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13

[단편소설] 육교 위에서 - 조세희

육교 위에서 조세희 신애는 시내 중심가를 걸으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사람·건물·자동차뿐이었다. 거리에서는 기름 타는 냄새, 사람 냄새, 고무 타는 냄새가 났다. 잠시 서서 주위를 둘러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인도에 사람들이 넘치고, 차도에 자동차들이 넘쳤다. 몸둘 곳이 없었다. 단 몇 초 동안이라도 걸음을 멈추고 우울을 달랠 곳이 없었다.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밑의 동생이 입원을 했다. 아직 마흔도 안 된 나이인데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다. 동생은 내과 의사들만 찾아다녔다. 위가 나빠져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사들을 찾아다녀도 동생의 병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 육십삼 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오십일 킬로그램으로 줄었다. 신애의 남편..

[단편소설] 흰 얼룩말 - 이윤기

흰 얼룩말 이윤기 “……마당에 놓인 널평상에 세 사람이 앉아 있다. 스무 살 먹은 청년, 청년의 아버지 그리고 청년의 할아버지다. 마당과 길 사이에는 판자를 격자(格子)로 세워 만든 울타리가 있다. 지금부터 내가 묘사하는 울타리 모양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울타리 만드는 데 쓰인 판자의 너비는 한 뼘쯤 된다. 울타리의 판자는 서로 딱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판자와 판자 사이가 대략 한 뼘쯤 벌어져 있다. 그래서 마당에 놓인 널평상에 앉아 시선을 옮기면 울타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 모습이 보인다. 예전에는 이런 판자 울타리가 많았다. 판자를 촘촘하게 짜 놓으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울타리가 통째 쓰러지는 일이 흔했다. 청년은 울타리를 등진 채 앉아 있다. 그 청년이, 무언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단편소설] 나는 아름답다 - 김영하

나는 아름답다 김영하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기형도의 "비가 2" 중에서 그해 7월. 아직 여름은 오지 않았다. 마치 종말이라도 닥쳐올 듯이, 나는 여름을 기다렸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막이 더욱더 황량해지기를 갈망했다. 그 목마름이 미처 우물을 파기도 전에 어느 날, 하늘에서는 천사들의 나팔소리처럼 시원한 뇌성 한 줄기가 울려 퍼지며 그 여름이 당도했음을 알렸다. 그 나팔소리와 함께 몰려온 비구름은 내리 나흘낮 나흘밤 동안 빗줄기를 뿌려댔다. 그리고 나자 빗발은 서서히 실팍해지면서 아스팔트 위로는 여린 김이 모락거리는 것이었다. 세상은 이그러진 채로 승천하고 있었다. 서서히 몸을 일으켜 창을 열고 밖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뛰어다니고 ..

[단편소설] 포스트잇 - 김영하

포스트잇 김영하 처음으로 산 수동 카메라. 36~72mm 렌즈가 장착되어 있고 모터 드라이브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수동이다. 이 카메라는 빛이 들어오는 구멍, 그것을 조절하는 조리개, 그리고 셔터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필요하거나 과장된 기능은 하나도 없다. 간혹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기가 막힐 정도로 멋진 사진을 뽑아낸다. 나와 함께 유럽과 터키,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를 여행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카메라를 통해 본 것만을 기억하게 되었다. 내 눈의 기계적 확장태라 할 수 있겠다. 중학교 3학년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소풍 전날이어서 오후가 되자 학교는 묘지처럼 텅 비어버렸다. 나는 혼자 도서실에 가서 소설을 읽었다. 그러자 뿔테안경을 쓴 국어선생이 다가와 나를 귀순용사 보듯 들여다보..

[단편소설] 파산세일 - 백민석

파산 세일 백민석 ꡒ밴댕이 소갈머리!ꡓ 박태자는 거실 소파에 앉아 졸았다 깨었다 하면서, 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배앤댕이, 배앤댕이…… 그녀는 그닥 추위를 타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히터도 얼마 전에야 켰다. 히터를 켜니, 실내온도를 겨우 19도로 맞춰놓았는데도, 기분이 나빠졌다. 실내온도가 높아진 탓이 아니었다. 히터에 의해 데워진 공기가 기분을 가라앉히고, 탁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지를 벗어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돌아갔다. 손님이 찾아오거나 외출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팬티에 히프를 덮는 기다란 티셔츠만으로 온 집 안을 쏘다닐 것이었다. 겨울이 지날 때까지 항시. 박태자는 깜빡깜빡 정신이 나갔다 들었다 하다가, 문득 눈을 떴다. 흐렸다. 수정체가, 박아넣은 유리 눈알처럼 투명하니 텅 비어..

