇 년씩이나 인스턴트의 삶을 산 동물들의 독취를 들 수 있다. 자연의 바람에 실려보내지 못하고, 사육장 속에서 몇 년씩이나 고이고 고인. 그렇게 고이고 고이다 마침내, 손가락 끝에 묻어날 것 같은 질감까지 갖게 된.

그 앞에 서면, 코는 물론이요 눈까지 확― 타오를 듯했다. 특히, 만드릴 육식 원숭이의 냄새가 남편의 그것과 가장 가까웠다. 그렇지만, 그것조차 남편의 냄새완 다른 것이었다.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ꡒ시동은 끄지 말래?ꡓ

박태자가 차를 세우자 남편이 말했다. 십여 미터 앞에 뷰티풀 피플 언니의 집이 있다. 아담한 이층 양옥에, 널따란 정원이 딸려 있다. 정원이 넓어서 좋아, 언니는 일부러 정원이 넓은 집으로 전세를 얻었다고 했다. 전세긴 하지만, 벌써 오 년째 살고 있는 집이었다.

남편이 차에서 내렸다. 박태자가 운전석 쪽 도어를 열고 내리려 하자, 남편이 어깨를 눌러 좌석에 도로 앉혔다.

ꡒ넌 그냥 여기 있었으면 해.ꡓ

ꡒ왜?ꡓ

ꡒ그냥.ꡓ

ꡒ그놈도 수컷이야.ꡓ

박태자는 가능한 한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놈도 수컷이야, 너처럼 그놈도. 그놈한테서도 너와 똑같은 냄새가 나. 그러자 남편의 손가락 끝이 움찔, 했다.

ꡒ하.ꡓ

남편이 그렇냐는 투로 하, 했다. 그때였다.

뭔가가 훅, 끼쳤다. 냄새였다. 눈물이 비어져나왔다. 박태자는 재빨리 입을 다물곤, 손으로 덮었다. 심장이 콩당거렸다. 나쁜 냄새야! 남편 몸뚱이가,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일의 형편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될 거라는 징조였다. 남편이 나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면, 핏내도 함께 공기를 더럽힌다…… 남편 몸뚱이가 항상 그런 냄새를 풍기는 것은 아니었다. 냄새는, 냄새 자체가 특이한 것처럼 특이한 때만 풍겼다. 특이한 경우, 특이한 자극이 남편에게 가해졌을 때만. 오늘 밤처럼. 속이 뒤집혔다. 남편은 벌써, 질질 슬리퍼 짝을 끌며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도 차에서 뛰어내려 뒤를 좇았다. 집이, 캄캄하다.

ꡒ없잖아.ꡓ

남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쾌하고 발랄한 목소리를 냈다. 경쾌하고 발랄하고, 속이 텅 빈 듯한. 남편이 후끈, 달아오를 때 나오는 목소리였다. 땀샘과 기름샘들이 극한까지 활성화되어, 끓을 때. 나쁜 냄새의 싯누런 폭풍이, 사타구니와 겨드랑이를 휩쓸 때. 나는 피가 좋아, 하고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앞뜰은 비어 있었다. 마주 보이는 거실도, 이층 방 창문도, 다 깜깜했다. 불빛이라곤, 없었다. 어디 갔을까. 고객을 초대해놓고.

ꡒ하, 어디 갔지?ꡓ

남편이 마치 들으라는 듯, 소리를 높였다. 나쁜 냄새는, 더 나빠졌다. 박태자는 남편 곁에서 몇 발짝 물러섰다. 물러서서 보니, 남편 주위로 캄캄하게 몰려들고 있는 어둠이 보였다. 어둠이 초고속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몰려들어선, 소용돌이처럼 휘감아 돌며 뭉치고 있었다. 캄캄하게, 점점 더 캄캄하게, 소용돌이치며 뭉치고 있었다. 밀도가 치솟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뭉친 어둠의 질량이 느껴졌다. 어둠에서 질량이 느껴졌다. 바로, 눈에 보이는 나쁜 냄새였다. 코로 맡는 게 아닌, 눈으로 보는 나쁜 냄새였다…… 착시(錯視)였다. 나쁜 냄새가 그녀의 눈에 그런 착시를 가져온 것이었다. 그녀는 씻, 하고 치를 떨었다. 남편 곁이 아니라면 어디서도 겪어볼 수 없는 착시 현상이었다. 남편의 키가 적어도 손가락 두 개 길이만큼은 더 커 보였다, 더 커졌다.

