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로만 Narrative

[희곡] 이강백 - 자살에 관하여

버블건 2007. 11. 17. 10:57

자살에 관하여 / 이 강백
 

등장인물
남지인 - 라디오 방송국 프로듀서
유경화 - 소설가


무대
  독신자 아파트, 라디오 방송실
이 연극은 남지인이 살고있는 독신자용 아파트와 라디오 방송실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아파트와 방송실이 각각 별도의 무대로 독립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 방송실 장면에서는 아파트의 붙박이 장롱이 두 쪽으로 나뉘어 벌어지면서, 벽 뒤에서 방음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이
「방송중」이라는 전광표시판과 함께 나타난다.
독 신자용 아파트의 구조는 침실, 거실, 부엌의 구분이 없는 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침대가 놓인 곳이 침실, 식탁과 냉장고가 있는 곳이 부엌, 소파와 탁자가 있는 곳이 거실의 용도로 쓰여진다. 남지인은 그러한 비좁은 공간 속에 크고 작은 생활도구들과 장식품들을 균형 있게 배치하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눈여겨보면, 그 공간은 이미 포화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이상의 사람과 물건이 들어올 경우,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균형이 깨어지고 말 것이다. 남지인은 사십대 중반의 미혼여성이다. 오랫동안 라디오 방송국에서 육아상담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어떤 사람이든 너그럽게 포용하는 성품이 천성적인 것이라면, 모든 일을 조심스럽게 주의해서 다루는 태도는 나중에 후천적으로 익힌 습관이다. 유경화는 삼십대 초반의 매력적인 여성이다. 여러 남자와의 복잡한 동거생활을 해왔으며, 그와 같은 관계가 파경으로 끝날 때마다 자살을 시도했던 경력이 있다. 그녀는 자살을 소재로 삼아 여러 편의 소설들을 써서 발표하였으며, 그 소설들은 상당히 많이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인 성과로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장] 1장
(새벽. 캄캄한 어둠과 고요한 침묵.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리면서 현관문을 걷어차고 두드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깊은 잠 속에 빠져있던 남지인이 깨어나 전등을 켜고, 놀란 표정으로 현관문 앞으로 다가간다.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손잡이를 붙잡고 밖을 향해 묻는다.)
[남지인] 누구예요?
[유경화] (소리) 나야, 나!
[남지인] 나라니---?
[유경화] (소리) 어서 문부터 열어!
[남지인] 누군지 말해야지. 도대체 누군데?
[유경화] (소리) 언니, 나라니깐!
[남지인] 그래, 너 경화구나?
[유경화] (소리) 어서 문 열어 줘!
(남지인, 현관문을 연다. 그러자 문을 밀치고 있던 유경화가 안으로 넘어지듯 들어온다. 창백한 얼굴,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옷에는 구토한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다.)
[남지인] 맞아, 맞아, 바로 네가 또 온 거야!
[유경화] 언니, 나 약 먹었어.
[남지인] 무슨--- 약---?
[유경화] 스트리키니네. 수면제야. 내 나이만큼 서른 두 알을 손바닥에 올려 놓고, 하나씩, 하나씩 집어서 입 속으로 삼켰지.
[남지인] 맙소사, 또 자살하려구?
[유경화] 응. 그런데 이번에도 실패야.
[남지인] 너, 정말 미쳤다!
[유경화] 언니, 나 화장실 좀 쓸게. 먹자마자 토하기는 했지만 속이 뒤틀리고 메스꺼워.
[남지인] (화장실 쪽을 가리키며) 화장실은 저쪽이다. 내가 뭐 도와줄 게 없니?
[유경화] 화분이나 하나 갖다 줘!
[남지인] 화분은 왜?
[유경화] 화분 속엔 지렁이가 있거든. 난 지렁이만 보면 징그러워서 심한 구역질을 해. 언니도 그렇지?
[남지인] 나한테는 묻지 말고 너나 실컷 토하렴. (창가에 놓인 화분을 갖다 준다.) 그런데 지렁이가 없으면 어떻게 하니?
[유경화] (화분의 꽃을 뿌리째 뽑아 버리고서 화분 속에 남은 흙덩이를 들여다보며) 언니, 한 마리 있어! 난 화장실로 갈게!
(유 경화, 화분을 들고 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간다. 남지인은 뿌리 뽑혀 바닥에 버려진 꽃을 주워든다. 그녀는 곤혹스런 표정이다. 화장실에는 구토하는 소리가 계속되더니,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남지인, 부엌으로 가서 꽃을 그릇에 담아 놓는다. 유경화, 화장실 문을 반쯤 열고 얼굴을 내민다.)
[유경화] 나 양치질 좀 해야겠어.
[남지인] 그래.
[유경화] 내가 언니 칫솔 써도 돼?
[남지인] 마음대로 해.
[유경화] 언니, 화났어?
[남지인] 아냐.
[유경화] 너무 화내지 마. 나도 이렇게 하고 싶진 않았어.
[남지인] 어서 양치질이나 하고 나와.
(유경화, 화장실로 들어간다. 남지인은 처음 당혹했던 때와는 다
르게 마음을 진정시켜 가는 모습이다. 그녀는 침대 밑에 놓여있는 탁상시계를 집어 올려 바라본 다음 내려놓는다. 그리고 핸드백을 찾아들고 소파에 와서 앉더니 담배를 꺼내 피운다. 유경화가 화장실에서 나온다.)
[남지인] 새벽 세시구나, 지금---
[유경화] 미안해, 언니.
[남지인] 토하고 나니깐 속은 어때?
[유경화] 아직도 쓰리고 뒤틀려. 하지만 이젠 죽지는 않을 거야.
[남지인] 다행이다, 그럼. (소파를 가리키며) 여기 와서 앉아.
[유경화] 괜찮아.
[남지인] 앉지 왜 서있어?