[단편소설] 백민석 - 없는 작가

없는 작가 백민석 ci가 찾아왔다. 뭘 잃어버렸으니, 행방을 좀 알아봐달라는 것이었다. 미망인이 되기엔 너무 젊지 않아? 하고 항의하는 표정이었다. 당혹이나 놀람보다는, 노여움이 느껴졌다. 아직 대상을 찾지 못한. 그래서 나는 ci의 얘기를 귀담아듣는 척하다가,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거절한다면 그녀 이마를 벌겋게 물들이고 있는 노여움이 대상을 찾게 될 것 같아서였다. 격한 김에 과장된 표현을 쓴 것이겠지만 ci는 역시, 미망인이 되기에는 너무 젊다. 나는 그녀의 실제 나이도 안다. 결혼까지는 봐줄 수 있어도 임신이나 아기, 더욱이 미망인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게, 낯 뜨겁게 들릴 나이다. 몇 년째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 싱글인 총각의 편협해진 눈엔 거의 그렇다. ?결혼은 안 해?? ci는 그제..

[단편소설] 너의 의미 - 김영하

너의 의미 김영하 1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뇌 속에 숨어 있던 작은 성기가 힘차게 발기하는 느낌을. 저 지중해 어딘가에 있다는 누드 비치에 처음 당도한 관광객처럼 독자들은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책은 밝게 웃으며 어서 오라고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요염한 그 책들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암시를 풍기면서 손만 대면 가랑이를 벌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르가슴이 멀지 않았다. 바야흐로 우리의 뇌는 팽창하여 부풀어오르는 중이다. 우리는 허겁지겁 아무 책이나 뽑아 펼쳐댄다. 외설스런 장면이다. 그러나 이 누드비치의 풍경이 눈에 익으면 어느새 정신의 성기는 늘어지고 광대무변해 보였던 가능성의 세계는 1제곱미터 면적의 책상으로 한정된다. 졸음이 쏟아지거나 식..

[단편소설] 갈매기 - 이윤기

갈매기 이윤기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갈매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바닷가로 나가 갈매기와 놀았다. 갈매기는 그를 도무지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날아와 함께 놀아주었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이웃사람들로부터 그 소문을 듣고는 아들에게, 내 들으니 너는 매양 바닷가로 나가 갈매기를 벗삼아 논다고 하니, 나도 갈매기와 놀고 싶다. 그러니 몇마리 잡아 와서 나도 재미있게 놀게 해다오, 하고 말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리 하겠다고 하고는 바닷가로 나갔다. 그러나 갈매기는 그의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더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그는, 백구야, 날지를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이런 노래를 불렀지만 갈매기는 끝내 그의 곁으로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

[단편소설] 당신의 나무 - 김영하

당신의 나무 김영하 1 어렸을 적 당신은 떡갈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이제는 제목도 생각나지 않고, 책의 장정도 떠오르지 않는, 그저 그렇고 그런 동화책에서였을 것이다. 거대한 나무의 밑둥엔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심술궂게 다문 입이 그려져 있었고, 그 삽화들은 어린 당신을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무. 그때부터 당신은 나무를 두려워했다. 미친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산발하며 뻗어 내려간 뿌리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는 나뭇잎들. 나무들은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고 당신이 죽은 뒤에도 계속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 시절 당신의 집 앞에도 나무가 있었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아카시아 나무. 나무는 지붕을 덮었고 몇몇 가지는 당신 방 창문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둥치로는 개미들이 줄줄이 기어오..

[단편소설] 바람이 분다 - 김영하

바람이 분다 김영하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분다, 바람이 분다. 다섯번을 되뇌고 하늘 을 본다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를 끈다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를 끈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흐른다 한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다 게임을 한다. 게임이 한다. 게임을 한다. 시간이 가지 않는다. 시간이 가지 않는다. 시간은 가지 않는다. 불을 끈다. 이제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가 온다 머리를 짧게 자른 그녀가 온다. 치렁한 흑갈색 원피스에 머리를 짧게 자른 그녀가 온다. 한 때 나를 미치게 했던 치렁한 흑갈색 원피스에 머리를 짧게 잘라 더 고혹스 러워진 그녀가 온다. 1 훼밍웨이의 소설 킬라만자로의 표범을 읽고 있었다. 그 소설엔 왠지 커피가 어울릴 것같 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