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로만 Narrative

[희곡] 바보각시 - 이윤택

버블건 2007. 11. 17. 10:57

바보각시


이윤택 작/이윤택 연출/ 연희단 거리패


(등장인물)
각시
맹인가수
걸식소년 미카엘
(맹인가수와 걸식소년 역은 한 인물로 표현될 수 있다.)
취객
파출소장
실직청년
밤처녀
(소외자 뒤에 종말론 교주가 됨)
우국청년
앵벌이
춤추는 꼭두
노래하는 꼭두


[경] 1경

아름다운 사람을 기다리며

((무대는 신도림역전 풍경이다. 신도림은 新都林으로 그 뜻은 수풀 속에 난 새로운 길이다. 수풀 속에 난 새로운 길, 상당히 의미심장한 상징을 내포하고 있는 지금 여기 신도림역 일대는 서울의 도시 빈민 밀집지역으로 주의로 구로공단을 끼고 서울과 주변 위성도시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계지로서 지금 여기 신도림은 유난히 종말론이 성행하고 온갖 야바위꾼이 들끓는 서울의 오지이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

[안내방송] 지금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위험하오니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숨가쁘게 지나가는 열차의 소음, 시간궤도를 따라 흐르고 하모니카소리 ---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황혼을 배경으로 무대에 등장하는 두 그림자, 맹인가수와 걸식소년 미카엘이 신도림역전의 밤을 연다.))

[걸식소년] 아버지

[맹인가수] 왜

[걸식소년] 나 매일 밤 꿈을 꾼다.

[맹인가수] 어떤 꿈?

[걸식소년] 바보각시가 하얀 돛배를 타고 저 어둔 하늘을 가로질러 오는 거야 .

[맹인가수] 바보각시는 죽었어.

[걸식소년] 아냐, 꿈은 안 죽어.

((맹인가수, 희게 웃는다. 우울하게 빛나는 맹인가수의 차고 단단한 치아, 낮게 깔리는 우울한 기타 선율))

[맹인가수] 바보각시는 이제 여기 오지 않을 거야.

[걸식소년] 왜?

[맹인가수]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기 힘든 세상이니까.

[걸식소년] (밤하늘 별자리를 보며) 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워. 저길 봐, 하늘은 밝은 별들로 가득 차서 손가락 하나만 이렇게 튕겨도 (짧고

눈부신 인트로 메조) 별의별 아름다운 사연들이 다 쏟아질 것 같애.

[맹인가수] 나는 안 보여.

[걸식소년] 마음이 어두워서 눈이 멀었다. (걸식소년 노래한다)

걸식소년의 노래/

등불 하나 켜들고 그대 있는 곳으로 가리라.

등불 하나 켜들고 지지배배 새소리

흘러가는 물소리를 실어오리라.

여기 하늘 아래 땅 위에

등불 하나 켜놓고 나는 기다린다.

아름다운 사람아

마침내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 차서

우리 마음은 저 깜깜한 밤 안개

그러나 세상이 슬픈 바다라 할지라도

등불 하나 켜들고 그대 있는 곳으로 가리라.

등불 하나 켜놓고 나는 기다린다.

아름다운 사람아

((걸식소년 미카엘의 서곡--- "등불 하나 켜들고 그대 있는 곳으로"의 고운 선율을 타고 등장하는 바보각시의 포장마차 신도림역전 어둔 밤하늘을 배경으로 등불 하나 켜놓고 앉은 바보각시. 어둠 속 휘파람 소리 휘파람 소리 따라 하나 둘 등장하는 신도림 사람들. 취객, 걸식소년 미카엘의 동냥그릇에 백동전 하나 딸랑 던져 넣어주면서 (서곡이 끝나고) 대한일보오--- "앵벌이 소년의 필사적인 외침 그리고,))

[취객] 내 모습이 삐딱하게 보입니까? (관객에게) 이해하십시오. 불행하게도 나는 이 세상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험한 세상 삐걱거리는 다리가 되어 이렇게 흔들리고 있습니다만, 사실 난 발을 빼고 싶거든요. 이 세상이 넌더리가 나서 발을 빼고 싶단 말입니다. 발목 잡혀 사는데 왜 세상은 튼튼하게 날 물어주지 않는 거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러난다) 틀렸다. 다 틀렸다! 무너질꺼야. 난 무너져 버릴꺼야. (관객에게) 후회하지 마 인간들아.

((취객, 포장마차에 당도한다. 우리 시대의 소외자가 바보각시에게 엉뚱한 수작을 걸고 있다.))

[소외자] 저는요, 따뜻한 콩나물국이 먹고 싶거든요. (바보각시, 웃으며 따뜻한 국물 한 그릇내어 놓는다) 그리고요, 당신하고 한 번 하고 싶은데요.

((옆에 서서 듣고 있던 실직청년이 소외자의 면상에 주먹을 한 방 날린다. 소외자, 맞고 서서 실직청년을 노려본다.))