[유경화] 언니한테 정말 미안해서---
[남지인] 점점 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너. 앉아. (옆에 다가와 앉은 유경화의 손을 잡고 등을 다독거린다.) 미안해 할 거 없어.
[유경화] 고마워, 언니.
[남지인]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약을 먹은 거야?
[유경화] 그 자식 때문이지.
[남지인] 그 자식이 누군데?
[유경화] 응, 나하고 함께 산 자식이지 뭐! 육 개월도 안됐는데, 글쎄 나한테 싫증이 났다는 거야!
[남지인] 지난번 인사시켜주던 그 남자 말이니? 변호사였지. 아마---?
[유경화] 그 남자하곤 이미 옛날에 헤어졌는걸. 언니도 기억할 꺼야. 내가 삼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었잖아. 그게 바로 그 변호사와 대판 싸우고서 갈라섰던 때라구.
[남지인] 그럼 천장에 목매달아 죽으려다가 실패했던 때는 언제였지?
[유경화] 그때는 내가 고등학교 선생이랑 함께 살 때였지.
[남 지인] 그 날 목에다가 밧줄을 걸고 와서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넌 죽으려다가 안되면 꼭 나한테 오더라. 그래도 오늘처럼 약을 먹고 온 건 낫다. 언젠가는 분신자살 하려구 온 몸에 활활 불을 붙인 채 달려오면 어떻게 하니?
[유경화] 언니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야?
[남지인] 죽기를 왜 바래? 어쨌든 너 다시 살아난 걸 축하한다. 그런데 네가 수면제를 먹는데도 남자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
[유경화] 글쎄, 그 자식이 눈을 뻔히 치켜 뜨고 바라만 보잖아. 입으로는 중얼중얼 한 알, 두 알, 세 알--- 세기까지 하더라구.
[남지인] 나 같으면 슬그머니 먹다가 중단해버리겠다.
[유 경화] 하지만 난 오기가 있거든. 서른 두 알까지 삼키고 나니까 그 자식도 놀란 표정이 됐어. 그리고는 내가 미쳤으니 나가라는 거야! 나가, 나가버려 하면서 어찌나 바락바락 고함을 질러대는지, 오히려 미친 건 그 자식 같더라구!
[남지인] 너는 그 사람에게서 쫓겨난 거구나?
[유경화] (유경화의 담뱃갑을 손으로 잡으며) 언니, 나 담배 한 대 피울게!
[남지인]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없구?
[유경화] 없어!
[남지인] 전혀---?
[유 경화] (담배연기를 마시고 심하게 헛구역질을 하며) 전혀 없다니까! 그 자식, 하마처럼 살은 뚱뚱하게 쪘지만 괜찮은 인간이었어. 제법 머리 속에 든 것도 있구, 문득문득 놀라운 상상력도 발휘할 줄 알았거든. 내가 세 번째 소설을 발표했을 때 그 하마 같은 인간이 날 찾아왔어. 내 소설로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는 거야.
[남지인] 시나리오를?
[유경화] 그래, 내 소설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거지. 자기는 시나리오 작가라면서 유명한 감독도 잘 알고 제작자도 잘 안다는 거야. 우린 금방
친해졌어. 언니도 내 성격을 알지만 난 화끈하잖아. 만났던 첫날부터 그 인간과 함께 살게 됐지.
[남지인] 그건 너무 심했다. 어떻게 만나자마자 함께 살수가 있니?
[유 경화] 언니는 남자와 함께 산다는 걸 어렵게 생각하는 버릇이 없어. 남자와 사는 건 아주 쉬워. 그냥 함께 밥 먹고, 함께 자는 거라구. [남지인] 시나리오는 썼어? 혹시 함께 밥이나 먹고 함께 잠이나 자다가 단 한 줄도 못쓴 건 아니야?
[유경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지. 그 하마 같은 자식이 나하고 함께 자는 것에만 열을 올렸거든.
[남지인] 빨리 끓은 냄비가 빨리 식는다. 넌 어쩌자고 매번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니? 생각해봐, 변호사하고도 그랬잖아? 또 그전에는 고등학교 선생하고도 그런 실수를 했어.
[유경화] (담배를 재떨이에 부벼끄며) 언니, 술 있지? 나 한잔만 줘!
[남지인] 술은 안 돼!
[유경화] 언니는 지금 내 심정을 몰라. 죽지 못하고 산 사람의 심정을 모른다구!
[남지인] 네 심정이 어떤 건데?
[유 경화] 그 몹쓸 자식들이, 아니 그 인간들이 모두 보고싶은 거야. 정말이야, 언니. 그 빌어먹을 인간들이 보고싶어서 견디지를 못하겠어. 다 잊었는가, 다 잊어버렸는가 했었는데, 죽지 않고 살아날 때마다 그 인간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고 싶은 거야.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그런데도 그 인간들은 지금 내가 자기들을 그리워한다는 걸 모르겠지. 사실은 언니, 난 그 인간들과 헤어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어. 내가 천장에 목을 메달았을때나,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던 때나, 약을 먹었던 때나, 오히려 나는 그들을 꼭 붙잡으려 했던 거야. 하지만 그 인간들은, 아니 그 자식들은 하나같이 그런 내 심정을 알지 못한 채 나를 내쫓았어. 똑같이 말이야, 다시는 보기도 싫다고 내쫓더라구!
[남지인] 얘, 얘, 울 것 없다. 그들이 안 쫓아냈으며 넌 벌써 죽었을 거다.
[유경화] 그건 무슨 소리야. 언니?
[남 지인] 지금도 그렇잖아? 그 하마 같은 인간이 내쫓아버리니까 넌 죽어봤자 소용없겠다면서 금방 먹은 약을 토해낸 거지! 도대체 넌 왜 그러니? 그런 방법으론 사람을 붙잡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면 다시는 반복하지를 말아야지, 자꾸만 그 짓을 되풀이 해?
[유경화] 언니, 지금 내 마음이 아파. 위로는 못할 망정 꾸짖지는 말아.
