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로만 Narrative

[단편소설] 너의 의미 - 김영하

버블건 2007. 11. 17. 10:54

너의 의미

김영하


1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뇌 속에 숨어 있던 작은 성기가 힘차게 발기하는 느낌을. 저 지중해 어딘가에 있다는 누드 비치에 처음 당도한 관광객처럼 독자들은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책은 밝게 웃으며 어서 오라고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요염한 그 책들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암시를 풍기면서 손만 대면 가랑이를 벌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르가슴이 멀지 않았다. 바야흐로 우리의 뇌는 팽창하여 부풀어오르는 중이다. 우리는 허겁지겁 아무 책이나 뽑아 펼쳐댄다. 외설스런 장면이다. 그러나 이 누드비치의 풍경이 눈에 익으면 어느새 정신의 성기는 늘어지고 광대무변해 보였던 가능성의 세계는 1제곱미터 면적의 책상으로 한정된다. 졸음이 쏟아지거나 식욕이 생긴다.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한 사람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퀴퀴한 냄새도 비로소 코를 간지럽힌다. 그때쯤 되면 사람들은 잡지 서가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아직 낡지 않은 것들이 주는 달콤함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도서관의 그 독특한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소설은 나와 아무 인연도 없었을 것이다. 나 같은 인간이 문예지를 뒤적일 일이 어디 있으랴. 그거야말로 정말 오직 도서관에서만 가능한 종류의 일이다. 나는 국어사전만큼이나 두꺼운 문예지를 들어 표지를 훑어보았다. ‘한국문학과 상상력’이라는 특집 제목이 샘물체로 큼직하게 박혀 있었다. 상상력이라면 내 일과도 무관하지 않지. 나는 언제나 세상을 기절초풍시키고 싶어하니까. 우리 판에서는 그것을 ‘아이템’이라고 부른다. ‘깜’이라고 부르는 자들도 있다. 뭐라고 불리든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같다. 제작자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어서 계약하자고 달려들 이야기, 극장에 걸리기만 하면 수백만의 관객이 내가 먼저다 네가 먼저다 앞다투어 몰려들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놈의 보물찾기는 해가 저도 끝나지 않는다. 달이 가도 끝나지 않고 해가 가도 끝나지 않는다. 엄마들이 도와주지도 않고 선생님이 몰래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내가 그렇게 도서관에서 시간을 죽이는 까닭이다.
그녀의 소설은 특집 바로 다음에 있었다. 그녀는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문학과 뭐라는 그 문예지에서 공모한 신인상의 당선자였다. 어느 정도 쓰면 신인상이라는 걸 타는지 궁금해진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2

그날 밤 아이스크림 광고 모델의 배 위에서 나는 다시 그 소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단 것이 먹고 싶어졌다. 냉장고를 뒤져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그걸 모델의 배 위에 숟가락으로 퍼 얹어 놓았다. 녹아내린 크림이 배꼽에 고였다. 그 크림을 혀로 핥아먹기 시작하자 모델은 교미하는 뱀처럼 몸을 뒤틀었다. 다 드셨어요, 감독님? 모델이 제 배꼽 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응. 맛있어. 너도 먹을래? 대답 대신 그녀는 내 머리통을 제 사타구니에 처박았다. 배꼽에서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이 정수리를 적셨다. 아이스크림 모델의 사타구니는 달콤하지 않았다. 나는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혀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이제 그만 해!
모델과 나는 침대 속에서 사이좋게 남은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처음 만나던 날, 그녀는 내 성기에 요플레를 붓고는 입으로 그것을 빨아 먹었다. 아무래도 그것만은 잊을 수가 없어서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이번에는 요플레가 없었다. 대신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준비해두었다. 그것은 한쪽에는 차가움을, 다른 한쪽에는 달콤함을 선사한다. 차가운 성기와 달콤한 입은 곧 달콤한 성기와 차가운 입으로 변한다. 차가워진 그 입으로 그녀는 묻는다. 감독님, 다음 작품 언제 들어가세요? 이번엔 내가 그녀의 머리통을 내 사타구니에 처박는다. 곧 들어가. 스케줄 비워놔.
그녀는 내가 찍을 뮤직 비디오의 여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그건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눈 내리는 홋카이도에서 멋진 남자와 사랑하다가 붉은 피를 점점이 뿌리며 죽는 역할이야 여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보고 싶을 것이다. 이번 생은 틀렸으니 다음 세상에서 만나자는 애절한 가사가 자막으로 깔리는 동안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눈길을 달려간다. 멋진 장면이 되겠지만 그녀의 몫은 아닐 것이다. 10대 소녀들이 이름만 들어도 자지러지는 그 남자 가수의 매니저는 만날 때마다 실실 웃으며 확답을 주지 않는다. 돈 때문이라면 뭐 현실적인 수준에서 타협을 할 수도 있노라고 슬쩍 언질을 주었지만 이 인간은 계속 실실 웃기만 한다. 첫번째 앨범의 뮤직 비디오를 찍었다고 내게 우선권이 있는 것도 아니니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 한 편 덕분에 벌써 세 명의 배우 지망생과 두 명의 모델들을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예쁜 여자가 좋다. 쓰레기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면전에서 하지만 않는다면.