[실직청년] 별 미친놈 다 봤네. 가, 임마

((소외자, 서러운 표정으로 사라지고 실직청년이 바보각시에게 지하철 열차칸에서 만났던 전 세계 챔피언 홍수환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실직청년] 전 어제 신도림역에서 홍수환을 만났습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하던 전 세계 챔피언 홍수환 말이에요. 참 딱하더라구요. 사업에 실패해서 고생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아, 글세 전 세계 챔피언이 지하철 표를 끊으려고 줄 서 있지 뭡니까, 바로 내 뒤에 서 있었다구요. (빙긋) 흥분되던데요. 전 세계 챔피언이 내 뒤에 서 있었다구요. (다시 생각해도 즐거운 함박웃음) (정색) 그런데 참 이상한 건요. 아무도 4전 5기의 신화를 낳은 홍수환을 알아주지 않는 거예요. (가볍게) 내가 너 언제 봤니? 모두 이런 상판때기로 죽어라 앞만 보고 줄 서 있는 거예요. 딱한 세상이죠, 네. 4전 5기의 신화를 낳은 인물인데 말이예요.

[취객] (시큰둥) 요새 신화 그거 모두 가짜야.

((실직청년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동안 밤 처녀는 턱을 괴고 앉아 취객을 쳐다본다. 그러다가 실직청년이 이야기가 끝나자 실없이 깔깔거린다. 실직청년은 그만 김이 빠지고, 취객은 자신을 쳐다보는 밤 처녀에게 시비를 건다.))

[취객] 왜 웃어?

[밤 처녀] (저 혼자 지껄인다) 글세, 배추 두 포기를 주물러 김치란 걸 담아 놓고 나니 갑자기 세상 살아갈 자신이 생기지 뭐예요. 내가 김치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예요. 나두 김치를 담을 수 있다구요. 내가 시집 갈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오십통쯤의 김치를 담게 된다면, 난 너무 행복해서 기절을 할지도 몰라요. (유쾌하게 다시 한 번 깔깔거리고 나서,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각시를 본다)

[취객] 별 미친년 다 봤네.

((포장마차에 모여 있던 사람들, 처음엔 서로의 이야기들에게 관심을 가지다가 이내 시들해진다. 우국청년이 들어와 모두에게 전단을 돌린다.))

[우국청년] 이 전단은 여러분에게 불화를 퍼뜨릴지도 모릅니다. 요즘 같은 시국에 불화를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양쪽에서 돌이 날아오겠죠. 그러므로 이 전단을 받으신 시민 여러분은 다음 사항을 유의해서 읽어 주십시오. (구호조) 여러분은 이 전단을 소시민적으로 읽으십시오. 여러분은 이 전단을 비민중적인 입장에서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내 말이 말 같잖게 들리면 전혀 감동 받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침을 꿀걱 삼키고 절실한 느낌으로 말한다.) 대망의 90년대는 이름 그대로 큰 망조가 들고 말았습니다. 우국 청년들의노력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렸습니다. 압제자를 백담사로 보낸 장본인은 누구였습니까? 총장 머리를 삭발했던 우리들 아닙니까! 우리들 우국의 십일조는 누굴 위해 쓰여지고 있습니까?

[취객] (박수) 옳소, 국회로 보냅시다.

[우국청년] (사람들 사이 헤집고 들어와) 그들에게 우리의 GNP와 가계부 형편이 왜 그토록 차이가 나는지 질문하십시오.

[취객] 잘났다. 잘났어.

[우국청년] 폭등하는 교통혼잡에 대해서도 대책을 요구하십시오.

[취객] 니 똥 굵다카이.

[우국청년] (흥분했다) 우리의 십일조로 살찐 돼지들을 잡으러 갑시다!

[취객] 나 돼지고기 안 먹어 임마!

[우국청년] (취객을 노려보며 악을 쓴다) 이 분배 불평등의 세상에 선전 포고를 내립시다. 깨어나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의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취객] 내가 연탄가스를 마셨니, 의식이 없게?

((우국청년, 그만 분통을 터뜨리며 품속에 최루가스가 든 깡통을 끄집어낸다.))

[우국청년]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당신 같은 소시민들의 냉소주의입니다.

((펑! 삽시간에 화염병이 터지고 포장마차는 최루가스 가득 찬다. 호루라기 소리 이어 밤 처녀의 적막을 깨는 외침 속에 사람들 기침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흩어진다. 자욱한 안개 속 바보각시만 동그마니 남았다. 각시, 정신을 차리고 안개 속의 세상을 빤히 내다본다. 조심스럽게 세상을 두드리는 각시의 언어, 이 언어는 하늘 아래 첫 동네 음계로 표현된다. 각시, 안개 속의 세상에 앉아 '정든 땅 언덕'을 노래한다. 각시의 노래는 맹인가수에 의해 되불려진다.))

맹인가수의 노래/

정든 땅 언덕 시냇물 따라 길 떠난 세월

내 영혼 집을 찾아 헤매이네

이 세상 작은 집

나의 삶터 나의 희망

나의 몸 바쳐 여기 살리

((밤처녀, "택시이--- "를 외치며 무대 앞으로 나선다. 취객, 비틀거리며 밤처녀의 다리를 잡고 늘어진다.))

[밤처녀] 왜 이러세요, 짐승처럼

[취객] 짐승? 그래, 난 짐승이다. 오월이 오면 짐승이다. 먼 옛날 옛적 5월, 나는 광주에 없었으므로 짐승이다.

[밤처녀] 도대체 날 뭘루 보구 이러느냔 말예요, 난 양심숙이예요.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취객] 양심이 밥 먹여주냐.