[남 지인] 너처럼 영리한 애가 왜 자꾸만 죽는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지난번 삼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을 때, 넌 온 몸에 기브스를 하고서 거의 일년동안 병원에 누워있었지. 그런데 어땠니? 네가 붙잡으려 했던 인간은 단 한번도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구.
[유경화] 바빠서 못 왔던 거야. 고등학교 선생이란 수업시간이 많거든.
[남 지인] 그게 아냐. 내가 학교에 전화해봤는데, 그 인간은 너한테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거야. 두 번 다시 너하고는 만나고 싶지도 않고, 꿈에라도 네가 자살하는 꼴이 보일까봐 겁이 난 댔어. 그런데 너는 뭐냐? 그런 인간들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유경화] 난 또 야단맞을 짓을 했어. 하지만 제발 부탁이야, 지금은 꾸짖지 말고 위로 좀 해줘. 난 아픈 사람이잖아. 위장도 뒤틀리고 마음도 아파.
[남지인] (유경화를 껴안고 등을 다독거리며) 그래, 경화야. 죽지 않고 살아난 건 정말 다행이지!
[유경화] 추워---
[남지인] (유경화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며) 너, 몹시 열이 있구나!
[유경화] 졸리기도 하고---
[남지인] 어서 병원으로 가야겠다!
[유경화] 아냐, 언니. 폭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남지인] (유경화를 껴안은 채 일으켜 세워 침대로 데려간다.) 내 침대에 누워.
(남지인, 유경화를 침대에 눕힌 다음 담요로 덮어준다.)
[유경화] 언니도 잠을 자야 할텐데!
[남지인] 난 다시 잠자기는 틀렸다.
[유경화] 그럼 내 옆에서 노래나 불러 줘.
[남지인] 무슨 노래---?
[유경화] 자장가지 뭐. 우리가 시골 살 때, 언니가 나를 업고서 불러주던 노래 있잖아.
[남지인] 난 그런 노래는 벌써 잊었다. 어서 눈을 감고 자기나 하렴.
[유경화] 그 하마 같은 자식, 지금은 속 편하게 자고 있는지 모르겠네!


[장] 2장
(낮. 유리창문으로 강한 햇빛이 들어와 실내를 가득 채운다. 유경화,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눈을 뜬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나 차츰차츰 정신이 들면서 자신의 상태를 이해한다. 그녀는 머리맡에 놓인 메모지를 발견하고 집어든다. 남 지인이 적어둔 내용을 더듬더듬 소리내어 읽는다.)
[유경화] 아침에 너를 병원으로 데려가지 못하고 출근해서 미안하다. 내가 근무하는 라디오 방송국의 전화번호는 알고 있겠지? 무슨 일이 있거든 나를 찾으렴. 하지만 오전 11시부터 정오까지는 내가 육아상담 생방송을 하기 때문에, 직접 통화가 되지 않는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돌아올게.
(유경화, 침대 밑의 탁상시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소파에 앉더니, 탁자 위에 놓인 라디오의 스위치를 작동시킨다. 육아상담 프로그램이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다. 전화로써 질문하는 젊은 주부의 목소리가 들린다.)
[질문자] 우리 애기는요, 태어난 지 십 개월이에요. 그런데요, 기저귀 가는 걸 싫어해요. 아주, 아주 싫어해서요, 아예 기저귀를 떼려고 하는데 지금이 괜찮을까요?
[상 담자] 지금은 아직 이릅니다. 우리 인간은요, 변의나 요의를 느끼고 배설하기까지는 뇌와 신경의 복잡한 작용이 필요하죠. 그렇지만 아기 때는 신경이나 근육이 덜 발달한 상태라서 조절이 잘 안돼요. 기저귀를 떼는 시기에 대해서 물으셨는데, 아기마다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단정짓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아기가 변기에 앉을 수 있게 될 때 기저귀를 떼야 무난해요. 좀 더 여유를 갖고 기다리세요.
[질문자] 고맙습니다, 가르쳐주셔서요.
[상담자] 다음 전화 받겠습니다. 여보세요?
[다른 질문자] 여보세요? 여보세요---
[상담자] 잘 들립니다. 말씀하시죠.
[다른 질문자] 우리 아기는 정말 걱정이에요. 글쎄 무슨 애가요, 내가 음식을 먹여주어야지 먹지, 자기 혼자는 먹을 생각을 절대로 안 해요.
[상담자] 지금 몇 개월 됐어요?
[다른 질문자] 일년 팔 개월이요. 혼자서 먹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죠?
[상담자] 아무리 어린애라도 강제로 먹힘을 당해야 한다는 건 고역이죠. 어쨌든 아기가 음식을 먹을 때 흘린다든가, 뱉는다든가, 그런 이유로 야단친 적 없어요?
[다른 질문자] 네, 있어요.
[상 담자] 그렇게 야단친 다음에는 요, 혼자 먹으라고 해도 아기는 이미 먹는데 흥미를 잃어버렸거든요. 그래서 혼자 먹는 흥미를 다시 유발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음식을 차려놓고서 누가 먼저 먹나 시합해보자든지,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는 놀이 등 그런 재미있는 방법을 써보세요.
(유경화, 라디오의 멈춤 스위치를 누른다. 그리고 냉장고에 다가가서 먹을 것을 찾는다. 그러나 몇 개의 양파와 고추가 있을 뿐이다. 그녀는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양파와 고추를 꺼내 개수대의 수돗물로 씻더니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는다. 그리고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망설이다가 고추를 들고 한 입 깨문다. 사이. 장롱 옆의 벽걸이용 전화기에서 벨이 울린다. 유경화는 수화기에 달린 기다란 전화선을 이끌고 식탁으로 되돌아온다. 남지인의 목소리가 벽걸이용 전화기에 내장된 스피커를 통해서 들린다.)
[남지인] 경화야? 경화, 일어났니?
[유경화] 응, 나 일어났어.