3

그 소설가를 만났다. 남산 중턱의 호텔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세계적 호텔 체인의 로고가 입구에서부터 들어오는 사람을 압도하는 곳이다. 모델이든 소설가든, 신인들은 이런 데서 만나는 게 좋다. 호텔의 권위가 후광이 되어 내 머리 뒤에 찬란한 광배를 만들어준다. 처음 오는 신인들 입장에선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했다. “군주가 엄중하고도 엄중하게 경계해야 할 일은 경멸당하거나 얕잡아 보이는 것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군주가 아니더라도 경청 또 경청해야 할 말이 아닌가. 어쨌거나 그런 일을 겪지 않으려면 장소 선정부터 신중해야 한다.
검은 스커트에 새틴 재킷을 입은 신인 소설가는 결코 겁먹지 않겠다는 결의 어린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아직 귀밑으로 솜털이 보송보송한 20대 중반의 여자였다. 문예지에 실린 조악한 증명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나았다. 저렇게 예쁜데 어쩌자고 소설 같은 걸 쓰는 걸까. 이런 호텔엔 아마 한 번도 못 와봤겠지. 여드름이 더덕더덕한 남자 친구한테 손목 잡혀 어디 표백제 냄새나는 여관방 정도나 들락거렸겠지.
나는 말했다. 도서관에서, 이것이 중요하다, 도서관에서 당신 소설을 읽었고 아주 감명 깊었고 그래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한 사람의 팬으로서, 독자로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보고 싶었다. 찬사는 이쯤하고 적당한 때가 되면 본론으로 들어간다. 당신같이 지적인 여자가 나를 위해, 그리고 한국 영화계를 위해 시나리오를 써준다면 정말 좋겠다. 우리는 멋진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처럼 통통 튀는 감각의 소유자가 어쩌자고 그 칙칙한 소설 나부랭이를 쓰고 앉아 있는 거냐. 지금은 영상의 시대다. 나와 함께 걸작을 만들어 대종상 시상식에 나가는 게 어떠냐. 칸에서 붉은 카펫도 밟고.
나는 연출부로 참여해온, 사실은 그냥 기웃거렸다고 말해야 옳을 영화 제목들을 주루룩 읊었다.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한 감독의 이름과 흥행 기록을 수립한 제작사의 이름, 출연료가 5억이 넘는 배우들의 이름을 차례로 주워섬긴다. 그러나 여자는 공항 안내 방송이라도 듣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다. 어찌 보면 열심히 듣고 있는 것 같고 또 어찌 보면 딴전을 피우고 있는 것 같다. 골 빈 여자애들이었다면 벌써, 어머 그래요, 하며 달려들었을 텐데 이 여자는 좀 다르다.
그녀는 조근조근한 톤으로, 자신은 영화를 잘 모르는 데다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며 게다가 신인이며 그러니 아직은 외도를 할 때가 아니라며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밝혀온다. 거절을 해본 일이 거의 없는 여자인지 무척이나 불안정해 보인다. 벌써 다섯 잔이나 물을 마시고 있다. 무표정한 웨이터는 그녀가 잔을 비울 때마다 귀신같이 알고 다가와 또르르르 물을 따라준다. 그러면 그녀는 또 마신다. 정 못 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슬슬 본전 생각이 난다. 나는 역시 쓰레기다. 어쩔 수 없다. 그게 내 본질이다. 이제부터는 작업이다. 슬슬 침울한 표정을 짓는다. 영화 일은 너무 힘들다. 소재는 고갈되고 재능 있는 작가도 없고, 정말 힘들다. 여자는 안절부절, 미안해하고 있다. 앉아 있기가 이젠 좀 고통스런 모양이다. 그럼 내가 구원을 해줘야지.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불쌍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봐요. 그 일은 잊어버리고 요 아래 바에서 술이나 한 잔 하지요. 그 순간의 내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어야 한다. 설마 그것마저 거절하지는 않겠지, 라고. 여자는 마지못해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늘 밤은 호텔에서 잘 수 있을 것 같다.


4

상쾌한 마음으로 사우나에 들러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지난밤의 쾌락을 생각한다. 모든 것이 쾌적했다. 이런 밤도 흔치 않다. 여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섹스 코드도 유별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하자는 대로 다 하는 여자였다. 소설가들은 다 그런가? 그럴 리야 없겠지. 얼마나 까다로운 족속들인데. 그렇지만 그 여자는, 호텔 방으로 끌어들이기가 좀 어려웠을 뿐,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마저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는데, 여하튼 그 여자는 아무 데도 걸리는 데가 없었다. 아침이 되자, 시나리오도 쓰겠다고 말했다. 커피숍에선 염소처럼 완강했지만 침대 위에선 너그러웠다. 이제 그녀는 나를 위해, 짧으면 3개월, 길면 1년이 넘도록 내 영화의 대본을 써야 할 것이다. 뭐, 그 친구한테도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소설가가 영화의 세계를 알아둬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이왕이면 나 같은 삼류 아닌 일류 감독, 메이저 제작사와 만났다면 더 좋았겠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모든 세계에는 질서와 절차가 있는 것이다. 우리 영화만 잘돼 보라. 메이저에서 왜 아니 달려오겠는가.
감독님,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요? 침대 속에서 그녀가 물어왔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국판이라고 생각하면 돼. 로미오와 줄리엣이 뭐 별 건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타오르는 정열, 자살, 질투, 뭐 이런 걸 엮어내면 되는 거 아니겠어? 조작가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그 소설만큼만 쓰라구.
소설하고 시나리오는 다르지 않나요? 나는 그녀의 젖은 머리칼로 귓불을 감아 돌렸다. 다를 거 하나도 없어. 조작가는 생각나는 대로 다 쓰라구. 그리고 나서 나랑 앉아서 고치면 돼. 여자는 한숨을 폭 쉬었다. 시트를 끌어올려 드러난 가슴을 가리며 여자가 물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게 되면 감독님과 자주 만나게 되나요? 나는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영화 작업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공동 작업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여자는 알겠다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5