((취객, 밤처녀 스커트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밤 처녀, 으악!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을 갈퀴처럼 뻗어서 취객의 머리털을 닭털 뽑듯이 뜯는다. 취객, 화냥년! 하면서 밤 처녀의 스커트에 박치기를 하고 밤 처녀는 손에 들린 하이힐로 취객의 이마를 찧는다. 피를 흘리면서 일어서는 취객, 그 모습을 본 밤 처녀, 슬슬 포장마차 쪽으로 피해 숨는다.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취객의 독백))

[취객] 그래, 치욕이다 치욕! 살아 있는 게 치욕이다. 이 치욕의 세월을 닦아내고 짐승으로 환생하고 싶다. 짐승으로

((취객, 흐느끼며 포장마차에 온다. 우국청년, 다시 무대에 뛰어 오른다.))

[우국청년] 우리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우리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 낼 겁니다. 갑시다. 백두산까지 한라에서 백두까지

((사람들 우--- 야유를 던진다 시민들의 야유에 거꾸러지는 우국청년 홈--- 런--- ! 홈런입니다--- 흥겨운 프로야구 중계방송과 함께 등장하는 울리 시대의 소외자. 그는 이 시대의 황당무계한 가짜 메시아(교주) 로 둔갑한다.))

[교주] 그래, 내가 오마고 신약에서만 삼백회 이상 약속하고 승천한 지 이천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영적 신랑인 날 잊고 배짱 편하게 살 줄 알았더냐. 꼴 좋다. 자업자득이다. 너희들이 나한테 지은 죄가 어떠했는데 뻔뻔하게 사는 걸 원하느냐.

[앵벌이] 너희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제?!

[교주] (중지 손가락으로 힘차게 하늘을 찌르며) 종말은 공중에서 온다. 내 사랑하는 원수들이 더 이상 이 땅에서 죄 짓고 사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내 친히 팬텀기 편대를 이끌고 삼팔선을 넘으리니 영변 핵공장부터 박살내고 살아 남은 동포들을 먼저 하늘융단에 태워서 보낼터이니 너희들도 하늘문이 닫히기 전에 때를 놓치지 말지어다.

[앵벌이] 믿습니다!!

[교주] 내가 이렇게 목젖이 붓도록 외쳐도 당최 표정이 없는 저 인간들. 선교전단 공짜로 나눠줘도 창 밖만 바라보는 저, 저, 저, 저 몰상식한 인간들아--- 창밖에 뭐가 보이냐? 천국이 거기 있더냐? 내 새끼 네 여편네가 인신매매 당해도 속수무책 창 밖만 쳐다봐라.

[앵벌이] 아버지---

[교주] 그래서 이 도시의 실종자들은 다 내 새끼들이다. 가자, 내 새끼야, 일어나라.

((교주, 앵벌이 머리끄뎅이를 잡아 올린다.))

[실직청년] 저 기적이야, 기적.

[취객] 저거 모두 가짜야.

((앵벌이, 교주를 따라가고, 밤처녀도 살며시 뒤따라간다. 영광영광 할렐루야--- 노래하며 가는데, 파출소장 곤봉을 빙글빙글 돌리며 가짜 메시야의 행렬을 바라본다.))

[파출소장] 너 일루 좀 와 봐라.

[교주] 왜요.

[파출소장] 너 인신매매범이지?

[교주] 체, 같은 값이면 좀 고상하게 말하시오. 하늘융단 태워서 천국 보내는 것도 인신매매요?

[파출소장] (교주의 팔을 비틀어 꺾는다) 가자, 천국보다 닭장차가 네놈한테는 안성맞춤이다.

[교주] 이거 놔! 왜 팔을 붙들고 지랄이야 지랄이.

[파출소장] 요놈 시키. 네놈 행동이 하도 수상해서 내가 사흘 밤낮을 얼쩡거렸다.

[교주] 좋아, 가자구.

[파출소장] 가자!

[교주] 가자!

[파출소장] 가자!

[교주] 가자!

[파출소장] 빨리 가자!

[교주] 에이, 가만 있어봐라.

((교주, 파출소장을 따라가는 척 하다가 슬그머니 돈을 쥐어준다. 돈을 받아 넣은 순경, 잘 가라--- 하며 사라진다 소외자 (교주) , 앵벌이, 밤처녀 '내게 강 같은 평화--- ' 노래하면서 나간다.))

[맹인가수] 그렇습니다. 저는 심심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인간들은 저 혼자 죽기 두려워서 신화를 만들고 심심해서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외로운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공단 오거리에서 놀던 건달은 심심해서 부활을 꿈꿉니다. 못 믿으시겠지만 이게 진실입니다. 내가 왜 노래하지? 나는 이제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외롭다! 고로 나는 노래한다.

((무대 한쪽에 우국 청년이 서서 화염병을 들고 나와 던지려고 하나 던질 곳이 없어 주저하고 있다. 낙담하고 괴로워하는 모습, 그 모습을 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던진다.))

[취객] 아니 저,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녀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무슨 지랄이야, 지랄이. 저런 놈들은 그저 삼청 교육대 같은 데 집어넣어야 해. 6 25를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르지--- .

[파출소장] 그래요. 지난 일들은 역사의 심판에 맡기고 이제 우리도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면서 한 번 살아 봅시다. 세상이 바뀌었어요 (우국 청년을 향해) 봐라, 학생 이리 좀 와봐라. 여기 좀 앉아 봐라. 지금이 어떤 시댄데 철지난 80년대 흑백화면 돌리고 있노. 지금은 말이다 실천이니 해체니 하는 말은 물 건너 갔어요. 이제는 노스텔지어의 시대란 말이다. 노스텔지어! 내 말 못 믿겠거든 일요일날 고속도로 쪽으로 나가봐라, 전부 향수병에 걸린 인간들이 놀러 간다고 고속도로가 완전히 장바닥이란 말씀이야.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노나니. 이게 바로 우리 민족성 아니겠어요. 하하하!