[남지인] 네 목소리를 들으니깐 안심이다.
[유경화] 언니, 지금 어디 있지?
[남지인] 방송국이야. 그런데 넌 왜 그렇지? 네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려.
[유경화] 고추를 먹고 있어서 그래
[남지인] 뭘 먹어---?
[유경화] 고추! 맵디매운 고추를 먹으니깐 입안이 얼얼해!
[남지인] 너--- 정말 그걸 먹고 있니?
[유경화] 그렇다니 깐! 언니 냉장고에는 먹을 게 고추하고 양파밖엔 없다구!
[남지인] 미안하다, 미안해. 너 좋아하는 음식이 뭐지?
[유 경화] 난 뭐든지 잘 먹어. 특히, 죽으려다 실패해서 살아나면 식욕이 왕성해져. 아까 라디오에서 있잖아, 인간이 강제로 먹힘을 당해야 한다는 건 고역 이랬어. 하지만 나에겐 그런 고역은 없는 거야. 난 닥치는 대로 뭐든지 먹고싶은 심정이거든.
[남지인] 알았어, 경화야! 제발 고추는 먹지 말고 기다려! 맛있는 것 많이 사 갖고 갈게!


[장] 3장
(저녁. 식탁 주위에만 전등의 불빛이 아늑하게 비춘다. 남지인과 유경화, 식사중이다. 남지인이 거의 수저를 놓고 있는데 비해서 유경화는 왕성한 식욕으로 음식을 먹는다. 남지인, 유경화를 감탄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유경화] 왜 날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지?
[남지인] 네가 부러워서 그런다. 어쩜 그렇게 잘 먹을 수가 있니?
[유경화] 언니는 뭐 때문에 안 먹어?
[남지인] 나야 이 정도면 충분해.
[유 경화] 언니가 잘 안 먹는 건 삶에 대한 욕구가 없기 때문이야. 언니도 나처럼 가끔씩은 자살하려다가 살아나 봐, 놀랍게도 왕성한 식욕을 느낄 거야. 그리고 언니, 식욕만이 아냐. 성욕도 강해져.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몽땅 사랑하고 싶거든. 솔직히 말해서 산다는 건 참 아름답고 황홀한 거야.
[남지인] 그래, 사는 게 죽는 것보다야 낫지. 사실은 바로 그걸 너한테 충고할 작정이었는데, 네가 먼저 네 입으로 해버리니깐 나는 할 말이 없구나.
[유경화] 충고라면 내가 언니한테 할 게 많아. (냉장고를 가리키며) 우선 저기 냉장고에 먹을 것을 가득 채워둬. 저 속에 말라비틀어진 고추와 양파뿐이었다는 건 삶에 대한 모독이야.
[남지인] 난 집에서 거의 밥을 해먹지 않는 걸.
[유 경화] 아침은 굶고 출근하구, 점심은 음식점이나 구내식당에서 사먹구, 저녁은 먹을 때도 있고 안 먹을 때도 있다 그거지? 도대체 언니, 산다는 게 뭐야? 먹기 위해 산다, 살기 위해 먹는다, 그런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먹지 않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어보기나 했어? (옷장을 가리키며) 그리고 저기 옷장 말이야, 저 옷장도 텅 비어 있더라구. 언니는 지금 가장 인생이 무르익는 때야. 우아한 옷, 화려한 옷들이 가장 잘 어울릴 때지. 그런데 언니는 화장도 안하고 언제나 거무칙칙한 옷만 입고 다녀. 그래서 남자들이 언니의 진짜 매력을 몰라보는 거야.
[남지인] 난 그럴 나이가 지났다.
[유경화] 언니는 늙지 않았어.
[남지인] 그리고 난 지금 이대로가 좋아.
[유경화] 좋다니, 뭐가 좋아?
[남지인] 이게 마음이 편해.
[유경화] 하긴 식욕도 없고, 성욕도 없으면 마음은 편하겠네!
[남지인] 네가 몰라서 비웃는 거야. 음식 맛이 무 덤덤해지고, 남자들이 성가시게 굴지 않을 때, 비로소 여자는 마음의 안정을 얻는 거란다.
[유경화] 언니는 또 울타리를 치고 있군. 자기 자신의 둘레에 높다란 울타리를 치고는 혼자서만 그 속에 들어앉아 있는 거야.
[남지인] 난 그런 사람이야. 울타리 속은 고요하고 아늑해.
[유경화] (수저를 내려놓으며 불안한 시선으로 남지인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내가 이곳에 들어온 게 싫겠지!
[남지인] 꼭 너라서 싫다는 건 아냐.
[유경화] 그럼---?
[남지인] 난 누구든지 내 울타리 속으로 들어오는 건 싫어.
[유경화] 설마 언니, 나를 쫓아내려는 건 아니겠지?
[남지인] 글쎄--- 여기에 얼마나 있을 건데?
[유경화] 나도 몰라!
[남지인] 내가 너를 나가라고 쫓은 적은 없었어. 네가 못 견디겠다고 제 발로 걸어나갔지. 생각해보렴, 넌 몇 번이나 그랬잖아. 자살에 실패할 때마다 너는 이 아파트를 찾아왔어. 그리고는 사정없이 내 울타리를 망가뜨렸지.
[유경화] 오히려 불편했던 건 나라구! 언니 눈치만 슬슬 살피면서, 오금 한번 제대로 펴본 적이 없었어.
[남지인] 그것 봐. 나도 네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었다. 그랬지만 우린 뭐냐, 함께 있으면 서로가 불편할 뿐이었어.
[유경화] 끔찍한 지옥이었지, 뭐!
[남지인] 네 말이 맞아. 우리가 또다시 그런 지옥을 겪을 필요는 없잖니? 경화야, 너 지금 어떤 사정이지? 그 하마 같다는 남자와 함께 살던 집으로는 정말 돌아갈 수 없는 거야?
[유경화] 그 자식한테는 못 가!