도덕적으로 살면 걸리적거리는 게 없어진다. 주차 위반 딱지도, 죄의식도, 전과도 없다. 도덕이라는 게 별 건가. 행동 방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게 잘돼 있으면, 그리고 그게 그 사회의 도덕과 비슷하면 그것처럼 편리한 게 없다. 사람들은 20년 무사고 운전자를 존경한다. 무사고? 좋지. 그렇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물론 그 20년 동안 그의 인생길은 평탄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는 예비군 훈련을 불참하거나 범칙금 납부를 잊어버린 잘못으로 즉심 법정에 불려나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약간의 불편만 감수하면 더는 피곤한 게 없는 삶. 그런 사람에게 인생이란, 다소 예외가 있기는 해도, 경부고속도로 같은 것이다. 규정 속도를 지키면서 꾸준히 가기만 하면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바람둥이에게도 도덕은 있다. 도덕적 바람둥이라는 말은 없지만 바람둥이의 도덕은 있다. 이를테면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토마스는 한 번 만난 여자는 3주 후에나 만난다는 식의 도덕을 가지고 있다. 두 여자를 동시에 만나지 않는다는 놈도 있고 심지어는 한 침대에서는 오직 한 여자와만 섹스를 한다는, 얼핏 당연해 보이는 규칙을 가진 놈도 있다.
나는 아직까지 뭘 해야 되는지, 뭘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내 인생은 언제나 무심결에 저지른 일들을 수습하는 데 바쳐졌다. 제작비를 감독이 좀 갖다 쓰는 게 왜 나쁜지 아직도 나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그 일 때문에 차를 팔아야만 했고 선배의 마누라와 자다가 아닌 밤중에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신인들과 자고 다닌다고 욕하지만 내가 강간을 한 것도 아니고 서로 좋아서 벌인 일에 대해서 왜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사정이 어려울 때는 그 여자들의 돈으로 지낸 적도 있지만 그것 역시 강도질도 아닌데 왜 비난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나도 도덕적인 삶만이 순탄한 인생의 동반자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술가의 삶이 어찌 범인의 그것과 같으랴. 우리 예술가들은 위반을 통해서 배우고 고난을 통해 성숙하는 존재들이다, 이거지.


6

제작사의 정피디가 계약서를 조작가에게 내밀었다. 조작가는 사인하는 곳에 조,윤,숙,이라고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써넣었다. 정피디는 계약금 5백만 원을 자기앞수표로 주면서 영수증에도 사인을 하라고 했다. 조윤숙은 그렇게 했다. 나머지 잔금 천만 원은 영화가 크랭크인하면 지급하겠다고 정피디가 말했지만 조윤숙은 그거야 무슨 상관이냐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돈에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순진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남의 일이지만 그래도 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가 나중에라도 돈이 적네 어쩌네 하면서 나자빠지면 곤란하기에 내가 끼어들었다.
“조윤숙씨. 계약서 꼼꼼히 잘 읽어보고 사인해. 나중엔 그게 다 족쇄야 족쇄.”
조윤숙이 고개를 들어 나를 향해 씩 웃었다. 그녀가 그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돈은 중요치 않아요.”
횡령에 가담한 은행원처럼 늘 안절부절 못하는 정피디는 다음 약속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오백만 원짜리 수표를 핸드백에 챙겨 넣은 여자와 나는 영화사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쏟아지는 햇볕이 눈부셔 우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제 소설, 정말 좋았어요?”
조윤숙이 핸드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며 물었다.
“아, 그 소설. 글쎄, 뭐랄까.”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놀라 잠시 멈칫거렸다. 마치 철 지난 사랑에 매달리는 유부녀 같은 말투였다.
“어디가 어떻게 좋았어요?”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조금 달라보였다. 초승달처럼 생긴 눈을 가리자 훨씬 자신감 있어 보였다.
“음, 역시 라스트가 죽였지.”
“결말이요?”
“여자가 칼로 인형의 배를 가르면서 이렇게 말하잖아? 내 인생의 인형놀이는 이제 끝이다. 그게 멋지지.”
“그거요?”
여 자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그렇지만 곧 밝은 목소리로 어디 가서 밥이나 먹자고 제의해왔다. 우리는 요즘 중국집처럼 흔해진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들어가 스파게티를 먹었다. 스파게티를 다 먹고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는 동안 아이스크림 모델에게서 계속 전화가 왔다. 그 때문에 나는 몇 번이나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그녀는 뜬금없이 자꾸 술을 사달라고 했다. 겨우 전화를 끊고 자리에 돌아와 앉으니 조윤숙이 물었다.
“인기가 좋으신가 봐요.”
“아니 영화판이라는 데가 원래 이래. 하는 일은 없는데 전화통만 불이 나지.”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죠?”
“우선, 조작가하고 내가 서로의 생각을 맞춰봐야 되거든. 이번 영화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으니까, 우선 조작가가 간단한 시놉시스를 쓰고 그걸 갖고 어디 들어가서 트리트먼트로 발전시키자고.”
“그냥 윤숙이라고 불러 주세요.”
“어, 그럴까?”
“다른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일하나요?”
“보통은 그렇지. 시나리오가 처음부터 나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요즘은 기획 영화가 많아서 이렇게들 많이 하지. 일단 아이템 잡고 어디 들어가서 시나리오 쓰고 그 다음에 캐스팅하고, 뭐 그렇게 굴러가는 거야.”
여자는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그날도 여자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7