ꡒ안녕하세요?ꡓ

남편이 경쾌하고 발랄하고, 속이 빈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그리곤 정원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나쁜 냄새는 이제 남편을 감싼 채 각질화되고 있었다. 바짝 다가가면, 튕겨버릴 것 같았다.

ꡒ여기 좀 봐요, 아무도 없어요?ꡓ

그때, 정원 저쪽 귀퉁이에서 흐린 빛이 나타났다. 백열등 불빛이었다. 남편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날카롭게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났다.

ꡒ아무도 없긴!ꡓ

불빛 너머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 상체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면서. 까딱까딱 고개를 끄덕이며. 거구였다. 2미터는 더 돼 보였다. 남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거구는, 스무 발짝쯤 떨어진 곳에 멈춰서선, 뺨을 어루만졌다. 언 뺨을 녹이기 위해 그러는 것처럼, 두 뺨을 손바닥으로 부비고 있었다. 스스로 밝히지 않아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까 박태자의 집에 전화를 걸어 소리를 질러댄, 그 작자였다. 뷰티풀 피플 언니의 남편이었다.

ꡒ넌 뭐니?ꡓ

거구가 물었다. 남편은 하, 하고 신음을 지르곤 쯧쯧, 혀를 찼다.

ꡒ넌 뭐니? 하, 날 언제 봤다고 그래요?ꡓ

남편은, 목소리에서 감정을 비우고 있었다. 텅, 비우고 있었다.

ꡒ박태자란 년이 너야?ꡓ

ꡒ언니는 어딨어요?ꡓ

박태자는 남편이 뭐라 하기도 전에, 다급한 마음으로 끼어들었다. 남편이 손을 들어 잠자코 있으란 신호를 보냈다. 모른 척 다시 물었다, 언니는 어딨어요. 좀 봤으면 좋겠어요. 상황을 먼저 파악해야 했다. 뷰티풀 피플 언니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사고가 나면 큰일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경쾌하고 발랄한 목소리 뒤에 숨은, 또다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난 피를 좋아해, 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구가 몇 발짝 다가왔다. 러닝 셔츠에 반바지, 한여름에나 가능한 차림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결코 추워 보이진 않았다. 열기(熱氣)가 느껴졌다. 러닝 셔츠를 싯누렇게 그을려버릴 것 같은 냄새의 열기였다. 거구도, 수컷이었다.

ꡒ어딨냐고? 암, 봐야 사든가 말든가 하지…… 포장까지 근사하게 해놨는데.ꡓ

거구는 뒤돌아서선 느릿느릿 불빛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계는 하지 않는 눈치였다. 박태자 남편이 자기 같은 류의 인간인 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 집의 뒤뜰이었다. 평소엔 차를 세워두거나, 드라이플라워를 널어 말리는 따위의 온갖 잡다한 일에 쓰이는 곳이었다. 맨흙이 벌겋게 드러난 흉한 곳이었다. 장마철이면 흙탕물이 담벼락 밑둥까지 타고 올라와 시뻘겋게, 물들이곤 했다. 잔디가 다년생 화초들과 예쁘장하게 어우러지곤 하는 앞뜰과는 비교되는 곳이었다. 백열등은 앞뜰에서 뒤뜰로 돌아가는 모퉁이 벽에 붙어 있었다.

ꡒ누가 널 사줬으면 좋겠냐고 하니까…… 마누라가 당신들을 찾더군.ꡓ

목소리는 창고 겸 차고로 쓰이는 가건물 안쪽에서 들려왔다. 안쪽은 더 깜깜해서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집에 몇 번 놀러와봤지만 가건물은 항상 닫혀 있었다.