[남지인] 왜? 못 갈 이유가 뭔데?
[유경화] 이유고 뭐고 따질 것 없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 당장 나갈 거야! 당장 나가서 한강에 풍덩 빠지겠다구!
[남지인] 이번에는 물에 빠질 작정이니?
[유경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언니, 내 사정 좀 봐줘! 난 어제 약을 먹었는데, 단 하루도 안 지난 오늘 물 속에 뛰어들 수는 없잖아?
[남지인] (소리내 웃는다.) 그래, 그건 좀 심한 것 같다.
[유경화] 웃지마, 언니!
[남지인] 그럼 웃지 않구, 이럴 땐 어떻게 해야지?
[유 경화] 진지하고 심각해야지, 웃으면 안 돼! 자살하겠다는 사람 말을 웃어넘기면, 오기가 생겨서 진짜로 죽어버리게 되는 거라구. 솔직히, 그 하마 같은 자식이 죽겠다는 나를 조금만 믿어줬어도 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그 자식은 내가 설마 죽기까지 하겠느냐, 입을 쩍 벌리고 웃는 낯짝이었어. 그런데 그 인간뿐이 아냐. 내가 밧줄로 목을 맸던 때도, 삼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던 때도, 다 마찬가지야! 모두들 농담으로 여길 뿐 진심으로 받아주질 않는 거야!
[남지인] 미안하다, 미안해. 난 그런 줄 몰랐어.
[유 경화] 언니는 사람의 심리를 몰라도 너무 몰라. 사람이란 상대방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 위해 죽는 거야. 내가 지금 꾹 참았으니까 그렇지. 한강으로 달려가서 죽어버려 봐. 언니는 나를 죽게 한 거 때문에, 평생동안 가슴에 아픈 못이 박힐 거라구!
[남지인] 얘, 성난 얼굴 좀 풀어라. 네 옆에 앉아있기가 겁난다.
[유경화] 언니한테 미리 경고해 두는데, 울타리 어쩌고 하면서 내 신경 건드리지 마. 당분간 불편을 견디는 게 낫지, 평생 후회할 것 없잖아?
[남지인] 그래, 경고해줘서 고맙다.
[유경화] 옛날엔 자살한 사람을 어떻게 했는지 알아? 시체를 행인이 많이 다니는 큰길에다 묻었어. 왜냐하면, 자살한 사람의 원한 품은 혼령을 꼭꼭 밟아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구 말야.
[남지인] 왜 자꾸만 무섭게 그런 소릴 하니?
[유 경화] 난 자살을 많이 연구했어. 신문이나 잡지에서 자살 기사가 나면 꼭 오려놨구, 도서관에 가서 자살에 관한 온갖 자료들을 찾아보기도 했거든. 불란서 메츠 지방에서는 자살자의 시체를 나무통 속에 집어넣고서 강물에 던졌어. 멀리 멀리 바다로 흘러가서 죽은 자의 유령이 못 돌아오게 하려는 거야. 영국에서는, 자살은 반역죄만큼이나 큰 범죄로서 사형에 처했어. 그러니깐 자살을 하려다 실패한 사람은 결국은 교수형을 당하고 죽어야 했지. 플라톤이 살던 아테네에서는, 자살자의 시체는 다른 시체들과 분리시켜 아테네 시 밖에다 묻었어. 더구나 자살자는 자기 자신을 죽인 저주받을 두 손을 잘라내서 각기 다른 장소에 따로따로 묻었지. 더 재미있는 건 원시사회야. 자살자를 장례지 낼 때 마술사가 주문을 외우면 망령이 나타나는데, 그 망령이 자기를 못살게 괴롭혔던 사람이 누구라고 가르쳐준다는 거야. 그럼, 부족들이 그 지적된 사람을 붙잡아서 똑같은 방법으로 자살하도록 강요하는 거지. 내가 최근에 썼던 소설 있잖아, 그 하마 같은 자식이 시나리오로 만들겠다는 소설 말야, 그것도 그래. 자살하는 사람이 주인공인데 그는 자기를 죽임으로써 타인을 죽게 만들어.
[남지인] 나도 네 소설들을 읽어봤지. 하지만 으시시할 뿐 별 흥미 없더라.
[유경화] 언니야 흥미 없겠지. 그러나 자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겐 굉장히 재미있는 모양이야.
[남지인] 글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유 경화] 굉장히 많아.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만 무려 칠천 사백 명이나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었으니깐. 물론 이건 공식 통계지. 쉬, 쉬, 숨겨버린 자살자까지 합치면 더 많을 걸. 그리고 나처럼 실패한 사람까지 합치면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을 거야!
[남지인] 그렇게 많다니 놀랍구나!
[유경화] 언니도 자살하려고 했으면서 뭘.
[남지인] 얘 좀 봐. 내가 언제?
[유경화] 시치미 떼기는. 언니가 이혼했던 때 굶어 죽을 작정이었잖아. 열 나흘간이나 아무 것도 안 먹고, 비아프라 난민처럼 기사 직전에 있는 것을 내가 구해줬지.
[남지인] 그때 이야긴 꺼내지도 마.
[유경화] 언니 남편이었던 자, 악질 중에 악질이야. 6개월도 안된 갓난아기까지 빼앗아가구---. 지금쯤은 굉장히 컸을 텐데, 보고 싶어
죽겠지?
[남지인] (잠시 침묵한다) 그 사람은 잘못이 없어. 아기도 내가 키우지 못할 것 같으니까 데려간 거구.
[유경화] 그래서 언니는 어린애만 보면 미치더라.
[남지인] 제발, 그만해.
[유경화] 언니, 궁금한 게 있어.
[남지인] 그만 하라니까. 넌 내 상처에 자꾸 소금을 뿌릴 거니?