여자가 시놉시스를 들고 온 날, 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윤숙씨는 사귀는 사람 없어?”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자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어떤 사람인데? 글 쓰는 사람이야?”
“아뇨.”
“그럼 뭐 하는 사람인데?”
“나이가 좀 많아요.”
“유부남이야?”
여 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랬군. 유부남이었군. 너무 뻔한 도식이어서 묻는 내가 머쓱했다. 나는 그녀에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유부남은 누가 찔러주고 간 뇌물 같은 거야. 처음엔 짜릿한데 오래 하면 지저분해져. 그러니 그냥 인생을 즐기라고 말해주었다. 여자는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만들어온 시놉시스를 검토했다. 잘만 만들면 말랑말랑하면서 산뜻한 멜로물 한 편 나올 것 같았다. 조윤숙에겐 다행히 영화적 감각이 있었다. 특히 멜로 코드에 강한 것 같았다. 그렇게 칭찬해주자 조윤숙은 얼굴을 붉혔다. 수줍음이 많은 친구였다. 수줍음, 자꾸 보니 그것도 좀 식상했다. 문득, 아이스크림 모델과 그녀의 요플레가 그리웠다. 이 말없고 조용한 소설가에게선 점점 흥미가 사라지고 있었다. 격렬하고 퇴폐적인 섹스가 필요했다.
“정피디가 연락할 거야. 다음 주에 양평쯤에 콘도 하나 잡아서 들어갈 거야. 준비하고 있어.”
“네.”
나는 시계를 보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그만 갈까?”
조윤숙은 일어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감독님 먼저 일어나세요. 전 좀 앉았다 갈게요.”
“그래?”
조 윤숙은 따라 일어서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남겨둔 채 카페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이스크림 모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다행히 근처에 있었다. 나는 세븐일레븐으로 들어가 요플레를 산 후에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녀의 손에도 요플레가 들려 있었다. 우리는 쿡, 하고 웃고는 호텔 방에 들어가 요플레 하나를 함께 퍼먹었다. 그리고 그녀 몸에도 부어 핥아먹었다. 그렇게 먹는 내내 자꾸 조윤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도 이런 섹스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너무 얌전하게 다룬 것 아닐까. 문득 모험심이 솟구쳤다. 나는 아이스크림 모델의 배 위에서 내려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어디 가세요?”
“응. 편집실. 지난 번 뮤직 비디오 편집하기로 기사하고 얘기해놓고 깜빡했다야.”
아이스크림 모델은 입을 비죽거리더니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감독님, 너무해.”
“미안해. 저녁 시켜 먹든지 하고, 다음에 보자.”
나는 호텔을 나와 다시 조윤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감독님?”
“어디야?”
수화기 저쪽에선 말이 없었다. 나는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아까 거기구나. 그쪽으로 갈게.”
“……오세요.”
나는 운전대를 잡았다. 그르르릉. 뒷바퀴가 힘차게 땅을 긁었다.