[우국청년] (분노한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겁니까?

[파출소장] 이 친구 또 와이라노, 응!

[실직청년] 그래요, 너무들 하십니다. 정말 너무들 하십니다. (그러자 우국청년이 와서 안긴다) 홍수환 선수는 지금도 스포트라이트도 못 받고 개런티도 없이 의무방어전을 치루고 있는데 정말 너무들 하십니다 너무들 해요.

[취객] 홍수환이는 지금 인천에서 당구장 경영한다는데 무슨 소리야 이 사람아.

[실직청년] 전 세계 챔피언 홍수환은 여러분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제 멋대로 쓰고 버리는 일회용 콘돔도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는 인간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지하철을 탄 우리의 이웃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전--- 그와 아름답게 만났습니다. 나는 확인했다구요, 그는 지금 선전분투하고 있다구요.

((선전분투의 음악이 흐르면서--- ))



[경] 2경

전망이 없는 시대의 탈놀음

((도시의 음악상자가 등장한다. 가짜 메시아 일당의 환상적인 이동무대가 펼쳐진다. 노래하는 꼭두, 춤추는 꼭두가 등장하고 교주의 설교는 흡사 거리의 차력사를 방불케한다.))

[교주] 오늘 이 종말의 계획은 지금으로부터 1993년 전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계획하신 복수극입니다. 인간들에게 피 맛을 알게 하시면서 계획하신 저주의 메시지란 말이니다아. 생각해 보십시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얼마나 아팟겠습니까/ 자, 보십시오 (하면서 마구 온몸을 찌르며 자해한다. 몸의 피를 닦아 보이며) 이 피는 바로 저 우매한 민중들이 침을 뱉고 발로 찬핍니다. 배운 제자란 놈이 겁을 집어먹고 세 번 외면한 배반의 핍니다아. (눈물을 흘리며) 오! 마리아, 나의 어머니 주 예수가 믿을 인간은 천대받던 창녀밖에 없었습니다. (관객들을 향하여 언성을 높인다) 여기 누가 주예수를 도왔느냐!

[취객] 저 뭐하는 짓이야? 온몸에다 피칠갑을 하고---

[실직청년] 저게 바로 해프닝이라는 거예요.

[취객] 해프닝?

[실직청년] 그래요. 저 사람은 전위 예술가군요.

[우국청년] 전위예술? 당신은 저 모습이 예술로 보인단 말입니까? 저건 이 시대의 고통을 온 몸으로 껴안으려는 민중의 모습이요.

[파출소장] 아니, 분신자살 하려는거 아니야?

[우국청년] (울음을 터트리며) 그래요.

[취객] (실직청년에게) 이 사람 이거 안되겠구만. 분신 자살하려는 사람보고 전위 예술가라니 정신나간 인간 아냐. (위협적으로 훑어보며)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실직청년] 나? 나 이 시대의 젊은 염세주의자요.

[취객] 너 같은 인간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개판이 되어가고 있는거야.

[실직청년] (부끄럽고 화가 나서) 당신은 뭐가 잘났어요? 당신은 뭐요?

[취객] 나? 난 대한민국의 위대한 소시민이지 임마.

[교주] 이젠 끝장이란 말입니다. 이 개판 오분 전의 세상에 심판의 불이 무차별 융단 폭격을

내릴 것 입니다아.

[우국청년] (뛰어 든다) 그렇소. 투쟁의 시대는 끝나고 야합의 시대가 오고 말았소. 우리는 위장된 화해를 거부 한다아---

[교주] 여보시오. 여보시오. 저리 저리 나가시오. 우리도 이것하고 싶어하는 줄 알아. 목구멍에 풀칠 좀 해보려고 멍석 깔아 놓으니까 별 미친놈이 다 와서 개판 치네.

((도시의 꼭두놀음이 시작된다. 이 음악상자의 꼭두들은 돈을 넣어야 움직인다. 취객, 노래하는 꼭두놀음에 취한다. 실직청년은 춤추는 꼭두에 관심을 보인다.))

[파출소장] 돈 넣어라, 돈? 하--- 저거 신기한 꼭두각시들이네.

((취객, 다시 돈을 넣자 세상은 요지경--- 노래 이어지고 모두 환각상태에서 느릿느릿 춤을 춘다. 소돔성의 풍경이 펼쳐지고 우리의 맹인가수는 노래한다.

[맹인가수] 입술이 외로운 저 여자를 위하여 오늘도 극장 문은 열리고

외로운 사람들이 모인 무대엔 환상적인 헬리콥터가 뜬다.

상투적인 사랑에 싫증난 여자들이 극장에 온다.

상투적인 출근길에 지친 남자들이 극장에 온다.

그러나, 저 여자의 쇼는 상투적이고 시민들은 이미 상투적인

세상에 길들어져 버렸네.

입술이 유난히 붉은 여배우의 포스터가 도시의 벽마다 걸리고

썩기 싫은 것들이 추풍낙엽으로 떨어진다.

그리운 정신들아, 나는 지금 다운타운으로 내려간다.

그리운 정신들아, 다운타운 쓰레기통에서 만나자.

((모두들 뮤직박스에 취해 사라지고 각시만 멀뚱하게 남았다. 외롭다. 빈 무대, 우국 청년 등장한다. 비장한 음악과 함께 우국 청년의 절망적인 자살극이 진행된다. 각시, 우국 청년의 임종을 지켜준다. 각시의 맑고 슬픈 장송가.))

