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로만 Narrative

[단편소설] 백민석 - 없는 작가

버블건 2007. 11. 17. 10:55

없는 작가

백민석


ci가 찾아왔다. 뭘 잃어버렸으니, 행방을 좀 알아봐달라는 것이었다. 미망인이 되기엔 너무 젊지 않아? 하고 항의하는 표정이었다. 당혹이나 놀람보다는, 노여움이 느껴졌다. 아직 대상을 찾지 못한.
  그래서 나는 ci의 얘기를 귀담아듣는 척하다가,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거절한다면 그녀 이마를 벌겋게 물들이고 있는 노여움이 대상을 찾게 될 것 같아서였다.
  격한 김에 과장된 표현을 쓴 것이겠지만 ci는 역시, 미망인이 되기에는 너무 젊다. 나는 그녀의 실제 나이도 안다. 결혼까지는 봐줄 수 있어도 임신이나 아기, 더욱이 미망인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게, 낯 뜨겁게 들릴 나이다. 몇 년째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 싱글인 총각의 편협해진 눈엔 거의 그렇다.
  ?결혼은 안 해??
  ci는 그제사 자기가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돈이 있어야 하지.?
  ?그럼 돈은 없고 애인은 있어??
  아픈 데가 찔렸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ci는 호오, 하고 감탄했다. 어떤 여잔데? 그냥 어떤 여자야. 나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고, 그녀도 잔 받침에 잠시 걸쳐놓았던 담배를 집어들었다. 그녀도 나도 이제 그런, 있지도 않은 것들에 대한 속임수는 재미없어한다. 창 밖의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을 보면서도, 우리는 청소부와 차 타이어가 쓸어가버린 보이지 않는 낙엽 대신, 헐벗고 바싹 마른 나뭇가지들만을 얘기한다. 그건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니까.
  가을이야, 그녀는 중얼거리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응 늦은 가을이지, 하고 나도 짧게 덧붙이곤 잔을 들어 녹차를 입에 물었다. 녹차 찌끼가 혀에 잘고 까끌하게 씹혔다.
  ?나 좋아하지 않았어??
  ci가 문득 눈썹 새를 동그랗게 펴며 말했다.
  ?응.?
  나는 거기에 대해서라면 따져볼 필요도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ci와 나 사이에는 잠시, 지금도 쌍방간에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지 남아 있다면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남아 있는 양에 상관없이 무슨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다.
  ?어쨌거나, 잃어버린 거나 찾아줘.?
  ci는 백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작이 굼뜨고, 무거웠다. 그녀가 한마디 더 했다, 찻값은 내가 낼게.
  내겐 숙제가 하나 생긴 셈이었다. 기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나 혼자 풀어야 할 숙제도 아니었다. ci는 가능한 한 여럿에게, 같은 의뢰를 하고 다녔을 것이었다. 개중엔 그런 일의 전문가도 있을 것이고. 경찰이나 사설 심인소(尋人所) 같은. 나는 농담처럼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이건 소홀히 할 수밖에 없어, 하고 카페를 나오며 나는 생각했다. 난 아무것도 듣지 않은 거야.
  그래도 미망인이라는 표현만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의 어감 때문이었다. 그것 뒤에 셀룰로이드 필름처럼 ci의 얼굴을 겹쳐놓고 보자, 금세 검은 베일과 연분홍 레이스 치장의 침대 시트가 떠올랐다. 빨간 등갓으로부터 쬐어나오는 백열등 빛과, 방금 사용해 아직 비우지 못한 작은 플라스틱 대야의 물, 삼분의 이쯤 짜 쓴 젤리 튜브와, 노랗게 물이 든 크리넥스 티슈가 떠올랐다. 나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 국어책의 단어장을 처음 접하게 된 아이처럼, 그것의 묘한 어감을 즐겼다.
  ci의 실제 이미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떠올린 것과 같은, 뒷골목 사창가의 잘 세팅된 침대방의 이미지가 아니다. 연전에 집들이를 가보아 아는 것이지만, 그녀 아파트 침실엔 빨간 등갓을 씌운 백열등도 밑 씻은 물이 찰랑대는 플라스틱 대야도 없다. 검약스러워서, 보너스를 끼워주는 두루마리 화장지만 사다 쓴다. 침대 시트는 흰빛이나 다름없는 연한 연둣빛이었다. 젤리 튜브가 뭘 뜻하는지도 알지 못할 것이었다. 그날, 그 미망인이라는 단어 하나가 마치, ci의 이미지에 침을 칙 뱉아놓곤 자리를 떠버린 것이다. 눈 깜짝할 새에, 기습처럼.
  ?그래서 사창가 침대방이 뭐 어떻다는 거지??
  kr이 뜨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침을 뱉았다?라는 표현이 귀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나는 방금 ci의 이야기를 kr에게 들려줬다.
  ?가보면 아실 거예요.?
  나는 괜한 것을 갖고 트집을 잡는다는 투로 얼버무리려 했다. kr이, 사창가에 대한 내 시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다고 잘 꿰뚫어보고 있는지는 훈계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사창가 침대방의 그 분홍빛 일색 세팅은 바로 거길 찾는 밝히는 남자들의 입맛과 거시기 감각에 맞춰 오래 검증, 형성된 것이고 그러니 다음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뻔한 얘기고, 맞는 말이다.
