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로만 Narrative 29

[단편소설] 갈매기 - 이윤기

갈매기 이윤기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갈매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바닷가로 나가 갈매기와 놀았다. 갈매기는 그를 도무지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날아와 함께 놀아주었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이웃사람들로부터 그 소문을 듣고는 아들에게, 내 들으니 너는 매양 바닷가로 나가 갈매기를 벗삼아 논다고 하니, 나도 갈매기와 놀고 싶다. 그러니 몇마리 잡아 와서 나도 재미있게 놀게 해다오, 하고 말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리 하겠다고 하고는 바닷가로 나갔다. 그러나 갈매기는 그의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더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그는, 백구야, 날지를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이런 노래를 불렀지만 갈매기는 끝내 그의 곁으로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

[단편소설] 당신의 나무 - 김영하

당신의 나무 김영하 1 어렸을 적 당신은 떡갈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이제는 제목도 생각나지 않고, 책의 장정도 떠오르지 않는, 그저 그렇고 그런 동화책에서였을 것이다. 거대한 나무의 밑둥엔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심술궂게 다문 입이 그려져 있었고, 그 삽화들은 어린 당신을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무. 그때부터 당신은 나무를 두려워했다. 미친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산발하며 뻗어 내려간 뿌리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는 나뭇잎들. 나무들은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고 당신이 죽은 뒤에도 계속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 시절 당신의 집 앞에도 나무가 있었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아카시아 나무. 나무는 지붕을 덮었고 몇몇 가지는 당신 방 창문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둥치로는 개미들이 줄줄이 기어오..

[단편소설] 바람이 분다 - 김영하

바람이 분다 김영하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분다, 바람이 분다. 다섯번을 되뇌고 하늘 을 본다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를 끈다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를 끈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흐른다 한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다 게임을 한다. 게임이 한다. 게임을 한다. 시간이 가지 않는다. 시간이 가지 않는다. 시간은 가지 않는다. 불을 끈다. 이제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가 온다 머리를 짧게 자른 그녀가 온다. 치렁한 흑갈색 원피스에 머리를 짧게 자른 그녀가 온다. 한 때 나를 미치게 했던 치렁한 흑갈색 원피스에 머리를 짧게 잘라 더 고혹스 러워진 그녀가 온다. 1 훼밍웨이의 소설 킬라만자로의 표범을 읽고 있었다. 그 소설엔 왠지 커피가 어울릴 것같 아 ..

[단편소설] 손가락 - 이윤기 (99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수록)

손가락 (이윤기) "나는 올라가고 싶지 않아. 게다가 이 술, 내일 아침까지 말짱하게 깰 것 같지 않고……." "그래도 선생님……." "그러니까 상선사는 너희들이나 올라갔다 내려오너라. 완허 스님 찾아보는 거 잊지 말고……." 한재기 교수가 전날 밤에 이렇게 분명히 일렀는데도 불구하고 학생 대표는 신새벽에 한 교수와 내가 자고 있던 여관방 문을 두드리면서, 함께 상선사 오르자고 졸랐다. "선생님께서 올라가 주시면 저희들은, 저희들 눈으로 볼 수 없던 것들도 볼 수 있게 됩니다." "지금 그 눈으로 보고 와도 좋아. 내가 본 것은 내 것이지 너희들 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힘 좋은 너희들이나 올라갔다가 내려오너라." "하지만 선생님께서 보신 것을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시면 저희들은 선생님 눈으로……." "네가..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中 [모텔 탈출기] 박동식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中 [모텔 탈출기] 박동식 영화화가 진행중이다. ---------------------------------------------------------------- 이건 정말 큰일이다. 초등학교 때, 엄마가 아끼던 200만 원 짜리 도자기를 깼을 때보다 더 혼이 날 것 같다. 물론, 그 도자기보다 비싼 건 아니지만, 욕실에 나뒹굴고 있는 이 육체는 자칫하면 내 인생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 어쩐지 너무 쉽게 모텔까지 데리고 오나 했는데, 사람일이란 새옹지마 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 터져 버린 것이다. 엄마의 화난 얼굴과 이제 한 달 후면 결혼하게 될 나의 피앙세 (fiance), 정화의 실망한 얼굴이 오버랩 되기 시작한다. 두 시간 전, 채팅에서 만난 가출소녀와 20만원으로 밤을 같이..