[맹인가수] 넌 누구냐? 바보냐?

((각시, 묵묵부답.))

[걸식소년] 어디서 왔니?

[각시] (밤하늘을 가리키며) 저-기

[걸식소년] (위를 쳐다보며) 저기 어디?

[각시] 하늘 아래 첫 동네.

[맹인가수] 하늘 아래 첫 동네? 넌 여기 와선 안돼. 여긴 아직 너가 살 곳이 못돼.

[각시] 난 여기서 살 거야.

[맹인가수] 여기는 지금 맥이 풀려 있어. 중심이 없는 세상이야.

[각시] 난 그냥 여기서 살 거야. 아이를 낳겠어. 내 아이는 그냥 천성대로 클 거야. 난 아이에게 희망을 걸어.

[걸식소년] 아이를 낳아도 소용없어. 세상은 점점 썩어 가겠지. 거대한 쓰레기 밭이 될 거야. 그때 이 세상의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누가 교육시켜도 소용없어. 이끌어 줄 어른들도 없어. 아이들은 사나와지고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납작머리가 될걸. 저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면서 쓰레기 밭에 묻힐거야.

((맹인가수, 걸식소년, 우국 청년의 시체를 업고 퇴장한다. 각시, 혼자 포장마차를 지키고 있다. 아무도 없다. 이제 누구도 각시의 포장마차를 찾지 않는다. 각시, 낙담하여 등불을 끈다. 어둠이 오고 어둠 속 두런두런 일어서는 가면들, 짐승의 욕망들 취객, 파출소장, 실직청년의 밤나들이가 시작된다. 저마다 가면을 쓰고 포장마차로 찾아든다. 각시는 그래도 반갑게 맞이한다. 사람이 그리운 시간 각시는 탈을 쓴 그들의 욕망들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들은 제멋대로 마시고 떠들며 밤 기운에 취한다.))

[취객] 여기, 몇 잔의 유황불과 몇 봉의 청산가리가 준비되었으니 친구들아, 와서 떠들며 마셔다오. 하하하.

[실직청년] 네가 그 잘난 여자란 것이냐? 말해라, 당장! 얼마나 필요하냐? 하지만 너 여자야 나를 좋아 마라. 나는 사랑이란 형태의 이기심을 경계하노니, 다만 즐겨 보자.

[파출소장] (젊은 샐러리맨 풍의 남자 관객을 향해) 당신이 케이 에스 마크로 무장된 이 시대의 청년인가?! 우선 그 장발을 단정히 깎아라. 그리고 넥타이로 모가지를 조아라 조아, 바야흐로 이 시대는 자네 같은 꽁생원이 대량으로 필요하다.

[실직청년] 누가 내게 당신은 애인이 있소, 라고 물어오면 나는 커다랗게 목청 높여 예--- 나도 한 마리 있소, 라고 대답한다.

[취객] 그리하여 만약에 또 누가 당신은 당신의 여편네를 믿을 수 있나이까, 라고 집요하게 믈어 온다면, 그렇게 묻는 당신은 과연 당신의 아내를 믿을 수가 있나요? 하하하.

((저 멀리 소돔성 불빛이 솟아오르고 음울하게 울리는 북소리 파출소장, 취객, 실직청년 밤기운에 취해 춤을 춘다. 전망이 없는 시대의 탈놀음이 시작된다. 각시, 천진스럽게 끼어 든다.

각시가 탈놀음에 어우러지면서 밤기운은 더욱 농탕하게 익는다. 광기에 젖은 탈들 기성을 지르며 각시에게 달려든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각시, 그리고 3인의 탈들만 안다.))


[경] 3경

누구도 새로운 희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밤의 한가운데 놓여진 각시 이 세상 바람이 각시의 속곳 밑을 지나가고 이 세상 미친 용두질로 각시의 치마는 붉은 꽃들이 들었다. 비로소 각시는 이상한 세상과 살을 나누고 피붙였다. 각시는 현실과 살 섞은 자신의 처지를 고통스럽게 받아들인다. 천성을 박탈당하고 순결을 잃은 그러나 세속적인 삶의 장으로 자신을 살보시한 여인의 춤 느릿한 살보시춤과 함께 3경은 열린다. 파출소장, 영노춤을 추며 등장한다.))

[파출소장] 장사 잘 됩니까?

((각시 옆에 은근한 눈웃음으로 앉는다.))

[파출소장] 각시야 노래 한 곡 해보거라.

((각시, 손바닥을 쫙 펴서 파출소장 면전에 댄다. 각시, 노래하는 꼭두 흉내를 낸다. 파출소장, 빙긋 웃으며 경찰모자를 벗어 각시의 면전에 댄다. 각시, 인상을 찡긋 쓰곤 노래를 한다.))

[각시]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

((파출소장, 박장대소하며 각시 뒤로 다가가 영노춤을 춘다. 각시의 노래, 밤하늘에 퍼진다. 취객이 비틀거리며 들어서다가 파출소장과 각시의 농탕질을 본다.))

[취객] 병신 육갑 떨고 자빠졌네. (파출소장을 향해 삿대질) 너는 인간인가?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나는 지금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나 자신으로부터 제기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나는 도덕적인가에 대한 물음에 자신 있게 네에--- 라고 답변할 뻔뻔스러움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물론, 포장마차 계집년하고 오입 한 번 했다고 해서 벼락을 맞겠습니까마는, 왠지 찝찝하단 말씀이에요. 그래서 전 오늘도 술을 마셔야 되겠습니다.