  항상 그랬듯, kr은 바빴다. 잠자코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틈이 없었다.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었고, 몇 초 간격으로 목을 길게 빼선 사방을 둘러봤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좀더 잘 듣기 위해 나도 같이 목을 빼거나 고개를 따라 돌려야 했다. 날 소홀히 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순간에 한 가지 일이 아니라, 두어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곤 하는 것이 그녀 평소 성격이었다.
  ?딱하게 됐죠.?
  나는 낮고 느리게 중얼거렸다. 부러 게으른 티를 내는 것이다.
  ?딱하게 됐지. 요즘은 죄다 뭘 잃어버린 사람투성이야.?
  kr은 혀를 찼다. 그녀는 주의는 기울이겠지만, 일 년에 두어 번 자기 화랑에 들를 뿐인 겨우 얼굴만 아는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얼마 없을 거라고 했다. 어쨌거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 아니냐고 했다. 잃어버린 것이 어찌 생겼는지는 아니. 그녀도 지난 계절에 화랑을 잃어버릴 뻔했다. 화랑을 잃지 않기 위해, 뭘 팔았을까. 뭘 팔아 메웠을까. 빌라? 카페? 이응노? 드 쿠닝? A.R. 펭크? 그녀는 잠깐만, 하고는 손님을 맞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뛰어나갔다. 화랑 출입구의 밤색 모피 코트를 걸친 중년 여자가 이쪽을 향해 웃고 있다.
  내게 할당된 시간은 끝났다. 나가며 인사할 필요도 없다. 나는 잔에 남은 커피를 쪽, 빨며 멀리 kr의 납작한 엉덩이를 바라봤다. 나이 탓에 살이 내려 그렇지, 어깨와 등줄기 허리와 이어지는 균형은 ci 못지않다. 그녀만의 특이한 매력이랄 게 있어, 어쩐지 깨물어보고 핥아보고 싶게 한다. 그녀가 미망인이라는 사실도, 매력이다. 그녀는, 진짜 미망인이다. ci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도 그녀가 미망인이기 때문이었다.
  kr의 미망인으로서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김영삼 정권을 넘어, 노태우도 건너뛰고, 전두환 정권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비행기에 태워 보냈어, 전두환이 때. 그녀는 짧게 언급하고는, 갑자기 싫증났다는 듯 입을 다물어버리곤 했다. 그녀가 언급하는 건 늘 그 한 문장뿐이다. 나는 궁금해진다. 비행기에 태워 보냈는데, 그래서? 나는 심장발작 추락사고 실종 도피 망명 등등의 갖은 추측을 다 하지만, 그 한 문장만으론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다. 도대체가 비행기에, 뭘 태워 보냈다는 건지도 확실치 않다. 여행자용 트렁크일 수도 있고, 박스 속의 털 짧은 고양이일 수도 있고, 뼛가루일 수도 있고, 지금은 FBI 요원이라는 전직 권투선수 출신의 친동생일 수도 있다.
  나는 빈 커피잔을 간이 주방의 싱크대에 내려놓곤 화랑을 나왔다. 그리곤 화랑 외벽 간판 아래 잠깐 멈춰 서서 담배를 피워물었다. 화랑 건물 외벽 전체를 통틀어 의도된 장식이라곤, 내 머리 위 담배연기가 날아가는 쪽의 십 년째 달고 있는 녹슨 청동제 문패가 다다. 그것도 아주 작아서, 가로 1.8미터 세로 45센티밖엔 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람 머리 높이로 낮게 달려 있어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kr의 엉덩이 같다. 그 쬐그맣고 납작하고 녹슨 것 뒤에 백색의 원뿔형 삼층 건물이, 하이 퀄러티한 화랑이 딸려 있다. 마치 부록처럼, 19세기 러시아 초상화가 일리야 레핀과 위장병에 걸린 유학파 설치미술가 코디 최가 딸려 있다. 미망인이 되고 나서 그녀는, 자기 삶을 잘 관리해왔다. 화랑도, 엉덩이도. 그래서 죄다 한가지로 보이는 것이다. 반한 걸까? 그렇다. 나는 지금, 한때 ci의 엉덩이를 쫓아다녔듯이 kr의 엉덩이를 쫓아다닌다.
  ci로부터 연락이 없다.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된 걸까. 잃은 걸 되찾았다거나, 아니면 되찾을 가능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거나. 나는 몇 번이나 전화 수화기 쪽으로 가는 내 손을 멈추고, 전화를 건다면 내가 정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상황이 좋지 않다면 내 인상만 구기게 될 것이다. ?찾았어?? ?아니.? ?왜?? ?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갈 게 뻔하다. kr은 화랑에서, ci가 무얼 잃어버리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며 게다가 네 친구의 일이고 부탁이라면 정성을 다하라고 조언했었다. 착한 학생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어서 숙제를 끝마치고 나와 놀자는 얘기였다.
  나는 다시 ci가 미망인이 된다면, 하는 가정으로 되돌아갔다. 역시 떠오르는 건 연분홍 레이스 달린 침대, 빨간 등갓, 작은 플라스틱 대야 등등이다. 한 이십 년쯤 뒤에, 미망인 ci의 엉덩이는 어찌되어 있을까? 여전히 삼분의 이쯤 짜 쓴 젤리 튜브 같을까, 뒤샹의 <샘> 같을까?