8

조윤숙은 그 카페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커피도 핸드백도 앉은 자세도 그대로였다. 나는 두 시간 전 떠났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화장실에라도 다녀온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야?”
여자는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일은 무슨 일이요. 일이 있었던 건 감독님이잖아요?”
그 말은 맞다. 그녀는 그대로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앉아 있느냐고? 좀 이상한 거 아냐? 문득 무언가 완강한 어떤 것이 그녀에게서 느껴진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여자들이 이렇게 나오면 항상 골치 아픈 일이 시작된다. 도대체 그 유부남과는 어떤 사이야? 기분 나쁜 일에 휘말려들 것 같은 예감이었다. 호텔 방에 두고 온 아이스크림 모델 생각이 다시 났다. 벌써 체크아웃 하지는 않았겠지?
“감독님, 목에 립스틱 묻었어요.”
그녀의 눈길이 내 목덜미에 고정돼 있었다. 손으로 목을 문지르려는데 하필 그때 휴대 전화가 울렸다. 요란하게 울려대는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서 꺼내려 애쓰는 동안에도 그녀의 눈동자는 내 목덜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전화는 한 달 전에 오디션을 봤던 스무 살짜리 신인 여배우였다. 안부 전화라고 했다. 꼭 부적절한 시간에 안부를 묻는 여자애다. 새벽 4시에 전화를 걸어 안녕히 주무시라는 애다. 대충 윽박질러 전화를 끊고 목덜미를 문지르려는데 윤숙이 자기 핸드백에서 거울이 달린 분갑을 꺼내주었다. 비춰보니 정말 왼쪽 목덜미에 시뻘건 립스틱 자국이 나 있었다. 그녀는 티슈도 꺼내주었다. 나는 그것으로 립스틱 자국을 닦아냈다. 티슈에는 부인할 수 없는 연사의 흔적이 남았다. 차라리 손으로 닦을걸. 나는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마치 연극 무대에 처음 선 배우처럼 나는 허둥대고 있다. 갑자기 조윤숙이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한다. 흑. 도대체 왜 우는지 까닭을 모르겠는 나는 어쩔 줄을 모르며 윤숙을 달랜다.
“이봐, 조작가, 아니 조윤숙씨 왜 이래?”
윤 숙은 고개를 쳐들지 않고 계속 흐느낀다. 세련된 매너의 압구정동 주민들도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20대 중반의 여자를 울리고 있는 30대 후반의 남자를 힐끔거리기 시작한다. 미칠 노릇이었다. 나는 윤숙의 옆자리로 옮겨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윤숙이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다. 눈물이 휴고 보스 양복을 더럽힐 생각을 하니 우울했다. 나는 테이블 위의 티슈를 그녀의 눈과 내 어깨 사이에 슬그머니 밀어넣는다. 그런데 그녀가 그걸 빼앗아 코에 대고는 팽 하고 코를 푼다. 콧물 몇 방울이 다시 내 양복을 적신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는 그녀가 울지만 않는다면 유부남과의 그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불륜담을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술도 한 잔 사줄 수 있었고 뭐, 잠자리에서 따뜻하게 품어줄 수도 있었다. 울지만 않는다면. 그러나 그녀는 계속 울었고 그러자 다시 아이스크림 모델 생각이 났다.
“감독님.”
그녀가 드디어 내 휴고 보스 양복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그게 너무 고마워 밝은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래, 말해봐. 뭐야?”
“화 안 내실 거죠?”
“그래, 얘기하라니까.”
“저 감독님…… 아, 오늘 날씨 좀 춥죠? 옷을 든든하게 입었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저는, 제가, 내가 왜 이러지, 아, 저, 네! 저, 감독님 사랑하는 것 같아요. 아니 확실해요. 저 감독님 사랑해요. 미쳐버릴 것 같아요.”
비행기가 곧 추락하겠으니 승객 여러분은 기도나 하시라는 안내 방송을 들은 것 같았다. 카페 천장에서 산소 마스크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맥이 탁 풀려버린 나는 휴고 보스 양복이 구겨지거나 말거나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앞 에서도 말했지만 조윤숙은 미인이다. 물론 소설가치고는 미인이란 뜻이지 뮤직 비디오나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서도 될 정도란 얘긴 아니다. 그건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녀가 시쳇말로, 뜨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닐 것이었다. 그럼 왜? 정말 사랑에 빠졌다는 건가? 그럴 리가. 그녀는 배울 만큼 배웠고 비록 신인이지만 엄연히 소설가이고 게다가 젊고 예쁘다. 나와 두 번이나 잠자리를 같이 했지만 그렇다고 사랑에 빠졌다는 건 웃기는 일이다. 가끔 배우들은 연기를 한다. 당연하다. 그들은 배우니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맥 라이언처럼 오르가슴도 연기하고 헤어질 때는 슬픈 표정도 짓는다. 베개를 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다 거짓말이다. 말하는 그들도 알고 듣는 나도 안다. 우리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동시 통역기가 있어 사랑의 밀어를 비즈니스 용어로 부지런히 바꾸어주고 있는데 단지 모른 체하고 있을 뿐이다. 그게 일종의 거래라는 걸 시장 참가자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단지 소설가 조윤숙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저 철없는 숙맥만이.
저 여자가 날 사랑한다는 건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안 되는 거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여자와 시나리오를 쓸 생각이 전혀 없다. 그 시나리오가 잘 되겠는가? 나의 모든 의사 표시는 사랑의 맥락에서만 해석될 것이다.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그녀는 울겠지?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좋다고 하면 그걸 확대 해석해서 하루 종일 행복해하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번 영화로 입봉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충무로에서 내게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써줄 사람은 저 조윤숙밖에는 없다. 오직 그녀만이 아직 내 정체를 모르고 있다. 아니 그런데 그녀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내가 쓰레기라는 것을. 지금까지 읽어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녀는 내 목덜미에 묻은 립스틱도 보았고 내 입에서 튀어나가는 그 교양 제로의 말투도 들었고 양아치를 방불케 하는 내 패션 감각도 잘 알고 있다. 누가 보아도 난 그저 한심한 충무로 낭인이다. 이곳저곳 영화판을 기웃거리며 귀동냥이나 하고 가끔 신인들 뮤직 비디오나 찍고 왕년의 연출부 시절 무용담이나 떠들고 다니면서 어리숙한 초짜 여배우들이나 따먹는, 그게 일상인 나를 사랑한다니. 아무리 순진해도 그건 좀 심했다. 남자 여자가 하룻밤 잘 수는 있지. 그렇다고 엉기는 건 곤란하다.
이런 내 생각은 고스란히 말이 되어 그녀에게 귓바퀴를 향해 날아갔다. 그녀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렇게 다 듣고, 그녀는 말했다.
“감독님, 왜 자학을 하세요?”
하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라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자학이라니. 오, 신인 소설가 조윤숙. 넌 자학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구나.