((취객, 터벅터벅 걸어가 돈을 꺼낸다. 각시, 묘한 눈웃음을 짓는다. 취객, 한숨을 푹 쉬며 돈을 꺼내 각시의 옷깃에 꽂아주고 각시 치마 밑으로 기어 들어간다.))

[실직청년] (포장마차를 노려보며) 잘 논다, 잘 놀아. 지금 여기는 전 시대의 악성루머와 굳은 똥 덩어리로 지린내가 나고 있단 말입니다. 앓던 이빨은 단호하게 뽑아야 합니다. (썩은 이빨 하나가 툭 떨어진다.) 앓던 이빨을 뽑으면 새로운 세계가 환각처럼 다가선다. 아--- 환각, 그렇지, 난 환각에 취해 살고 싶다.

((실직청년, 성큼성큼 두꺼비 춤을 추며 포장마차로 간다. 각시, 실직청년, 취객, 파출소장의 농탕한 밤놀이 춤이 전개된다. 각시, 기분 좋게 3인이 남자들에게 자신을 나누어준다.))

[각시] 아이구, 영감 일동 와?

[각시] 내 배가 아픕니더.

[파출소장] 배가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요새 좋은 약 안 많나 빨리 약방에 가서 약을 사 와야지, 약을.

[취객] 그래, 약 먹어야지.

[파출소장] (실직청년에게) 에이, 보거라, 저어기 구로 극장 건너편에 오거리 약방 안 있더나. 거기 약사가 우리 삼촌인께 (메모지를 꺼내 한 자 적어주며) 이거 들고 가서 약 좀 지어 달라 해라. 싸게 해줄끼다. 빨리 가 보거라.

((실직청년, 파출소장이 적어준 메모지를 들고 허겁지겁 무대를 가로질러 나간다. 서로 질투의 눈길을 주고받으며 수작을 거는 파출소장과 취객. 박탈 놀음이 전개되고 실직 청년 약병을 들고 뛰어 온다.))

[실직청년] 각시야 약 먹자.

[각시] (약간 취했다) 나 소주 한 잔이면 괜찮아. 약은 무슨 약이야.

[취객] 잔소리 말거라. 새로운 세상에서 살려면 신약 먹어야 된다. 각시야 아--- .

((취객, 억지로 각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어 넣는다. 각시, 울컥 노란 위액을 토해 낸다. 배를 붙잡고 신음하는 각시. 일동, 깜짝 놀라며 물러선다.))

[각시] 아이고, 배야. 이게 약 먹고 낫는 배가?!

[파출소장] 응? 거게 무슨 말이고.

[각시] 이 배가 바로 일수 찍는 배다.

((둘러선 파출소장, 취객, 실직청년의 눈길이 난처해진다. 3인, 서로 눈길을 맞추며 머리를 맞댄다.))

[파출소장] 저 속에 든 씨가 도대체 누구 씨지 이거?

[실직청년] (싱긋) 내 씰겁니다. 우리 아버지가 평안도 장수산 출신 아닙니까. 우리 아버지가적성이 남쪽으로 떨어지면 장수 낳는다고 했어요. 저 씨 하나는 좋을거외다.

((적성이 북쪽으로 떨어진다.))

[취객] (밤하늘을 보며) 적성이 북쪽으로 떨어지면 어떤 놈을 낳는 거지?

[실직청년] (밤하늘을 보며) 역적을 낳지오.

[파출소장] (밤하늘을 보고 각시를 본다) 그럼, 저 놈은 역적이다. 쌍 큰일 낼 놈 낳겠네 이거.

[실직청년] 아, 아니. 저 각시 뱃속에 든 씨는 내 새끼가 아닐겁니다. 아마도 (파출소장을 짓궂게 차며 당신 씨 아니겠어요. 아무래도 당신 코가 나 보다 크니까.

[파출소장] 하기야, 내 코가 좀 크긴 크지. (한숨) 야 큰일났네. 이거 박봉 받는 주제에 본처에 세컨드까지 두고 있는데, 또 발목 잡혔나. (오리발) 에이, 농담 마, 저 각시 뱃속에 든 씨는 아마도 (취객을 가리키며) 이 양반 씰거야, 옛부터 작은 고추가 맵다고 안하더나.

[취객] 농담 마, 이 사람아, 여편네한테 맞아 죽으라고.

[파출소장] 아이고, 지금 세상에 그래 맞고 사요? 나는 요, 아무리 그래도 여편네한테 매맞고는 안 산다구요. 체! 남자 자존심이 있어야지.

[실직청년] 흰소리들 말구 어케 대책을 강구해야 되잖겠습니까.

[취객] 자네가 책임지면 될거 아니야 이 사람아. 자네 압구정동 오피스텔에 세 얻어 산다며.

[실직청년] 큰일 낼 애새끼 낳는다면서요.

[파출소장] 그래 말이다. 인자 좀 우리도 조용하게 살아야 한단 말이다. 조용하게.

((이때, 각시 원망 서린 눈총으로 발딱 일어선다.))

[각시] 어떻게 하실 생각들이요?

[파출소장] 뭔 소리야 이게.

[각시] 이게 누구 씨요?

[취객] 그걸 어떻게 알아 젠장.

[각시] 잘 생각해 봐요 누구 자식인가.

[실직청년] 난 생각이 없는 인간입니다.