  ?네가 미망인이 되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해봤어.?
  나는 결국 ci에게 전화를 넣었다. 손가락 끝에서 수화기가 자꾸 미끄러지는 걸 겨우 붙들었다.
  ?역시 아직 일러.?
  내 말에 ci는 대꾸 없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해결을 본 이의 반응은 아니었다. 사건은 아직 진행중이다.
  ?그건 마치 젤리 튜브 같을 거야.?
  ?젤리 튜브??
  ci는 웬 뚱딴지냐는 식의 짜증난 목소리를 냈다. 나는 얼른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선 미망인이 결혼 적령기에 다다른 밤이 외로운 총각에게, 얼마나 격렬하게 감각적으로 들리는지 알아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사전적 의미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겐 대단히 섹시하게 들릴 수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미망인의 어감의 특이함에 대해 길쭉하게 설명했다. 어떤 단어들은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 어감의 상당한 차이를 가져오는데 미망인이 그런 경우라고 했다. 이를테면 그게 ci 네게 붙느냐 아니면 kr에게 붙느냐에 따라 상당함을 지나쳐,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한다고 했다. 그건 마치 삼분의 이쯤 짜 쓴 젤리 튜브와 뒤샹의 <샘> 사이의 차이 같을 거라고 했다. 어감의 차이가 그렇게 큰 경우는 흔치 않은데, 미망인이 바로 그렇다고 했다. 나는 ci 네가 미망인이 된다면 실망할 거라고 했다. 나는 덧붙였다, 미망인은 섹시해. 하지만 섹시함에도 여러 수준이 있지.
  ci는 내 이야기를 반절도 이해하지 못했다.
  ?kr은 또 뭐야??
  ?너 바보야??
  ci는, 농담도 좋지만 요즘 컨디션이 말이 아니라고 했다. 나랑 자고 싶은 모양인데, 그건 내가 진짜 미망인이 된 다음에 얘기해. 그때가 되면 네게도 기회가 갈지 모르겠다, 이 별볼일 없는 놈아. 그녀는 그닥 화나지도 않은 투로 그렇게 쫑알거리고는, 화장실에나 가야겠다며 후다닥 전화를 끊어버렸다.
  ci는 날 오해했다. 내 진심은 미망인이란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 어감의 차이가 상당한, 흔치 않은 단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더불어 네가 미망인이 되면 실망할 것이라는 것도. 숙제는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녀를 미망인이 되지 않게 하려면, 숙제를 완수하는 수밖에 없다.
  ?취향이 바뀌었나 봐.?
  mj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끄며 좀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따라 넥타이를 맸다.
  ?연상의 엉덩이를 쫓아다닌다니 말이야.?
  ?연상도 한참 연상이야.?
  나는 하지만 내 취향이 연상으로 바뀐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저 한 엉덩이만 깨물고 핥고 있기에는 젊음이 짧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다만, 여러 엉덩이를 섭렵하고 싶을 뿐이야. mj는 엉덩이가 ?여러?라는 표현이 가능할 만큼 그리 다양해? 하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연애와는 인연이 없는 그였다. 비둘기파였다.
  ?전화 목소리하곤 많이 다른 여자드만.?
  mj가 말했다. 나는 ci의 의뢰를 그에게 가져갔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의 행방에 대해서라면 그가 더 잘 알 것 같아서였다. 나는 네게도 ci가 찾아왔었어? 하고 물었고 그는 그래, 했다. 그러면서 참 당당하드만, 하고 잇새에 낀 고기 찌끼를 빨아낼 때의 소리를 냈다. 전화 목소리를 들으며 상상했던 것과 실제가 다른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는 몇 년째, 그녀의 전화 목소리만 들어왔었다. 그것도 ?일정은 이렇습니다? ?언제 들어오시나요?? ?진행이 그러하니 곧 되겠지요? 하는 식의 짧고 사무적인 통화들로만. 그러니까 얼마 전 사무실 생수를 마주 놓고 앉은 게 첫 대면이었다.
  ?난 ci의 의뢰를 받아들였어. 어때, 아깝지 않아??
  내 말에, 무엇이 아깝다는 건지 아직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mj는 그게 무슨 같잖은 농담이냐는 식으로 얼굴을 구겼다. 그의 성취향은 얼마나 점잖던지, 섹시한 여자만 보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엉덩이 봤어? 내가 다시 물었다. 응, 봤어. 괜찮지 않아? 살진 엉덩이드만, 그런데? 나는 그만 기운이 빠져버렸다. 그가 결혼했을 때, 그는 숫총각이었다. 뻔한 얘기지만 그의 아내는 숫처녀가 아니었다. 전화 목소리를 듣고 그가 그렸던 ci는, 멍 빛깔의 얇은 입술과 광대뼈 없이 밋밋한 핼쑥한 얼굴이었다. 실제의 ci를 보곤 실망한 건 당연했다. 그녀의 입술은 혈색 당당하게 새빨갰고, 두 볼은 젖가슴의 축소판인 것마냥 동글동글 튀어나와 있었다. 어찌나 생기발랄한지 현직 건강체조 학원 강사가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다고 그는 말했다. 엉덩이에 대해선 아무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것 봐, 미망인이 되기엔 아직 이르지 않아? 하자 그는 미망인이란 결혼한 여자라면 아무 때고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반응은 ci와 다르지 않았다. 미망인 그 자체에선 자기는 아무 느낌도 없다고 했다. 사창가 침대방이란, 가본 적도 꿈꿔본 적도 없는 사람인 것이다.