9

제작사의 정피디를 만났다.
“감독님, 시놉시스 나왔다면서요?”
“시놉이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예요?”
“조작가가 이상해.”
“뭐가요?”
“글쎄, 아, 이거 참, 황당해서, 하, 이걸 어째야 되지.”
“감독님, 사고 치셨군요. 진도를 천천히 빼셨어야지.”
“그게 아니야.”
“그럼요?”
“날 사랑한대.”
정피디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사랑, 사랑, 이제 좀 지겹다는 투였다.
“이건 아주 심각해.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
“물론 데리고 잤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피디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조작가 나이가 몇이죠?”
“스물여섯.”
정피디는 씩 웃으며 말했다.
“데리고 사세요. 지가 좋다는데. 감독님도 미혼이고. 뭐, 여자 작가, 좋잖아요? 돈도 벌고 일은 집에서 하고.”
“농담하지 마. 영화는 어쩌고.”
“홍보에도 좋겠는데요. 연예가 중계에 슬쩍 흘리죠.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영화가 끝나는 대로 결혼하기로 했다고. 장르도 어차피 멜로고. 딱이네요.”
“그러다 영화가 안 들어가면?”
정 피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충무로는 바다 거북의 세계와 비슷하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들이 모두 바다로 가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영화들이 제작 단계에서 엎어진다. 그 정도만 돼도 양반이다. 나는 거기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벌써 두 번이나 기획 단계에서 주저앉았다. 그러니 영화가 안 들어가면 조윤숙과 나의 절망적 결혼 관계만이 남겠지. 무엇보다 나는 조윤숙이 왜 하필 나를 택했는지를 납득할 수가 없다. 정피디를 비롯한 누구도 내게, 그도 그럴 만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여자라도 반했을 거예요, 따위의 말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한 명쯤은, 조윤숙이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라고 말해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건 헛된 기대였다. 다들, 어쩌다 그런 사고를 쳤느냐는 표정이다. 세상이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하긴, 나 자신도 속일 수 없는데 어찌 다른 사람들을 속이랴.
“정피디. 진지하게 말해줘.”
“네?”
“조윤숙이 왜 그러는 걸까?”
“좋으니까 그러겠죠.”
“농담 아냐. 잘 알잖아. 나 같은 걸 뭘 보고 좋아해? 내가, 만든 영화가 있어, 얼굴이 번듯해, 집안이 빵빵해, 돈이 많아, 나이가 적어?”
감독님이 뭐가 어때서요, 란 말을 절대 하지 않으면서 정피디는 심각한 얼굴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필시 잠시 후에 열릴 다른 영화 기획 회의 안건을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말해봐.”
“남녀 관계야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혹시 모르죠. 속궁합이 잘 맞는지.”
“에이, 그건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러고 보니 그것밖엔 없었다. 그러나 정말 그것뿐이라면 한심한 일이었다.
“너무 그렇게 타박하지 마세요. 사랑에 빠져서 걸작 멜로물을 쓸지 누가 압니까? 다른 작가들은 그러고 싶어도 안 되는데.”