ꡒ깎을 생각은 마.ꡓ

박태자와 박태자의 남편은 여전히 스무 발짝쯤,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스무 발짝이란 한달음에 건너오기엔 좀 먼 거리였다. 거구가 그들을 덮치더라도 몇 초간 여유를 벌 수 있는 거리였다. 그녀는 가건물 안쪽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거구가 거기 있어서가 아니었다.

ꡒ언닌 어딨어요?ꡓ

박태자가 몇 발짝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차고 안쪽에서, 끙― 소리가 났다. 틀림없이 뭔가 있었다.

ꡒ포장 값은 안 받을게. 그리고 다른 물건들도 많으니까…….ꡓ

그 말과 함께, 차고 안쪽에서 형광등 불빛이 깜빡깜빡거렸다. 씻,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몇 번인가 희고 차가운 빛이 차고 안을 훑을 때, 그녀는 봤다. 뷰티풀 피플 언니가 거기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완전히 밝아지자 박태자는 두 팔을 옆구리에 딱 붙인 채, 굳어버렸다. 하, 남편 신음이 들렸다.

정말, 파산 세일이라 할 만한 광경이었다. 살림 세간들이 몽땅, 그리로 쏟아져나온 듯했다.

다기 세트부터 쓰리 도어의 대형 냉장고까지, 재작년에 이탈리아에서 사온 양탄자에서부터 파나소닉제의 스테레오 세트까지. 올초에 들여놓은 팬티엄 PC부터 밥솥까지. 주방에서 떼어낸 가스레인지부터 거실에서 떼어낸 열대어 수족관까지. 수족관은 떼어낼 때 물을 버렸는지 휑, 하니 비어 있었다. 세간이란 세간은 죄다 끌려나온 것 같았다.

개중엔, 거구의 말대로 언니도 있었다. 거구의 말대로 그럴싸하게, 끔찍하게 포장도 돼 있었다.

ꡒ씻!ꡓ

박태자는 놀랍고 기가 질려서, 그저 씻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남편도 그 광경에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하아― 하는 신음이 남편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뷰티풀 피플 언니는 세간들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발가벗기워진 채로, 어디에 쓰이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커다랗고 등받이가 높다란 의자에 매어져 있었다. 거꾸로.

보기 민망한 광경이라기보다는, 끔찍해 절로 눈 감기는 광경이었다. 언니의 두 다리는 차고 천장을 향해 V자처럼 활짝 벌려져 있었다. 다리를 다물지 못하게, 손목을 발목에 포개어 노끈으로 친친 감아놓았다.

허리와 가슴도 대여섯 군데나 의자 등받이에, 몸을 비틀지 못하게끔 묶여 있었다. 젖가슴 위아래에도 노끈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젖가슴은 주먹만하게, 터질 듯 부풀어올라 있었다. 작고 탱탱하고 핏기 없이 파리한 빛깔의 풍선처럼. 피가 통하지 않아 핏기 없이 파리한 풍선처럼. 바늘로 찌르면, 물컹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빨갛고 파란 드라이플라워 몇 다발이, 불꽃을 피운 것처럼 의자 등받이에 꽂혀 있었다.

언니의 기다란 머리카락은 차고 바닥까지 흘러내려, 널따랗게 흩어져 있었다. 박태자가 선 자리에선, 언니의 이마밖엔 보이지 않았다. 이마는 시뻘겋게 물들었다. 눈을 감았지 떴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씻, 그녀의 잇새로 다시 한숨이 새어나왔다. 여기저기 내놓은 물건들마다 무슨 숫자 같은 것이 적힌, 손바닥만한 종이가 붙어 있었다. 언니의 배꼽에도 있었다.

언니를 비롯한, 이른바 파산 세일의 물건들이 진열된 그 광경을 일별하는 데는, 겨우 한순간밖엔 걸리지 않았다. 그 모든 광경들을 파악하는 데는 한순간밖엔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한순간이 지나고 다음 순간이 다가왔을 때에도, 그녀는 행동을 결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결정은커녕,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등을 돌리고 있어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은 지금, 달아오르고 있었다.