  ?어쨌거나 나도 찾아야 해. ci와 나는 같은 걸 찾고 있어.?
  mj가 책상 위의 A4 용지 묶음을 들어 흔들어 보여주며 중얼거렸다. 찾아야 한다, 지만 목소리에 의지가 들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찾지 못한다면 말이야, 그는 무슨 유쾌한 농담이라는 듯이 목소리를 띄웠다, 인세는 어찌해야 하지? 얼마 되지 않을 텐데, 위로금조로 좀더 넣어야 해?
  나는 일어나며 어디 가볼 만한 데는 없어? 하고 물었다. mj는 메모지에 몇 군데 들러볼 만한 곳의 위치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개중엔 내가 벌써 들렀던 곳도 있었다. 그는 자기 일이기도 한 것을 내게 떠넘기고 있다는 미안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출판사 편집부에 오 년째 근무중이다. 그의 손엔 빨간 플러스 펜과 파란 플러스 펜이 오 년째 쥐어져 있었다. 잉크가 새어나오기 일쑤여서 항상, 그의 양손은 울긋불긋하기가 피멍이 든 듯하다. 결국 미망인이 된다면 말야, 그가 말했다. 언제 ci랑 너랑 나랑 술 한잔 하자구. 나는 짜식이, 하고 눈을 흘겨 보이고는 출판사 문을 나섰다. 나설 때 문득 뒤돌아보니, 그는 이미 책상 위 교정지 묶음에 그 딱딱한 얼굴을 힘껏 파묻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nk 교수는 저런, 하고 운을 뗀 다음 ci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어주었다. 그를 그의 교수실에서 보긴 또 처음이었다. 추워진 날씨 탓인지, 와이셔츠 위에 캐시미어 염소 털로 짠 판초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보아서 아는 것은 아니고, 그가 그렇다고 했다.
  ?자네에겐 편견이 있어. 젊어서 그렇겠지.?
  nk는 훈계부터 했다. 내 젤리 튜브와 <샘>론은 여기서도 훈계의 대상이었다. 미망인이란 자기 세대에겐 슬픈 단어라고 했다. 그것은 어머니와 곧장 연결되며, 어감 자체를 보아도 그닥 섹시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에 태어나서, 이제 쉰이 낼모레인 나이가 되었다. 나는 웃으며 저런 세대 차이군요, 하고 항변했다. 그렇지만 나는 깜짝 놀랐는데, 그가 젤리 튜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젤리 튜브가 뭔가? 뒤샹의 <샘>은 또 뭐고? 둘을, 같이 놓는 것부터가 자네 편견이야.?
  nk는 평론가답게, 문제의 핵심을 무섭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내가 그 둘을 같이 놓는 것은 젤리 튜브는 ?사창가의 침대방에나 놓여 있을 것?으로 천대하고, 뒤샹의 <샘>은 ?대륙과 대양을 건너다니며 순회 전시회를 가져야 할 만치 하이 퀄러티한 것?으로 우대하고 있는 까닭이라고 했다. 그 편견은 또한 은연중이 아니라, 폭죽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나와의 대화가, 오늘 있은 대화 중에서 가장 기분 상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임을 경고했다. 나는 kr의 훈계를 떠올리며,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는 뒤샹의 <샘>의 오브제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그것은 소변 얼룩투성이, 똥투성이 좌변기 아닌가. 얼마나 더러운 외관이던지 <샘>을 본 누구나가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샘>이 서양 미술사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든, 경매장에서 얼마에 팔리든 일단 그것의 오브제는 누구나 침을 뱉고 싶어할 좌변기 아니었나. 한편 젤리 튜브는 어떤가. 그것은 일단 <샘>처럼 의미가 한정된 액자 속의, 도록 속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생생한 실재로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또다른 모든 장소로 지금 이 시간에도 자유롭게 떠 흘러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떠올린 사창가 침대방 역시 젤리 튜브가 가 있을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소 중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것에 ?사창가 침대방에나 놓여 있을 것?이라는 모욕적인 표현이 붙을 여지는 없다고 했다. 아니, 그 표현뿐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이 붙을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단정짓자면 <샘>은 단 하나의 위대한 표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젤리 튜브는 단 하나가 아닌 가능한 모든 표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nk 훈계의 요지는 내 비유는 틀렸다는 것이고, 내 논리란 논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뒤샹의 <샘>이 우대받을 까닭도 젤리 튜브가 천대받을 까닭도 없고, 둘을 같이 놓고 거론할 까닭은 더더욱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제가 비유를 잘못 들었군요. 뒤샹의 <샘>을 들먹이는 게 아니었는데.?
  nk는 화가 나선 이마를 붉혔다.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건방졌나? 그는 사실, 내 편견을 나 이상으로 정확히 짚어냈다. 그는 내가 설명하고자 했던 것을, 잘 설명하고 싶었지만 능력이 딸려 비유를 통해 설명하려 했던 것을, 오차 없이 읽어냈다. 어찌나 정확하던지 그게 내 편견이 아니라 그의 편견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사창가의 침대방에나 놓여 있을 것?과 ?대륙과 대양을 건너다니며 순회 전시회를 가져야 할 만치 하이 퀄러티한 것?. 그러니까 나는 은연중에, 미망인 ci는 천대하고 미망인 kr은 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 확실히, 그럴 것이다.