[각시] (탄식) 아이고, 답답, 내 팔자야--- 산중의 도사보다 차라리 다리 밑의 거지로 사는게 낫다 해서, 내 하늘아래 첫 동네 물 맑고 인심 좋은 고향 땅 등지고 여기로 들어왔는데, 그래,내 희망을 받아줄 남정네가 없단 말이오?!

[파출소장] 이 여자 보자 하니 보통내기가 아니데. 서방 셋 다 차고 살겠단 말이가?

[각시] (파출소장을 붙들고) 나는 상관없소. 이 자식 사람 이름하나 얻어 살게 호적에나 올려주소.

[파출소장] 떽, 난 공인이야 공인! 공인이 어떻게 사생아를 키운단 말이고.

[각시] (취객을 붙들고) 당신은 글줄 깨나 배운 양반께서 이 자식 일자무식으로 키우지는 않겠지요. 내 뱃속에 든 이 희망을 받아주소.

[취객] (훌쩍) 사실 난 생활력이 없는 식자층이요 식자층. 내가 배웠다는 게 당최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거란 말이오

[실직청년] (지레 겁을 먹고 피한다) 난 아직 우리 엄마한테서 얹혀 사는 형편이라서, 자식 책임질 형편이 못 되었네요.

((각시. 절망적인 느낌으로 돌아선다.))

[각시] (한탄) 세상이 아무리 험하다 하더라도, 인간은 세상 속에 살섞고 살아야 한다 하길래, 내 산중 시냇물처럼 흘러흘러 낮은 곳으로 내려왔겄만, 이세상 내 작은 희망을 받아주지 못하는구나.

((각시, 포장마차 위로 훌쩍 뛰어 올라 등불에 걸린 줄을 풀어 목을 묶는다.))

[파출소장] 살인난다이--- (하면서, 달려들고)

[취객] 빨리 저년 풀어라아--- 살인나면 우린 공범이다아 (하면서, 포장마차위로 뛰어오르는데)

((훌쩍 낙엽처럼 떨어져 뒹구는 각시 팽팽해지는 밧줄.))

[실직청년] 살인났다.

((일순, 정적이 흐르고))

[파출소장] 지 죽고 싶어서 죽은 거 우리가 뭔 죄가 있노.

[실직청년] 이거 어떻하죠?

[취객] 어떻하긴 어떤해, 어디 치워야지. 이러다가 순찰도는 순경이라도 보면 어떻할려구.

[실직청년] 순경 옆에 놔 두고 무슨 걱정입니까.

[파출소장] 이 사람들 지금 멀쩡한 사람 옆에 놔두고 엿 먹는 거야 뭐야.

[취객] 어떻하지 이거.

[파출소장] 어떻하긴 어떻해 치워야지.

[실직청년] 어디로 치운단 말입니까.

[파출소장] 아무데나 무른 땅에 팍 파묻고 덮어 버리면 될꺼 아니가. 요새 실종자가 어데 한둘이가.

[취객] 맞는 말이야. 요새 사람 목숨 개 값이지 뭐.

[실직청년] 얼른 치웁시다, 그럼.

((하면서 세 사내 각시 시체 곁으로 다가가는데 어디서 아기 울음소리 세 사내 흠칫 멈춰선다.))

[파출소장] 이거 무슨 소리고?

[실직청년] 각시 귀신이 곡하는 소리 아닙니까.

((하면서 밤공기를 둘러보는데 점점 분명해지는 아기 울음소리))

[취객] 아기 울음소리야.

[파출소장] 뭐라고? 어느 매정한 년이 또 애새끼를 밤에 갖다 버릿나.

((취객, 긴장된 눈빛으로 각시 배에 귀를 댄다.))

[파출소장] (흠칠) 뭐꼬?

[실직청년] (흠칠) 설마, 그 속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겠죠?

[취객] 여기서 나는 소리가 분명해.

[파출소장] (울상) 아이고, 이게 무슨 날벼락이고!

[실직청년] (흥분) 기적이에요, 이건 기적이라구요!

[파출소장] (어이없다) 그라믄, 누구 씬지도 모를 애기가 저 각시 뱃속에서 울고 있단 말이가, 지금?!

[취객] 그런 거 같애.

((세 사내 얼어붙는다. 아기 울음소리가 분명해진다.))

[실직청년] (울음을 떠뜨린다) 빨리 꺼내줘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파출소장] (울음을 떠뜨린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 새끼가 저 죽은 뱃속에서 울고 있단 말이가?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벌떡 일어나며 고함) 어서 식칼 가져 온나. 배를 갈라서도 애새끼는 살려야제!

[취객] (울음을 터뜨린다) 누구 씬지도 모를 애를 꺼낸단 말이야!

[실직청년] 이런 매정한 인간 봤나. 하여튼 늙으면 죽어야 돼. 사람 탈을 쓰고 그러면 안된단 말이오!

[파출소장] 맞는 말이다. 퍼뜩 식칼 가져 온나.

[취객] 가만 있어봐. 아무래도 저 울음소리가 수상해.

[파출소장] 거 무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고?

[취객] 적성이 북쪽으로 떨어지면 역적 낳는다고 했지?

[실직청년] 천지개벽 일으키면 큰 인물 되는 거지요, 뭐.

[파출소장] 아이고, 인자 좀 조용히 살아야지. 천지개벽 나 싫다.

[취객] 우리--- 조용하게--- 묻자.