[유 경화] 라디오 말야. 언니가 맡고 있는 방송을 들었지. 어린애 기저귀는 언제 갈아야 좋으냐, 음식은 어떻게 먹어야 하느냐, 그따위 시시한 질문만 하잖아. 그런데, 진짜 이런 질문은 없었어? (라디오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흉내낸다.) "우리 아기는요. 태어난 지 삼 개월예요. 그런데요, 벌써부터 자살하려구 해요.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해야 좋죠?"
[남지인] 아냐, 아냐, 그런 문제는 한번도 없었어.
[유경화] 글쎄--- 어린애들도 죽고 싶을 때가 있을 텐데--- 기저귀에 더러운 똥과 오줌을 싸면서, 먹기 싫은 음식을 강제로 쑤셔 먹히면서,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킬 수 없다는 게 창피해서 자살하고 싶을 것 아니겠어?
[남지인] 농담이 지나치다, 너!
[유경화] 난 진담으로 한 소린데?
[남지인] 어린애 자살이라니, 그런 끔찍한 소린 듣기도 싫다!
[유경화] 언니도 참--- 어른들 자살은 화를 안내면서, 아이들 자살은 왜 화를 내?
[남지인] 듣기 싫다는데 계속할 거야?
[유경화] 아이들의 시시한 문제는 상담해 주면서, 어른들의 심각한 문제는 모르는 척 하니깐 그렇지. 언니네 라디오 방송도 마찬가지야. [남지인] 그럼 너는 방송에 자살상담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거니?
[유경화] 아이들은 그냥 둬도 저절로 잘 커. (의자에서 일어나며) 그러나 어른들은 그냥 두면 죽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는다구.
[남지인] 너, 또 어디 가려구 일어나니?
[유경화] (식탁의 그릇들을 개수대로 옮긴다.) 설거지하려구.
[남지인] 난 네가 한강으로 가는 줄 알았다.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며) 덜컥덜컥 가슴이 내려앉고, 너하고 살면 난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해.
[유경화] 걱정 마. 식사 후 바로 죽지는 않을게.
[남지인] 제발 부탁이야. 특히, 오늘밤엔 가만히 좀 있어 줘. 나 혼자 생각해볼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그래.
[유경화] 그 문제가 뭔데?
[남지인] 넌 몰라도 돼.
[유경화] (왈칵 수돗물을 틀며) 가르쳐줘야 가만있지!
[남지인] 사실은--- 방송국 일이야. 내가 맡은 육아상담 프로그램이 인기가 없어.
[유경화] (자기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며) 그럼 언니는 이거야?
[남지인] 그럴지도 몰라. 매번 라디오 청취율 조사를 하는데, 언제나 육아상담 프로그램이 최하위야. 그것 때문에 광고주들이 실망해서 자꾸만
떨어져 나가구, 광고주 없는 프로그램은 마침내 잘리게 돼.
[유 경화] 어떤 바보 같은 광고주들인지 참 오래도 참았네. 나 같으면 그따위 시시한 프로그램엔 벌써 돈줄을 끊었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남지인에게 다가온다.) 오, 언니! 굉장한 생각이 떠올랐어! 자살상담 프로그램 어때? 그걸 방송하면 전국 최고의 청취율을 기록할 거야!
[남지인] 넌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줘.
[유경화] 방송을 하면 내가 적극 도와줄게! 나는 자살 전문가야! 자살 상담에는 나만큼 유능한 사람도 찾기 힘들 거라구!
[남지인] 수도꼭지나 잠그렴! 개수대에 물 넘친다!


[장] 4장
(낮. 실내에는 아무도 없다. 탁자 위의 라디오가 켜진 채 경음악 연주를 들려준다. 사이. 초인종 소리가 몇 번 경음악 연주와 뒤섞여 들린다. 남지인, 열쇠로써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녀는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유경화가 보이지 않는 것에 당황한다.)
[남지인] 경화야? 경화야? (대답이 들리지 않자 화장실 문을 두드린다.) 경화야, 화장실에 있니? (살며시 문을 열어본다.) 없잖아? 라디오를 켜둔 채 어디로 갔지?
(남지인, 탁자로 가서 라디오를 끈다. 침묵. 유경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경화] 나 여기 있어, 언니.
[남지인] (소리나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다니며) 어디 있다구?
[유경화] 어디야.
[남지인] 어디? 
[유경화] 장롱 속에.
[남지인] (장롱으로 달려가며) 왜 그 속에 들어가 있지?
(남지인, 장롱 문을 열어젖힌다. 유경화가 웅크리고 앉아있다. 남지인은 그 모습에 놀란 표정이다.)
[유경화] 언니, 왜 벌써 집에 왔어?
[남지인] 왜--- 왔다니?
[유경화] 지금은 훤한 대낮이니깐, 언니는 방송국에 있어야 하잖아?
[남지인] 그런 너는 대낮에 왜 장롱 속엔 들어가 있니?
[유경화] 가끔씩은 이렇지, 뭐. 낮엔 햇빛이 강해서, 오히려 어두운 이런 곳이 좋아. 한창 멋진 공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언니가 돌아와서 산통 깨졌어.
[남지인] 무슨 공상이야. 또 자살할---?
[유경화] (웃으며) 언니도 참!
[남지인] 내 말이 맞지? 네 머리 속에는 자살할 생각밖에는 없어.
[유 경화] 그래, 자살을 생각할 때 가장 상상력이 풍부해져. 사람들은 죽음이 검정색인 줄 알지. 아주 새카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단순한 검정 색으로 말야. 하지만 언니, 자살의 죽음은 화려한 색깔이야. 그건 여러 가지 미묘하고 다채로운 색깔이라구.
[남지인] 얘, 그 속에서 나오기나 해.
[유 경화] 사람들은 바보야. 그 바보들은 죽음이란 아무 형태가 없는 줄 알지. 그러나 죽음은 정말 여러 가지 형태야. 특히 자살의 죽음은 너무 다양해. 우뚝 솟은 산처럼 장엄한 죽음이 있는가 하면, 깊은 바다처럼 심오한 죽음이 있어. 바보들은 그런 죽음의 풍경은 보지 못하고 아무 형태가 없다는 거야.