거구는 차고 맨 뒤쪽, 세탁기 위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병째 들이켜고 있었다. 거북 등껍질 문양의 사각형 병, 산토리 위스키였다. 남편이 좋아한다며, 오리지날을 일본에까지 우편주문해 가져다놓은 것이었다.

ꡒ어때? 살 만한 것이 좀 있나?ꡓ

거구는, 술병을 입에서 떼곤 세탁기에서 내려와, 천천히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ꡒ좀 오래 쓴 것들이긴 하지만, 고장난 것은 없어. 비양심적인 세일이 아냐. 고장나거나 못 쓰게 된 건 없어. 물론 좀 낡긴 했지.ꡓ

거구는, 언니가 거꾸로 매어져 있는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곤 상체를 기울였다. 상체를 기울이곤 턱을 높이 든 채로, 이쪽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것도 아직 쓸 만해…… 거구는, 그 커다란 손바닥으로 언니 사타구니 새를 쓰다듬었다. 윤기없이 헝클어진 언니의 까만 치모가 손바닥 이쪽저쪽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했다. 바삭바삭, 소리가 들릴 듯했다. 불두덩이, 핑크빛으로 속을 드러냈다.

ꡒ고장나거나 망가지거나, 죽은 건 팔지 않아. 아예 가져 나오지도 않았지.ꡓ

거구는 찰싹, 소리나게 사타구니 새를 때렸다. 남편이 하, 하고 입을 뗐다.

ꡒ하, 그 물건 아직 살아 있나?ꡓ

ꡒ그럼.ꡓ

거구는 확인해주겠다는 듯이, 다시 한번 사타구니 새를 내리쳤다. 끙― 소리가 의자 받침대 부근에서 들려왔다. 살아 있어, 박태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저 끙, 소리일 뿐이지만 그건 뷰티풀 피플 언니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그때, 언니의 이마가 아래로 젖혀지는 게 보였다.

젖혀진 이마 너머에서, 새빨갛게 반들거리는 언니의 두 눈이 보였다. 충혈되어 그런 것인지, 피를 뒤집어써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새빨간 두 눈이 몇 번 깜박였다. 아, 박태자는 작게 탄식했다. 언니가 지금, 자신을 향해 눈을 깜박였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확신은 기쁨이 되었고, 그녀 입에서 다시금 탄식이 흘러나오게 했다.

그때, 남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쾌하고 발랄하고, 속이 텅 빈 듯한 목소리를 냈다.

ꡒ우리가 사겠어.ꡓ

ꡒ그래.ꡓ

ꡒ얼마지?ꡓ

ꡒ여기 가격표 붙어 있는 게 안 보이나? 이십칠만원이야.ꡓ

ꡒ아니…… 네 새끼의 냄새를 맡고 싶어.ꡓ

남편의 느닷없는 말에 거구가 좀 놀란 모양이었다. 사타구니 새에서 손을 떼더니 상체를 곧추세웠다.

ꡒ뭐?ꡓ

ꡒ네 새끼한테도 수컷 냄새가 난다며? 어디 한번― 맡아볼까. 하!ꡓ

여전히 경쾌하고 발랄한, 속이 텅 빈 듯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만 듣는다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전혀 짐작도 못 할.

남편은 차고 쪽으로 한 발 내딛었다. 거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ꡒ……목화밭이 뭘 먹고 크는지 알아?ꡓ

남편이 한 발짝 한 발짝 차분한 걸음을 옮기며, 계속 말을 이었다.

ꡒ하, 수수께끼를 내는 거야, 수수께끼…… 목화밭이 뭘로 기름져가는지 알아? ……목화밭이 해마다 그토록 기름져가는 이유를 알아? ……뭘 먹길래!ꡓ

이제 남편은 언니가 매어져 있는 의자 바로 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팔을 뻗으면 거구의 턱도 쥐어비틀 수 있을 만치, 거구에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하, 하는 소리가 박태자 귀에까지 들렸다.

