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로만 Narrative

[단편소설] 흰 얼룩말 - 이윤기

버블건 2007. 11. 1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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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얼룩말

                                                                                                                       이윤기


 
“……마당에 놓인 널평상에 세 사람이 앉아 있다. 스무 살 먹은 청년, 청년의 아버지 그리고 청년의 할아버지다. 마당과 길 사이에는 판자를 격자(格子)로 세워 만든 울타리가 있다. 지금부터 내가 묘사하는 울타리 모양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울타리 만드는 데 쓰인 판자의 너비는 한 뼘쯤 된다. 울타리의 판자는 서로 딱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판자와 판자 사이가 대략 한 뼘쯤 벌어져 있다. 그래서 마당에 놓인 널평상에 앉아 시선을 옮기면 울타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 모습이 보인다. 예전에는 이런 판자 울타리가 많았다. 판자를 촘촘하게 짜 놓으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울타리가 통째 쓰러지는 일이 흔했다. 청년은 울타리를 등진 채 앉아 있다. 그 청년이, 무언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던지 고개를 돌려 울타리 쪽을 흘깃 보고는 고개를 되돌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흰 옷 입은 사람이 지나가는군요?’
청년의 아버지도 아들의 말을 듣고는 울타리 쪽으로 잠깐 시선을 던진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과는 다른 의견을 내어놓는다.
‘사람이 지나가기는 지나가는데, 흰 옷 입은 사람이 아니라 검은 옷 입은 사람인데 그래?’ 청년의 할아버지는 울타리 쪽을 향해 앉아 있다. 할아버지는, 손자와도 다르고 아들과도 다른 의견을 내어놓는다.
‘아니다. 무늬 옷을 입은 사람이다. 줄무늬 옷을 입은 사람이다. 세로줄 무늬 옷을 입은 사람이다.’
‘아, 그렇군요, 할아버지.’
‘아, 그렇군요, 아버지.’
청 년과 청년의 아버지가 이구동성으로 노인의 의견을 지지한다. 어떤가?”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는데요…… 그렇다면 무늬와 바탕을 가지고 한번 시비해 봅시다. 흰 바탕의 검은 줄무늬 옷입니까, 검은 바탕의 흰 줄무늬 옷입니까…….”
“자네, 병이 깊구먼…… 또 설명하려고? 자네의 설명 밖에는 세계가 없는 것인가…… 저 성급한 예단의 칼끝, 무작위로 휘두르는 유추의 창끝을 보라…… 중증이다.”
“초 보운전입니다. 먼길을 빠르게 가는 연습입니다. 설명하는 연습입니다. 모르면서, 모르는 표를 내지 않으려고 안개 피우는 거, 그거 싫어요. 이렇게 연습하면서 배우다 보면……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좋을 날이 오겠지요…… 이러다 보면…….”
상선사(上善寺) 보살을 두고 그와 언쟁을 벌이기 직전에,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이 취하기 직전에 나누었던 대화다.
상 선사 다녀오는 길이었다. 나는 그를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사석에서는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혼자 사는 사람이라 여행을 잘 했다. 그런 그와 단둘이서 한 여행이었다. 여행의 비용은 지방대학이 특강 <오너라리움(사례금)>으로 물었다. 원래 상선사 방문은 예정에 없었는데, 그가 상선사 일주문 앞의 은행나무가 볼 만하다고 해서, 나도 그러자고 한 터였다.
지나는 길에 일정을 조금 구부려 가면서 하는 것이지, 부러 계획을 세워서는 하기 어려운 게 이름난 나무 구경이다. 곱게 오래 살아서 보기좋은 나무는 부러 일삼아 찾아가 제물을 올리기까지는 무엇해도 지나는 길에 일정을 조금 늘려 잡아서라면 둘러보고 경의를 보낼 만한 사당(祠堂)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무라는 존재는 종교의 자리를 그렇게 고즈넉하게 기웃거린다.
식당칸의 좌우요동이 어찌나 심한지 술잔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찬 술이라 술잔 밑에 물이 고였다. 손을 떼면, 술잔은 제 몸으로 액화시켜 흘러내려 보낸 물 위를, 수심(水深)이라고는 없다시피한 그 물 위를 좌로 혹은 우로 떠다니고는 했다. 나는 두 손을 오므려 술잔을 여유있게 가둔 채 가만히 좌우운동하는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는데?”