[남지인] 대낮에 내가 온 건, 경화야, 내가 너를 데리고 갈 데가 있어.
[유경화] 나를 어디로---?
[남지인] 방송국이지. 우리 방송국의 제작 부장님이 너를 만나고 싶데. 없어질 육아상담 프로그램 대신에 뭘해야 좋을 지 의논하다가, 내가 자살상담을 꺼냈거든. 그랬더니 흥미 있는 발상이라는 거야.
[유경화] 그게 내 머리 속에서 나왔다는 걸 말하지 그랬어?
[남지인] 물론이지. 그래서 제작부장님은 일단 너를 만나 보자는 거야.
[유경화] 자살 상담 자로서 내가 적임자라는 것도 말했겠지?
[남지인] 그럼, 그 말도 했지.
[유경화] 하지만--- 만나만 보자는 건 싫어. (장롱 문을 닫으며) 확실하게 자살상담 프로그램을 하겠다는 보장을 받아와. 그래야 난 방송국엘 가겠어.
[남지인] 어떻게 그런 보장부터 먼저 받니?
[유경화] 보장이 없으면 난 안가!
[남 지인] 무슨 일이 이렇게 됐지? 난 그냥 이야기를 꺼냈던 거야. 그런 프로그램이 꼭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반드시 네가 그 상담을 잘 할지도 모르겠어. (벽에 걸려 있는 전화기로 다가가며) 아예 없던 일로 해야겠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엔 나서지 않는 건데, 내가 너한테 홀렸던 모양이야.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린다.)
[유경화] (장롱 문을 열고 내다보며) 어디에 전화하는 거야, 언니?
[남지인] 방송국에
[유경화] 무슨 소릴 하려구?
[남지인] 제작부장님께 네가 못 간다구 해야지.
[유경화] (장롱 속에서 뛰어나오며) 난 갈 거야! 지금 곧 간다고 그래 줘!
[남지인] 부장님이세요? 죄송하지만---
[유경화] (전화기에 바짝 다가가서 커다란 목소리로) 곧 가서 뵙겠어요!
[남지인]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태도를 바꾸며) 아뇨, 부장님. 지금 갑니다.
[유경화] 잘했어, 언니!
[남지인] 난 널 데려가도 가만 입 다물고 있을 거다.
[유경화] 가만 입 다물고 있다니---?
[남지인] 난 자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난 그냥 제작부장님과 아이디어를 낸 너를 만나게 해주는 것뿐야. 그러니까 결국은 자살상담 프로그램을 할 지 안 할 지는 오직 너한테 달렸어.
[유경화] 언니도 옆에서 거들어 줘야지, 나 혼자만 떠들어대라는 거야?
[남지인] 넌 떠들면 안 돼. 차분차분하게, 너의 소신을 말해야 설득력이 있지.
[유 경화] 설득력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난 납득시킬 자신이 있어! 제작부장을 만나는 순간, 난 이런 질문을 던질 거야. "여보세요, 부장님.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죠? 아니 라고 부정하진 마세요. 부장님의 얼굴에 다 쓰여 있는 걸요!"
[남지인] 그럼 기가 막혀서 우리 부장님은 숨도 못 쉴 거다!
[유경화] 자살 중에서 가장 비참한 게 숨막혀 죽는 거야. "여보세요, 부장님. 제발 질식사는 하지 마세요. 내가 상담해 드릴 테니 안심하고 숨을 쉬시라구요." 그런데 언니, 나 뭘 입고 가지? 지금 입은 옷, 이런 보기 흉한 꼴로는 방송국에 갈 수 없잖아?
[남지인] 그 옷이 어때서 그래? 보기만 좋다.
[유경화] 아냐. 이 옷에는 약 먹고 토한 냄새가 나.
[남지인] 깨끗하게 세탁했는데---?
[유경화] 어서 백화점에 가서 새 옷을 사 입고 가야겠어!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며) 서둘러, 언니! 시간 없잖아!


[장] 5장
(저녁. 남지인과 유경화, 집으로 돌아온다. 유경화는 우아한 새 옷을 입고 여러 가지 장신구로써 화려하게 치장을 한 모습이다. 남지인은 지쳐서 피곤한 모습인데, 유경화는 매우 생기 있고 명랑한 모습이다.)
[남지인] 너한테는 질렸다, 질렸어!
[유경화] 뭘 가지고 그래, 언니?
[남지인] (조목조목 따지듯이 말한다.) 첫째, 너는 제작부장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곧 간다하면서 백화점에서 몇 시간이나 질질 끌다가 갔잖아!
[유경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그거야 이 우아한 옷을 고르느라고 그랬지.
[남지인] 둘째, 넌 옷만 샀던 게 아냐. 구두도 샀고, 핸드백도 샀어. 브로치, 귀걸이, 스카프, 그리고 향수, 립스틱, 거기에다 또 뭐를
샀더라--- 다 기억도 못하겠다.
[유경화] 언니도 참! 덜렁 옷만 입고 갈 수는 없잖아!
[남지인] 셋째, 너는 그 모든 물건값을 내 크레디트 카드로 치렀어.
[유경화] 응, 그건 염려 마. 방송국에서 봉급을 받으면 그것부터 갚아줄게.
[남지인] 봉급? 방송국이 왜 너에게 봉급을 주니?
[유경화] 그럼, 안주는 거야? 자살상담 프로그램엔 전혀 보수가 없어?
[남지인] 얘 좀 봐! 그런 프로그램이 생기지도 않을 텐데 넌 보수부터 받을 작정이구나?
[유경화] 제작부장님은 꼭 그 프로그램을 할 것 같던데---
[남지인] 면담은 완전히 실패야. 우리 부장님은 점잖은 분이라구. 그런데 만나자마자 넌 뭐라고 했어? 하루에 몇 번씩이나 죽고 싶냐고 물었잖아? 도대체, 내 체면도 있지, 넌 그럴 수가 있니?