10

일주일 만에 만난 조윤숙은 사막에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얼굴이 바싹 타들어가 있었다.
“집에는 잘 얘기하고 온 거야?”
“네.”
우 리는 정피디가 예약해놓은 양평의 콘도로 향했다. 지난주의 고백 때문에 일을 하러 간다기보다 애정의 도피 행각이라도 벌이는 분위기였다. 엿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늪을 얼마나 잘 피해왔던가. 이 바닥 애들과는 결코 사랑 놀음을 하지 않았다. 그런 빈틈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영악한 애들이어서 그게 거래라는 뉘앙스를 조금만 풍겨도 금세 알아들었다. 소설가니까, 언어에 민감한 사람이니까 더 잘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이런 밥통일 줄이야.15평 면적의 콘도의 객실에 짐을 풀고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콘도라는 곳은 참으로 묘하다. 모두를 가족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강박증 환자처럼 보인다. 콘도에만 들어오면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자기 공간과 역할을 찾아낸다. 물론 그 모델은 가족이다. 조윤숙은 벌써 그릇들을 씻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쌀을 안치려구요.”
“제작비에서 다 나오는데 궁상떨지 마. 나가서 사 먹으면 되지.”
“밥을 뭐 하러 사 먹어요.”
그 녀는 은근히 고집스러운 데가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꺼내 전선을 연결하고 상태를 점검했다. 설거지를 마친 그녀는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나를 끝내 일으켜 세워 지하에 있는 슈퍼마켓으로 끌고 갔다. 어느새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랄라라라. 바구니에 물건들을 담던 그녀는 차오르는 그 무언가를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듯 쇄골에 손을 얹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행복해.”
나는 맥주와 국산 위스키를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그녀가 경탄 어린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감독님은 술도 잘 드시잖아요.”
“그게 뭐?”
“멋지다구요!”
나 는 사랑이 호르몬의 이상 분비 때문에 빚어지는 일종의 병리 현상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30대 중반의 남자다. 사랑이, 우리가 지금 하려고 하는 멜로 영화에서 그렇듯이, 애들 코 묻은 돈 우려낼 때나 써먹는, 일종의 청소년 용품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유일하게 내가 모르는 것은 바로 내 앞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저 여자다.
늦은 저녁, 위스키와 맥주를 섞어 마시며 나는 말했다.
“우리는 살림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시나리오를 쓰러 온 거라구.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시나리오도 쓰고 살림도 하면 좋잖아요? 영원히할 것도 아니고.”
“아니, 시나리오만 썼으면 좋겠어.”
조윤숙은 다시 울먹이기 시작한다.
“정말 왜 이러는 거야? 큐피드의 화살이니 뭐니 하는 진부한 얘기 말고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솔직하게 말해봐. 도대체 왜 자꾸 사랑이니 뭐니 하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거야?”
“그게 그렇게 괴로우세요?”
“아니, 꼭 괴롭다기보다 일에 방해가 되니까 그렇지.”
그 녀는 맥주잔에 위스키를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벌써 두 잔째였다. 그러더니 작심을 한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무 길고 횡설수설이어서 요약할 수밖에 없는데 요지는 이렇다. 호텔에서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가슴이 떨렸다. 우선 그날 내가 입은 풀오버가 나와 정말 잘 어울렸다(주변에선 모두 갖다버리라던 옷이다). 내가 바 탁자 위에 호텔 열쇠를 꺼내놓았을 때, 너무 행복해서 눈을 꼭 감아야만 했다(나는 그녀가 방으로 데리고 가도 될 만큼 충분히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나 같은 사람을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의 말을 종합해보면 나는 보헤미안적 예술가의 현신이었다. 그녀에 의하면 나는 충무로라는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기 위해 허무한 섹스와 독한 알코올에 탐닉하고 있으며 심지어 늘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 했다(그녀 말에 의하면 자신의 문학판 동료들은 모두 좀팽이이며 멋도 낭만도 모르는 샌님들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돈만 좇는 제작업자들은 내 가치를 모르고 있으며 나르시시즘에 빠진 배우들은 오만이 극에 달해 캐스팅에 좀처럼 응하지 않으며 때문에 재능 있는 시나리오 작가들은 감독 보는 눈이 없어서 나 같은 감독에게 좋은 원고를 넘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가 언제 그렇게 영화계 사정에 정통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돈이 안 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으며, 그러므로 제작자나 투자자들이 지금까지 내게 돈을 대지 않은 것은 나와 영화에 대한 견해가 달라서가 아니라 내가 돈 될 만한 아이템을 갖고 있지 못해서였고 배우 캐스팅이 안 된 건 보여줄 시나리오가 없어서였고 시나리오가 없는 까닭은 제작사들이 돈 될 만한 시나리오를 내게 밀어주지 않은 까닭이다. 동어반복이다. 시나리오 작가들은 제작사를 위해 글을 쓰지 감독을 위해 쓰지 않는다는 것을 내 앞에 앉아 있는 조윤숙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날 위해 기가 막힌 시나리오를 써주면 그것으로 만사오케이다. 제작사는 캐스팅에 나설 것이고 배우들은 시나리오만 좋다면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그러니 조윤숙이 할 일은 내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비운의 천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수백만 관객을 극장 앞으로 끌어들일 멋진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다. 그런 진실을 채 설득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 품에 안겨왔고, 정말 원치 않았지만, 나는 다시 그녀와 몸을 섞었다. 이 어쩔 수 없는 육체의 감옥! 이 개미지옥에서 감미로운 고통에 사로잡힌 여자와 정사를 벌이는 건 정말이지 부담스런 일이다. 난 그 고통과 감미의 원천이다. 내가 사라지면 모순은 사라진다. 그렇지만 난 사라질 수 없다. 나는 가늘고 길게 세상의 온갖 향락을 최대한 즐겨볼 작정이니까. 나는 고통도 감미도 다 싫다. 문득 그 두 가지가 모두 필요 없는 아이스크림 모델 생각이 간절했다.