[실직청년] (버럭) 당신들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아직 젊단 말이오! 난 이렇게 살아갈 수 없어요. 자신의 도덕성을 의심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파산선고들을 내리시오!

((실직청년, 각시에게 다가서려는데))

[파출소장] (곤봉을 돌리며 위협적으로 막아선다) 너 새파란 청춘 아깝지 않냐.

[실직청년] 거 무슨 소리요.

[취객] 귀 볼때기 새파란 놈이 어른 시키는 대로 따르면 될 것이지. 요새 젊은것들은 당최 어른 말을 안 들어.

[실직청년] (물러서며) 좋소, 마음대로들 하시오. 각자 따로 놀면 되니까.

[파출소장] (돌아서는 실직청년의 어깨를 툭 친다) 들어라.

[실직청년] 뭘요?

[파출소장] (각시의 시체를 가리키며) 빨리 들어란 말이다.

((실직청년, 두 사람의 위협적인 시선에 주눅이 들어 각시를 든다.))

[파출소장] 어디 갖다 묻지 이거?

[취객] (신도림 지하철역을 가리킨다) 저기.

((세 사내 각시를 매고 느릿느릿 돌아서 간다. 드높아지는 아기 울음소리를 무서운 굉음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지하철 열차 소음이 밟고 지나가 버린다. 어두워지고 빈 밤을 가로질러 오는 도시의 뮤직박스 교주가 뮤직박스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교주] (지상에서의 마지막 기도를 진행시킨다) 어머니, 그 바다 같다는 어머니의 풍성한 젖을 빨아 보지 못하고 자란 이 아들이 여기 1톤

짜리 금 십자가를 선물하나이다. (십자가를 던진다) 아버지, 그 태산 같다던 아버지의 구렛나루 휘날리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란 이 후레자식이 여기 1톤짜리 금 구두를 선물하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가 정말 고매한 목사님이시라면, 절 하늘나라 장로로 추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이) 네? 그렇게 개판치고도 하늘나라를 꿈 꾸느냐구요? 체, dog도 거꾸로 읽으면 god가 되지 않습니까. 저 이제 올라 갈께요. 아버지. (공중에서 내려진 오랏줄에 목을 건다)

[앵벌이] 교주님, 거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교주] 응, 내가 누울 별자리를 관찰하고 있지.

[앵벌이] 아이고, 우릴 놔두고 어디로 가시려구요?

[교주] (극장 안을 향하여 외친다) 형제들이여, 악마 같은 내 형제들이여! 이제 그대들이 깨어나면서, 이 세상은 저무는 20세기의 황혼을 보리라

((교주, 뛰어내린다 앵벌이, 흐느끼면서 공중에 매달려 하늘나라로 가는 교주를 보다가 그만 털썩 무릎을 꺾는다,.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는 앵벌이. 한편, 하늘나라 한 공부방. '암중모색'의 흰 띠를 두르고 열심히 책을 읽고 있던 우국 청년이 하늘나라로 전입해 오는 교주를 보고 씽긋 웃는다. 불이 꺼진다. 어둠 속 슬픈 하모니카 소리. 맹인가수와 걸식소년 미카엘이 빈 지상에 당도한다.))

[걸식소년] (포장마차를 본다) 아빠, 포장마차에 불이 꺼져 있어.

((두 사람, 포장마차 곁으로 간다.))

[걸식소년] 연탄불은 아직 살아 있어.

((이때, 다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득하게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적막을 깨는 아기 울음소리 걸식소년과 맹인가수가 밤을 허우적이며 울음소리의 행방을 찾는다. 지하철 거대한 돔 안. 한 점 숯불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그 불빛을 캐는 맹인가수와 걸식소년. 그들에 의해 지금 여기 우리의 새로운 신화는 재생된다. 그들의 손에 의해 캐내어지는 각시와 아기의 생생한 모습. 그 모습은 서로 따뜻하게 체온을 나누고 앉은

모자상(母子像) 으로 표현된다. 맹인가수와 걸식소년, 모자상을 모셔와 포장마차 위에 앉힌다.그리고, 신도림역을 알리는 지하철 표식통 불빛을 끈다. 어둠이 오고 다시 새벽이 오는 시각. 불 꺼진 신도림역전은 탈을 쓴 인간들의 모습뿐이다. 이때, 우리는 각시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각시의 음성 지금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위험하오니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탈을 쓴 인간들, 뒷골이 서늘해지면서 신도림역전에 흰 돛이 뜬다. 새벽안개 속을 헤치며 나오는 돛배. 그 돛배는 각시가 끌고 오던 포장마차며 그 돛배엔 여전히 등불이 켜져 있다. 맹인가수가 앞장을 서고 걸식소년 미카엘이 마차를 끄는 흰 돛배는 이제 또 다른 고해의 세상을 향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 돛 아래 소복의 각시가 앉았고 각시의 품속에 살아 눈뜨고 있는 동자상. 탈을 쓴 인간들은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탈을 벗어 각시의 돛배 위로 던진다. 모두 탈을 벗고 죄의 허울을 벗는다. 앵벌이 소년이 필사적으로 가면서 자신의 탈을 가져가 달라고 뒤따른다. 나의 죄도 씻어달라고 필사적으로 기는 앵벌이 소년에게 각시의 눈길이 닿고 각시의 손길이 천천히 열린다. 내 그대의 죄도 씻어가리라. 그러나 각시의 손길은 앵벌이의 탈을 끝내 받아주지 못한다. 앵벌이의 절망적인 모습 지워진다.))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