[시나리오] 강두식은 그렇게 김순임을 만났다 - 김한민

강두식은 그렇게 김순임을 만났다. 타이틀 - HANMI N FILM 타이틀 위에 소리가 들려온다. 시계소리 S#1. 상담실(낮) 여자: 전, 항상 이해 받지 못했던 것 같아요. 특히 남자들과의 관계는 더욱 심했죠. 사실 전, 따뜻한 여자예요. 사랑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고... 그게 잘못된 건가요, 선생님? 남자 목소리: 그렇지 않습니다. 여 자: 그런데 전, 항상 어긋났어요. 제 진심과는 다르게 이해되고, 이해 받지 못하고... 혹시 남자들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나요? 잘해주는 여자는 만만히 대해도 된다는, 뭐 그런 거 말이죠? 여자가 카메라를 뚫어지게 응시한다. (잠깐의 침묵) 남자 목소리: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 자: 사실 요즘 사귀는 남자하고 잘 안돼가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너..

[시나리오] 백색인 - 봉준호

백색인 s#1.아파트 베란다/아침 깔끔해 보이는 아파트 거실. 말끔한 출근복장의 학락. 블루벨벳 포스터도 보인다. 시간이 여유가 있는지 담배를 피워물고 베란다로 나간다. 어항쪽으로 다가간다. 먹이를 주며 금붕어 하나를 주시한다. 한쪽눈을 손으로 가리고 실눈으로 쳐다본다. 새하얀 티슈를 톡,톡 꺼내 반듯하게 어항 옆에 깐다. 금붕어 하나를 꺼내어 티슈위에 놓는다. 팔딱거리는 금붕어. 학락, 피우던 담배연기를 후욱 금붕어에게 내뿜는다. 담배로 지느러미 끝을 살짝 살짝 지져본다. 이윽고 붕어눈을 향해 담배불이 다가간다. 눈에 거의 닿을까 말까한 순간 커트. s#2. 크레디트. 배경음악. 카메라가 아파트 1 층에서부터 수직상승한다. 수직으로 지나쳐가는 아파트 베란다들. 15층 학락의 베란다에 도착하면서 정지. ..

[시나리오] 커밍아웃 - 김지운

커밍 아웃 COMING OUT 원안 박종혁 시나리오 이해영 이해준 김지운.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음을 알려 드립니다. # 1. 모쓰 카페 / 오후. 화면, 밝아지면 24세 가량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어딘지 진중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앵글이나, 녹음 및 조명 상태, 뒷 배경, 이런것들이 최대한 인물 다큐 또는 시사프로를 연상케 한다. 남학생 : ( 조금 뜸 들이다가 ) 사실,... 전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요. 질 문 : 그럼, 혹시 그동안 특별한 증세나 ... 이상한 행동, 뭔가 다르다 는걸 못느끼셨나요? 남학생 : ..... 전혀요. 전혀 못느꼈어요. 질 문 : 예를 들어,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더든가 .... 뭔가 숨기려 한다 던가. 남학생 : ( 약간의 한숨 ) 만약 그런게..

[시나리오] 소풍 - 송일곤

소풍/35mm/15min/1:1.85/Color/1999/송일곤 제작/송일곤 시나리오/연출/송일곤 프로듀서/조수진 촬영/박선욱 등장인물 엄마/최지연 아빠/손병호 아이/민경현 노인/윤경로 시놉시스 늦가을 낙엽이 흩날리는 오후, 한 가족이 한적한 시골의 국도를 달리고 있다. 아이는 엄마에게 어디에 가는지 묻는다. 엄마는 소풍 간다고 대답한다. 빚 더미에 오른 젊은 사업가는 아내와 아이와 함께 동반자살을 하기 위해 바닷가 근처의 인적이 없는 숲에 도착한다. 여자는 아이를 살리고 싶어하지만 이미 수면제를 먹어 어쩔 수 없다. 여인은 아이에게 파도를 보여주고 싶어 바닷가까지 가 보지만 아이는 잠이 든다. 남자는 아내와 아이를 차로 데리고 와 준비한 대로 자신도 수면제를 복용하고 시동을 건다. 차 안에 호스를 통해..

[시나리오] 후라이(펌)

후라이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객현1리 이곳에 작은 비닐하우스가 하나 있다. 이 비닐하우스 에는 싸이코 과학자와 그의 조수가 살고 있다. 이들은 초고속 미친속도 전자레인지를 만들기 위해 이 비닐하우스에 살고 있다. 이들이 만들고 있는 전자레인지는 전자레인지의 한계를 뛰어넘은 슈퍼 전자레인지로 단순히 음식을 데우는 정도가 아니라 밥도 하고 고기도 굽고 심지어는 시디도 굽는다. 오버버닝도 지원한다고 한다. 2003년 2월 4일 화요일 “조수야 공시디 한 장 가져오너라” “넵” “넣어라” “넵” “어제 봤던 파이트 클럽 구워라” “저..” “뭐?” “파이트 클럽은 두장짜리인데요” “오버버닝해” “아니 어떻게 700메가 짜리 시디에 1기가가 넘는..” “어이 조수 너 개새끼 빨리 안구우면 너를 구워버리는 수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