“…….”
나는 그의 시선을 마중하고, 오른손 손바닥을 보여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면 그렇지.”
“형님은요…….”
“나도 그 손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형님, 쉰 살 먹은 오페라 가수가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제가 쉰 살이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셨지요?”
“……쉰 살까지는 아닐걸, 아마?”
“이를테면…… 그렇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마흔일곱을 넘지는 않았을 거라.”
“정확하게도 짚으시네? 뭘 보고요?”
“나이테…….”
“나이테요? 나이테가 있었어요?”
“사람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점 더 해독하기 어려운 책이 되어 간다고 하더라. 여자는 특히 그 정도가 심하다고 하더라.”
“그건 또 왜 그래요? 여자가 어째서 그 정도가 심하다는 거지요?”
“상식적인 독법으로 읽히기를 거부하거든. 남자들은 상식적인 독법에 몸을 맡기는 경향이 있고…….”
“해독이 다 안 되어서 아름답게 여겨지는 책도 있겠군요.”
“오랜만에 자네 입에서 말 같은 말이 한마디 나왔구나…… 그렇다면 설명이 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도 가능하겠구나. 그런데…… 세상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니…….”
“그 여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발갛게 언 손이 생각났어요. 한겨울에 시냇물에서 빨래하느라고 바알갛게 언 손…… 손가락 끝으로 누르면 손등에 마알간 점이 생겼다가 그 점이 곧 다시 바알간 색깔로 되돌아가는 그런 손…… 그런 손이 생각났어요. 그런 손에 손을 잡혀 본 경험이…… 형님한테도 있을 테죠?”
“있지…… 어머니들 손이 원래 그런 손이니…….”
“<얼음 뺀다>는 말 아세요?”
“알고 말고. 손발이 동상에 걸리면 얼음물에다 담그고는 했지. 어찌나 저리고 쓰리던지…… 그걸 <얼음 빼기>라고 부른 것 같은데…… 그거지?”
“예. 그 여자 손에, 빼야 할 얼음이 있는 것 같았어요.”
“칼이 아니고?”
“칼……이라고 했어요?”
“응…… 칼.”
“아직도 칼을 들고 있는 것 같더라는 뜻인가요?”
“내가 느끼기로는…….”
“얼음이 아니고요?”
“얼음이 아니고…….”
“그러니까 뭡니까? 칼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물건인데…… 형님은 그 여자의 손에 칼이 들어 있다고 하는군요? 나는 그 여자의 손에는 누군가가 빼 주어야 할 얼음이 박혀 있다고 생각하고요? 이건 굉장한 차이인데요?”
“검은 옷 입은 사람이라는 판단과 흰 옷 입은 사람이라는 판단만큼이나 큰 차이지.”
청년과 청년의 아버지 그리고 청년의 할아버지 이야기는 바로 이 즈음에 그가 한 얘기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세로줄 무늬 옷을 입은 사람이라는 판단을 제시할 수 있으면 형님과 나의 견해는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군요?”
“하지만 여기에는 할아버지가 없는걸?”
“있을 수도 있지요. 형님과 나를 묶으면…… 형님의 견해와 나의 견해를 하나로 묶으면…… 우리 두 사람의 견해를 객관적인 것으로 절충해낼 수 있으면요…… 없는 할아버지를 하나 만들어내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 아니겠어요?”
“자네는 아직도 믿는구나. 논리는 힘이 없어.”
이 름을 대면 누구든지 알 만한 호텔 체인이 경영하는 식당칸이었다. 여행 자주 다니다 보면 접객업소가 제공하는 봉사가 인간에 대한 애정의 어떤 층위에서 발생하는지 짐작이 갈 때가 있다. 어린 양떼를 불러모아 놓고 털과 고기를 노리는 목동은 퉁명스러웠다. 술값만 호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비싼 술을 꽤 마셨다. 그가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마셨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내 경우는, 상선사 찻집에서 잠깐 만났을 뿐인 그 보살로부터 받은 기이한 인상, 그리고 그 인상이 촉발한 정의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에 까닭 모를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