  아무튼 nk의 설득력이란 대단해서, 내 편견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젤리 튜브로서의 미망인 ci가 갖는 어감과 뒤샹의 <샘>으로서의 미망인 kr이 갖는 어감의 차이란, 내 생각만큼 그리 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비유를 버리고 ?생생한 실재?인 ci와 kr을 직접 예로 들면 어떨까. 나는 그의 책상에 놓인 학생들의 과제물을 뒤적이며 읽는 척하면서, 반격을 위한 재무장의 시간을 벌었다. 나는 우선 ci를 위한 목록을 작성했다. 나이, 이십대 후반. 대학에서의 전공, 영어영문. 직업, 전업 주부. 직업은 보습 학원 강사 잡지사 기자 프리랜서 번역가 등등을 가져봤으나 각광받아본 적은 없음. 현재도, 그러니까 미망인이 되어 당장 살길이 막막해지더라도, 직업을 가질 만치의 전문화된 능력은 보유하고 있지 못함. 제빵 학원엘 다닌다는 소문이 있음. 과연 이십대 젊은이답게 경박하고 경솔함. 안팎이 다르지 않음. 그 다음엔 kr을 위한 목록을 작성했다. 나이, 사십대 중반. 직업, 공식적으론 없지만 화랑의 소유주로서 큐레이터의 몫까지 하고 있으며, 그것도 꽤 잘. 충무로와 방배동에 찻집과 인사동에 액자집을 운영하고 있음. 빌라 몇 채도 있어 관리는 직접 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임대 사업가. 대학에서의 전공, 너무 오래 전 일이라 화제에 오른 적이 없어 모르지만 최근에 마드리드에서 이 년 정도 짧게 공부하고 옴. 현재 침술학을 독학하고 있음. 과연 하이 퀄러티함. 그녀의 인격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그녀의 안과 밖의 깊이와 폭이, 내 짧은 안목으론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치 깊고 넓어서이다.
  ?재밌어. 자네 고모뻘 아닌가.?
  nk은 감탄했다. 연상의 여인을 좋아할 수 있는 것도 나이 어린 친구만의 특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ci를 쫓아다니지 않았었느냐고 물었다. 한때든 여러 때든. 나는 그렇다고 했다.
  ?것 봐, 비유를 버렸다고는 하지만 방금의 자네 얘기는 아까와 하나도 다를 바 없네. 화랑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ci가 kr보다 덜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뭔가? kr이 상류층인가. 그런 식의 그릇된 편견은 이미 이백 년 전에 프랑스에서 끝났네. 그리고 경박하고 안 하고의 차이를 가르고 따지는 것은 우리 윗세대의 일일세. 경박이나 경솔은 우리 윗세대가 아랫세대를 관리하기 위해 지어낸 억압기제이자 장치로서의 잣대야. 우리의 억압기제로 자네가 자네 세대를 가늠한다는 것은 우습지 않나? 또한…….?
  nk의 논박은 길게 이어졌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그는 단 몇 분 만에 명쾌한 분석력의 불꽃으로, 여러 날 동안 내 머릿속에서 왕성히 분열 증식해오던 어떤 생각의 박테리아 균을 싹 태워 없애버렸다. 아주 잠깐 사이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고, 내 머릿속을 빈 비커처럼 투명하게 멸균해버렸다. 결국 어떤 표현을 써도 그의 혜안과 통찰에 의해, 젊은 세대의 경솔하고도 경박한 편견이라며 무참히 깨어질 것이었다. 게다가, 케이오 펀치까지 준비해놓고 있었다.
  ?자네, ci를 쫓아다니지 않았었나? 좋아했었지? 그런데 버림을 받은 거야. 그리고 지금은, kr을 쫓아다니고 있고. 그렇지??
  ?예.?
  ?kr에게는 아직 버림받지 않았으니 호의적일 수밖에. 무엇보다 자네는, ci가 벌써, 아주 미망인이 돼버린 것처럼 얘기하고 있잖나!?
  ?제가 그랬습니까??
  그랬다. 나는 그랬다. 미망인의 시작은 사실, 그저 ci의 격한 감정에서 비롯된 과장된 표현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수식, 가정, 어쩌면 농담, 장난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에 몰두해 있었던 것일까…… nk는 여러 차례 나를 눌러 이겼음에도, 짐짓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ci의 주례 선생이었다. 그녀의 백 년 가약은 그를 앞에 두고 맺어졌다. 나도 거기 있었다.
  ?찾을 수 있겠습니까??
  ?자네가 이렇게 열심이니, 미망인이 되지는 않을 거야. 이만 가보게.?