11

그녀가 시나리오의 초고를 쓰는 동안에 나는 콘도를 나와 서울로 차를 몰았다. 처음에 그녀를 만났던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자주 오게 되면 도서관도 더 이상 에로틱하지 않다. 들어서자마자 목표한 책으로 그대로 돌진하게 된다. 일체의 전희도 애무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중년의 섹스처럼 되어버린다. 어째서 내 머릿속의 모든 비유들은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아 정말 쓰레기인 것이다, 나는.
어쨌거나 내가 직행한 곳은 정기 간행물 열람실이었다. 목표는 조윤숙이 신인상을 받은 바로 그 문예지였다. 그녀의 소설을 다시금 꼼꼼히 읽어보았다. 남자 주인공은 어떤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여자는 그 남자를, 뭔가 아주 섬세한,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싫어한다. 그래서 남자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출판사 편집장인 그 남자는 결국 자살을 택한다. 남자는 유서를 남긴다. 유서는 장황하게 인용되어 있는데 그 부분은 좀 지루하여 그냥 지나갔다. 출판사에선 가뜩이나 읽기 힘든 유서를 더 작은 글씨로, 게다가 친필의 느낌을 더한답시고 비뚤비뚤한 글자체로 편집해놓았다. 어쨌거나 그 여자는 자신을 스토킹하던 남자가 죽은 후, 오랫동안 곁에 두고 있던 인형의 배를 칼로 가른다. 다시 읽어보니 좀 섬뜩한 내용이었다. 조윤숙이 나를 스토킹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말이 그렇다는 건 좀 꺼림칙했다. 뭐야? 왜 그때는 이 소설이 좋다고 생각했던 거지? 지금 보니 아주 상투적인 이야기였다. 여자는 요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관습적으로 우울하고, 물론 살기도 혼자 살고, 친구도 없다. 나중에 죄도 없이 할복을 당한 인형이 그녀의 유일한 친구다. 직업도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직업이다. 식충 식물 재배가 본업이고 홈쇼핑 텔레마케터를 아르바이트로 하고 있다. 남자는 어느 날, (뻔하다) 식충 식물을 사러 왔다가 그녀와 마주친다. 그리고 (유치한 비유다) ‘식충 식물에 끌려드는 한 마리 파리’처럼 그녀에게 이끌린다. 여기까지 봐서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인다. 나는 식물을 기르지도 않고 출판사에 다녀본 적도 없다. 소설 속의 남자처럼 진지하지도 않다. 약간 안심을 한 상태에서 독서를 끝냈지만 어쩐지 개운하지가 않다. 도대체 뭘 얘기하려는 거야? 갑자기 주제가 궁금해졌다.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걸 밝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이런 문학상 수상작은 뒤에 심사평이 따라붙는다. 그걸 읽어보기로 한다.
근엄한 얼굴의 심사위원 둘,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 심사위원 한 명이 두 페이지 가량의 평을 써놓았다. 그 중 가장 근엄해 뵈는 심사위원의 글을 먼저 읽었다. 그는 심사 과정을 다소 장황하게 써놓은 후에 조윤숙의 작품은 근래 보기 드문 진지한 작품이며 특히 주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했다. 그 심사위원이 보기에 조윤숙 소설의 백미는 바로 그 ‘유서’라고 했다. 내가 읽지 않은 바로 그 부분이 핵심이라니. 좀 당혹스러웠으나 일단 끝까지 읽어보기로 했다. 심사위원 생각에는 바로 그 유서에 소설의 주제가 드러나 있는데 그 주제는 바로, 왜 하필 그 사람인지를 설명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고통, 이라고 했다. 한국말인데도 금방 이해되지 않았다. 왜 하필 그 사람인지 설명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고통? 과연 유서가 있는 페이지를 다시 들춰보자 그 말이 이해가 갔다. 남자는 그 여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왜 하필 그 여자인지 끝내 납득하지 못했다. 왜 하필 너지? 누구에게도 소개할 수 없고 못생겼고 정말 형편없는 너, 그런데 왜 너의 매력은 시들지 않지? 그리고 너로 인한 이 고통은 왜 이토록 오래 지속되는 거지? 출판사 편집장을 괴롭힌 건 바로 그 문제였다.
음. 좋은 책은 언제나 독자를 깊은 사색으로 이끈다. 나는 조윤숙의 소설보다 심사위원의 심사평이 더 흥미로웠다. 그 주제는 뭔가 지금의 우리 관계에 어떤 암시를 던져주고 있었다. 우린 뭐지? 조윤숙의 태도로 봐서 우리 관계는, 그 주제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수없이 간증을 했다. 심지어 내가 술을 많이 마시는 것조차 멋지다고 한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소설 속의 남자는 그 어떤 사랑의 증거도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제시할 수 없어 괴로워했지만 윤숙은 아니다. 아, 고급 문학을 오래 읽고 있으면, 게다가 심사평까지 읽고 있노라면 언제나 머리에 쥐가 난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나 명작은 언제나 해답도 마련하고 있다. 백 번 읽으면 제 아무리 어려운 문장도 그 뜻을 알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세번째 독서에서 내게 다가온 운명의 정체를 알았다. 나는 문학과 뭐라는 그 문예지를 조용히 바지 속에 집어넣었다. 아마 도서관에서 문예지를 훔쳐나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설령 들고 나가다 걸려도 가난한 문학도라며 동정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나는 불룩해진 바지를 겨우 추스르며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12

노트북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그녀에게 문예지를 펼쳐 들이밀었다.
“이 초등학교 교감처럼 생긴 심사위원의 평, 어떻게 생각해?”
“뭐가요?”
“동의하는 거야? 왜 하필 그 사람인지를 설명할 수 없는…… 어쩌구 하는 거?”
“네.”
“그래서?”
“네?”
“깊은 감명을 받고 지금 속편 쓰고 있는 거야?”
“속편이라니요?”
“속편이 아니라는 거야?”
“시나리오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 네가 나를 사랑하네 어쩌네 하는 거. 도서관에 가서 다시 네 소설 읽었어. 내가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이번 주제는 그거 아냐? 왜 하필 나인지를 설명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고통!”
“자학하지 마세요. 감독님은 누구보다도 멋진 분이세요.”
“정말 미치겠군. 그게 바로 내 고통이래두.”
“그런 주제 분석은 문학평론가에게 맡기세요. 우리는 영화에만 집중해요. 걸작 한 번 만들어봐요. 그래서 칸의 레드 카펫을 함께 밟아요.”
“시나리오 작가는 카펫 안 밟아.”
“감독님이 밟으실 거잖아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나는 양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거대한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예술의 길은 왜 이리 험난한가.
“그래, 알았어. 열심히 해보자구.”
조 윤숙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통유리창을 열고 콘도 베란다로 나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신부가 처녀가 아니란 걸 알아버린 신혼 여행지의 어린 신랑처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양평의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내뿜었다. 어느샌가 그녀는 베란다로 따라나와 등 뒤에서 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리곤 나직이 속삭였다.
“감독님. 사랑해요.”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