ꡒ썰어서 50리터 쓰레기 봉투에 넣어버린다고? ……쓰레기 봉투는 준비했나? 쓰레기 봉투는 준비했나? 준비됐나? ……하, 넌 죽었어.ꡓ

남편의 팔이 공중 높이 솟는 게 보였다. 뭔가, 핏물 같은 게 형광등께까지 흩날렸다. 다음 순간 거구가 한쪽 뺨을 감싸쥔 채, 의자 뒤로 사라졌다. 그 다음 순간 남편이 기우뚱하더니, 옆으로 쓰러졌다간, 스프링처럼 되튀어올랐다. 그때 이미 거구는 뒤뜰의 저편을 달리고 있었다. 남편은 엉거주춤 제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뿐 거구의 뒤를 쫓진 않았다. 거구는 이제 뒤뜰 저편의 담벼락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러닝 셔츠와 반바지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손으로 감싸쥔 뺨 쪽에서 핏줄기가 흩날렸다. 하. 형광등 불빛에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남편의 일그러진 입술이 비쳤다.

ꡒ넌 뭐야!ꡓ

거구가 뒤뜰 담벼락에 걸터앉아선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어두워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담겨 있던 그 터무니없던 자신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당황하고 낭패한 목소리였다.

ꡒ머리를 활짝 열어놓고 있어!ꡓ

남편이 소리쳤다. 남편은 웃고 있었다.

ꡒ활짝, 머리를 열어놓고 있어야 돼! 조만간 내가 부를 테니까 말야. 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재깍 달려와야 돼! 알겠어? 재깍!ꡓ

ꡒ목화밭으로! 목화밭으로 말야!ꡓ

박태자는 119 구급대를 불렀다. 그녀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뭔가 걸쳐줄 만한 옷가지를 찾고 있을 때, 남편이 뷰티풀 피플 언니를 등에 업고 거실로 들어왔다. 얼마나 난장판을 만들어놓았는지, 변변히 뉘일 자리조차 없다. 이삿짐을 옮기고 난 뒤 허섭쓰레기만 널려 있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박태자는 안방에서 찾은 담요와 옷가지들로 언니의 알몸을 대충 덮어놓았다. 시체의 살갗처럼 차가웠다. 같은 차가움이라도, 죽은 사람 살갗의 차가움과 산 사람 살갗의 차가움은 달랐다. 시체 살갗의 차가움은 손가락 끝에서 미끈거리는 차가움이었다. 기분 나쁘게 미끈거리는 차가움이었다. 언니는 정신이 나가 있었다. 눈을 뜨고 있고 눈꺼풀도 깜빡거렸지만,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수리 어디가 깨진 모양이었다. 이마와 뺨이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 노끈으로 얼마나 죄었는지, 피부가 다 벗겨져 있었다. 그 외에 별다른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119 앰뷸런스의 경보음이 귀따갑게 울려댔다.

박태자는 앰뷸런스에 기다시피 해서 올라타면서, 남편의 손을 봤다. 채 닦지 못해, 새빨갛게 얼룩져 있었다.

ꡒ그게 뭐야?ꡓ

남편의 손에 뭔가가 꼭 쥐어 있었다. 박태자가 묻자, 남편이 손을 들어 펴 보였다.

ꡒ귀.ꡓ

그건 귀였다. 거구의 귀였다. 아까 차고에서, 남편의 팔이 공중을 갈랐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박태자는 그제야 알았다. 남편은 거구의 귀 한쪽을 뜯어낸 것이었다.

ꡒ……그걸로 뭘 할 거야?ꡓ

박태자가 기막히다는 듯,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수컷들은 정말 못 말려.

ꡒ뭘 할 거냐고? 이걸로 놈을 꼬셔내어…… 한 쪽 귀마저 떼어내야지.ꡓ

남편이, 닫히고 있는 앰뷸런스 문 저쪽에서 경쾌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