  내 등뒤엔 조교가 서 있었다. 나는 조교와도 안면이 있었다. 나는 조교의 손을 잡곤 반갑게 흔들었다. 그리곤 nk의 교수실을 빠져나와 빠른 걸음으로, 캠퍼스를 길게 가로질렀다. 떡갈나무 낙엽은 참 멋지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종로 3가에서 청계로, 을지로를 거쳐 충무로까지 기다랗게 걸쳐놓여 있는 4차선 도로변에 있었다. 도로변의 먼지투성이 낡은 4층 건물에 있었다. 건물의 3층, 찻집 ?볼케이노?에 있었다. 상호와 그렇게도 어울리지 않는 찻집은 또 처음이었다. 머잖아 재개발이라도 당할 듯한 모습은 안팎이 똑같았다. 이런 데에도 단골이 있었어! 이 사화산의 창 아래를 지나는 이들의 열 중 둘은 방화복 같은 겨울 점퍼 차림이었다.
  ?저런, 우린 전혀 몰랐군요.?
  찻집 여주인 qa가 말했다. 손님은 나와, 저쪽 귀퉁이에서 통기타를 퉁기고 있는 내 또래의 젊은 친구가 있었다. 둘이 다지만, 찻집이 워낙 작아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젊은 친구는 양희은 한대수 산울림 김민기 등등의 70년대 레퍼토리들을 꼭 두어 소절씩만 딱딱 끊어서, 불렀다 말았다 하고 있었다. 통기타 갖고 노는 사람이 요즘도 있어. 나는 오늘 여러 차례 놀란다고 생각했다. 두시 반이었다.
  ?ci가 딱하게 됐군요.?
  qa는 ci를 몰랐다. 심지어 그녀는, 자기 단골이 아직 총각인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ci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ci를 동정한 것이었다. 이 찻집에서의 총각 행세가 눈에 거슬릴 정도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렇담, 부부간의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ci는 정직했을까 하고 잠깐 의문을 품어보았다.
  ?잃어버린 지 얼마나 되었답니까??
  qa가 물었다. 나는 아마도 이십 일쯤, 하고 머뭇거리며 답했다. 의뢰가 들어온 지 그쯤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 잃어버렸는지 그것도 나는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다. 그녀는, ci의 일이란 주위에서 흔치 않게 벌어지곤 하며 대체로, 참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잠시 저쪽 테이블로 갔을 때 잔의 홍차를 조금, 테이블 위 선인장 미니 화분에 부어넣었다. 아무래도 혀와 식도를 적시기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qa와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아주 잘라서, 참견을 싫어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전의 경우들처럼 미망인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그건 벌써 nk 교수에 의해 깨져서, 멸균 처리되어서, 내 머릿속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혀에서조차 이제, 미망인의 어감은 달리 발음되었다. 건조하게, 사전 속의 의미 그대로. 얘길 나눌 대상도 내 곁에 없었다. 그녀는 통기타를 두드리는 ?청년? 곁에 바짝 붙어앉아선, ?독서 행위?를 했다. 책의 단면을 얼핏 보니 찻집 전체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도, 절묘하리만치 새하1다. 나는 꼼꼼히, 찻집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낮이라 조명을 켜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실내가 뿌1다. 어두운 게 아니라, 누군가 먼지가 가득 든 대형 풍선을 가져다 천장 가까이서 터뜨린 것처럼 온통 뿌1다. 실제로도 부유 먼지가 많았다. 창을 통해 희미하게 비쳐드는 역광이, 하나의 거대한 먼지 수족관을 공중에 띄워놓고 있었다. 손을 밀어넣으면 흥건히, 먼지에 젖어들 것 같았다.
  몇 되지 않는 테이블에 깔린 테이블보도 색 바랜 것뿐이었다. 빨갰을 것들은 연분홍색으로, 파랬을 것들은 우중충하게 하늘색으로, 노랬을 것들은 희미하게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얼마나 빨아댔으면,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벽면에 뜨문뜨문 걸려 있는 나무 액자들도 이제 거의 검어져 있었다. 달력이나 잡지, 뭐 그런 데서 오려 끼워넣은 듯한 그림들은 유리와 함께 뿌얘져가고 있었다. 모조 화분도, 커튼도, 벽에 걸린 은하수 상징의 퀼트도, 소파도 다 그랬다. 찻집 전체가 그랬다. 부러 연출된 것은 아니었다. 마치 qa의 나이에 버금가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집기를 새로 들여놓은 바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아니면 대청소를 해본 적이 없든가. 그리고 그녀 자체도 찻집 여기저기 놓여 있는 그녀의 집기들만큼이나, 상당히 낡아 보였다. 나이를 묻는다면 아직 마흔도 안 됐어요, 하겠지만 적어도 나보다 이십 년은 더 묵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런 데에도 단골이 생기는 게 가능한 일일까 하고 자문해보았다. 답은 그렇다, 였다. 그렇지 않다면 ci의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한 탐문 장소 목록에 이 찻집이 끼어 있을 리 없었다. 저 통기타 가수도 이곳의 죽돌이, 붙박이 앰프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반쯤 남아 있는 홍차 잔받침에 천원짜리 세 장을 올려놓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친구가, 이런 분위기에 취미가 있었을 줄은 몰랐어요.?
  qa는 그걸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자기는 남편과 함께 구 년째 이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저희가 데이터화시켜 관리하고 있는 단골만도 백하고도 스물이 넘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계산대 위에 얇게 접혀져 있는 매킨토시 노트북을 가리켰다. 그리곤 그것에 내 데이터도 조만간 오르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하아, 하고 소리내 웃었다.
  ?무어라도 소식이 있으면 연락을 주실래요??
  나는 수첩에 연락처를 써선 찢어주었다. qa는 그러마고 했다. 그녀는 ci가 그토록 젊지 않다면 어리지 않다면, 오히려 잃어버린 것을 다행스레 여기고 좋아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혼잣말처럼 물어왔다. 나는 보험 사기를 음모중인 권태기의 중년을 떠올렸는데, 그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했다. 거기엔 더 고귀한 희망이 있으며, 더 고귀한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 했다. 나는 얘기가 너무 추상적이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의뢰를 받은 지 한 달이 다 되었지만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요즘의 내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것도 지지부진했다. kr로부터 연락이 왔지만 그것은 화랑에서 원로 누구의 회고전을 하는데, 와서 과자라도 먹고 가라는 것이었다. mj로부터의 연락은 일 때문이었다. 원고는 잘 검토해보았지만 종이값이 올라 출판이 어렵겠으니, 사정을 이해해달라는 것이었다. nk 교수는 독일로 떠났다. 그의 조교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자기 여동생이 PC게임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하는데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여동생이 예쁘냐고 물었고, 조교는 자기 여동생에게 남자친구는 없지만 예쁘지는 않다고 했다. 사화산 찻집의 qa는 종로서적에서 내 책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 그것을 사서 읽었노라고 연락을 해왔다. 내가 자기네 찻집에서 홍차를 마셨다는 건 일종의 영광이며, 그런데 자기가 평소에 읽던 감동적인 책들관 너무 달라서 약간 당황스러웠다고 촌평했다. 그 외에도 mj가 소개했던 다른 몇 곳과 내가 물색했던 몇 곳에서도 다른 얘기만 하거나 연락이 없었다. 다들, 내가 그들을 찾아가 물었던 것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는 ci조차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이 행동했다. 혜화동의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중학교 대상 영어회화 비디오의 번역일을 얻었으며 그 때문에 요즘 기분이 아주 ?째진다?고 했다. 나는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어 어디 가서 점심이라도 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그녀는 자기가 그간 죄의식을 느낄 만치 나태했었는데 이제 바빠야 할 일이 주어졌으니 최대한 충실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엉덩이를 통통거리며 디자인 포장 센터 쪽으로 뛰어가버렸다. 그녀는 오히려 내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너도 어서 마음이 따뜻한 여자를 만나 월동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ci가 잃어버렸다는 것인지 내가 잃어버렸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글쎄, ci도 찾지 않는 걸 내가 찾아다니고 있단 말이야.?
  나는 bs에게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으며 한껏 투덜댔다. 잃어버린 당사자도 찾지 않는 걸 왜 내가 찾아야 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세상에 그걸 찾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인 것 같다고 소리를 높였다. 또, 그것을 찾았다고 해서 내게 돌아올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무슨 좋은 소릴 듣겠느냐고 억울해했다.
  ?괜찮아, 다 괜찮아.?
  bs는 재킷 테두리가 하얗게 닳은 레코드들을 라면 박스에 쟁여넣으며 그 특유의, 사람 좋은 함박미소를 지어 보였다. 회현 지하상가의 이제 곧 영구 폐점할 중고 레코드점이었다. 내 일정의 마지막 탐문 장소였다. 그를 맨 마지막에 놓은 이유는,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사소한 이유로 다투어서, 요 몇 년간 연락을 끊고 지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투덜댈 것도 불평할 것도 없다고 했다. ci가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로 인해 너무나 고통받고 있어 오히려 내색하지 않은 것일 뿐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또한 사람이란 살다 보면, 자기완 아무 상관도 한치의 이해도 없는 것을 찾아 헤맬 때도 있는 법이라고 했다. 게다가 친구 사이에 그저 약간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그만이지, 무슨 좋은 소리 듣길 바라느냐고 나직이 타일렀다. 나는 상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으며 그렇다, 고 했다.
  ?ci, 걔가 겉보기엔 외향적이고 화사해도, 사실은 외로운 애라고.?
  bs도 ci에 대해서라면 할말이 많았다. 그녀의 엉덩이를 쫓아다녔던 건 나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쫓아다님은 나보다는 훨씬 도덕적이었다. 점잖았다는 얘기다. 그녀 앞에서 얼굴만 붉힐 뿐 한마디 인사말도 꺼내지 못했다는 얘기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했지만, 그는 현재도 애인은커녕 여자친구 하나 없는 초라한 싱글일 게 뻔했다. 그 성격에 옛사랑을 벌써 잊었을 리 없었다.
  ?아무튼지 간에, 굳이 kr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ci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할 거야. 그것도 꽤 좋은.?
  미망인의 문제가 다시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짜증 탓이었다. 나는 한 번 틀린 문제를 자꾸만 되풀이 틀리곤 하는 만년 운전면허 낙방생처럼 굴고 있었다. bs는 kr이 누구냐고 물었고 나는 kr과 ci, 그리고 미망인이 갖는 성적인 뉘앙스, 젤리 튜브와 뒤샹의 <샘>, 거기에 nk 교수의 경박하면서도 살균력 강한 논리에 이르기까지, 폭로하는 심정으로 줄줄이 읊어댔다. 내 분에 가득 찬 이야기는, 그가 최후의 라면 박스에 밀봉 테이프를 붙일 때까지도 하염없었다. bs가 내 얘기에 귀기울여주느냐 마느냐는 대단치 않은 문제였다. 그래, 그래, 참을성 많은 그는 이삿짐을 싸면서도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떻게 생각해??
  ?뭘??
  ?미망인의 어감 말이야. 그렇다고 내가 삼분의 이쯤 짜 쓴 젤리 튜브를 저급, 저열, 천박하다고 천대하려는 것은 아냐. 다만 그렇게ci가…….?
  ?넌 ci가 벌써 미망인이라도 된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bs는 허리춤에 두 손을 얹은 채 노기 띤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이삿짐을 싸느라 힘겨워 파리해진 입술이 무언가 막 선언하려는 듯 달싹거리고 있었다.
  ?그래, 설마…… 그 좋은 남자가 너라는 뜻은 아니겠지.?
  ?아.?
  나는 그제서야, 지난 몇 년간 bs와 내가 왜 연락을 끊고 지냈는지 그 잊혀졌던 사연을 기억해냈다.
  쫓겨나다시피, bs의 레코드점을 나온 후로, 여러 날이 지났다. 겨울은 완전해져서, 어제는 싸리눈도 내렸다. 나는 ci의 의뢰를 잊기로 했다. 나는, ci가 잃어버렸다는 것인지 내가 잃어버렸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돼버린 것을 위해 내 하루 시간이 빠듯해지는 것을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누가 잃어버렸는지뿐 아니라 뭘 잃어버렸는지도 거의 흐릿해졌다. 그것은 불분명해졌고, 따지고 보면 사실 처음부터 우리의 화젯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우리가, kr을 비롯한 모두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지 찬찬히 되집어보았다. 우리의 대화 내용은 ci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결코 아니라, 다른 어떤 것, 미망인이었으며 ci였으며 나였고 너였고 우리였고 지나간 일과 앞으로의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까닭을 알 순 없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나는 그럴 만하니까 그랬을 거라고 마음을 편히 먹었다. ci가 잃어버린 것은 처음부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우리 모두의 화제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대신, 바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kr의 화랑에 가서 과자를 먹었고, mj의 출판사에 가서 뺨을 붉히며 원고를 되찾아왔다. nk 교수 조교의 여동생에겐 시나리오 작법을 강의했고, ?볼케이노?의 단골이 되기로 했다. bs와는 화해했다가 다시 다퉜다. 가게를 폐업한 통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역시 한가로운 시간들을 살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한가롭고 일이 없는 존재였다. ci는 바쁘게 되어 기분이 째진다고 했지만 나는, 그녀와는 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내게는 내 삶에는, 게을러질 시간이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필요하다. 내 평소가 바빠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내가 택한 삶 자체가 그걸 요구한다는 뜻이다. 내게는 무얼 하는 시간보다, 무엇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얘기다. 그러다 문득 지겨워지면, 어슬렁거린다, 여기저기.
  오늘 시내 대형 서점에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책을 살 마음도 없었다. 나는 잡지 코너에서 몇십 분쯤, 음반 코너에서 몇십 분쯤, CG 코너에서 몇십 분쯤 시간을 보내곤 소설 신간 코너로 왔다. 무슨 작가의 어떤 새 소설이 나왔는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책표지 디자인을 좀 살펴보고 싶어서였다. 쭉 훑어보다가 좋은 디자인이 있으면 뒤표지까지, kr의 화랑에서 액자에 하듯 코를 박는다.
  그러다가, ci가 잃어버렸던 것을 찾았다. 그것은 한 출판사의 소설선에 할당된 다섯 단짜리 책꽂이에서였다. 나는 입술 두 쪽을 동그랗게 오므리곤 소리내 웃었다. 그래 여길 찾아보지 않았어, 나는 무릎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뜻밖의 생각지도 않았던 장소가 아니라, 충분히 생각했어야 했을, 가장 먼저 찾아봤어야 할 곳이었다.
  나는 숙제를 끝마쳤다는 이야기를 ci에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책을 한 권 사서 표지와 본문 사이의 간지에 빼곡히 2B 연필로 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녀의 영어회화 비디오 번역으로 바빠진 시간을 뺏지 않을 만한, 편히 쉽게 읽고 버릴 수 있을 문장들만을 골라서.
  나는 서점 내 아이스크림 가게 높은 의자에 차분히 앉아서, ci가 잃어버렸던 게 왜 우리의 화제에 오르지 않았던가, 없었던가에 대해 썼다. 그리고 왜 없어도 되었던 것인지에 대해 썼다. 없어도 괜찮았던 것인지에 대해서 썼다. 나는 작가란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항상 궁금해해왔었다고 썼다.
  ci에게, 그것이 여기 몇 권이나 있다고 썼다.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