[유 경화] (소파에 앉는다. 핸드백을 백화점에서 구입한 조그만 상자들을 꺼내 포장지를 벗긴다.) 이 진주 브로치, 앙증맞게 예쁘네! 난 이렇게 예쁜 걸 보면 죽고싶더라! (서 있는 남지인에게 다가가서) 언니 주려고 산 거야. 잘 어울리지?
[남지인] 네 말이 맞다. 이걸 보니깐 나도 죽고 싶다!
[유 경화] 언니는 너무 소심해서 탈이야. 내가 부장님과 이야기할 때 언니는 옆에서 바짝 긴장한 채 입을 꼭 다물고 있더라구. 하지만 면담은 아주 성공적이었어. 난 완전히 부장님을 사로잡았지. 인간이 갖고 있는 약점을, 난 정확하게 콱 찌른 거야. 인간의 약점이란 뭐냐--- 잠깐만, 언니. 나만 귀걸이를 사는 게 미안해서 언니 것도 하나 더 샀지. (또 다른 작은 상자의 포장지를 벗긴다.) 이 귀걸이, 너무 예쁘지? (남지인에게 귀걸이를 달아준다.) 난 너무 예쁜 걸 보면 당장 그 자리에서 죽고싶어!
[유경화] 엉뚱한 짓 말구, 인간의 약점이란 뭐야?
[남지인] 응,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고싶어 한다는 거야. 젊은 사람도, 늙은 사람도, 돈 많은 부자도, 가난한 빈자도, 높은 지위와
명 예로서 만민에게 추앙 받는 사람도, 온갖 경멸과 멸시를 받는 사람도, 그 모두가 죽고 싶은 때가 있는 법이라구. 언니는 립스틱의 색깔을 바꿔야 해. 지금 칠한 색깔은 꼭 시체에나 어울려. 내가 사온 이 진홍색을 발라봐. (핸드백에서 진홍색 립스틱을 꺼내 남지인의 입술에 칠해준다. 그리고 손거울을 남지인의 얼굴 앞에 내민다.) 어때? 언니는 이제야 살아있는 사람 같잖아?
[남지인] (거울을 손으로 밀치며) 너 말이야, 지금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그러지? 
[유경화] 무슨 관심을 어디로 돌려?
[남지인] 네가 부장님께 저지른 실수 말야! 부장님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까, 어찌나 너한테 큰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핏기하나 없이
창백해지더라!
[유 경화] 내가 장담하지만 언니, 난 전혀 실수한 게 없어. 부장님이 창백해진 건 내 말에 감동을 받아서 그런 거라구. 내일 아침 방송국에 가봐. 부장님이 언니를 불러서, 당장 자살상담 프로그램을 방송하자고 할 테니까. 솔직히 언니, 지금 내 기분은 최고야. 하늘까지 둥둥 뜬 기분 있잖아, 이건 확실한 성공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언니는 침통하고, 울적하지. 그건 언니가 사태를 잘 못 봐서 그래. 백화점에서 너무 시간이 걸렸다던가, 내가 옷만 사지 않고 여러 가지 물건들을 샀다던가, 더구나 언니의 크레디트 카드로 그 모든 걸 지불했던 게 신경 쓰여서, 정작 부장님과의 면담내용은 제대로 못 봤어. 결과적으로 언니는 눈에 거슬리는 작은 것만 보고, 진짜 핵심적인 큰 것은 못 본 거야.
[남지인] 난 다 봤다. 너는 줄곧 자살을 충동질하는 말만했지, 단 한마디도 자살을 반대하는 말은 안 했어. 심지어는 세네카인가 뭔가 하는 로마시대 철학자가 한 말이라면서, 장황하게 듣기 싫은 소릴 읊기까지 하더라.
[유 경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지. (들뜬 기분으로 실내를 거닐면서 암송한다.) "어리석은 이여, 그대 무엇을 탄식하고 두려워하는가? 그대가 둘러보는 곳 그 어디에서나 악의 종말이 보인다. 그대 입을 크게 벌린 절벽이 보이는가? 그것이 자유로 가는 길이다. 저 호수, 저 강, 저 우물이 보이는가? 그 안에 자유가 살고 있다. 저 발육이 정지된 말라비틀어진 초라한 나무가 보이는가? 그 가지 하나하나에 자유가 달려있다. 그대의 목, 그대의 목구멍, 그대의 심장, 그 모두가 예속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길이다. 그대, 자유로 가는 길을 묻고 있는가? 그대 몸 속의 핏줄 하나하나에서 그대는 자유를 찾을 수 있으리." 내가 이걸 암송하는 동안 부장님은 침묵을 지켰어. 그리고는 마침내, 얼굴이 백납처럼 창백해졌던 거지. 만약에 언니, 내가 구차스럽게 자살을 비난하는 주장만 늘어놓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 반응은 분명히, 무 덤덤했거나 시큰둥했을 거라구.
[남지인] 그럼 너는 일부러 자살을 옹호하는 말만 골라 했다는 거야?
[유 경화] 이제야 조금 감을 잡는군, 언니, 아주 의도적으로, 치밀하게, 난 제작부장님을 자극한 거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죽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건드리면서, 내가 바라는 목표를 향해 곧장 다가간 거지. 그래서 부장님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어. 언니, 두고봐. 부장님 자신이 스스로 목을 메달 용기가 없다면, 반드시 나에게 살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할 테니 두고 보라구.
[남지인] (유경화가 달아준 브로치와 귀걸이를 떼 내어 탁자 위에 놓고 소파에 반듯하게 드러눕는다.) 나 좀 누어야겠다. 머리도 아프고, 굉장히 피곤해.
[유경화] 나는 기분 좋고 즐거운데!
[남지인] 너하고 나는 근본적으로 뭐가 다른 모양이야.
[유경화] 다를 게 없어, 언니. 내가 느끼는 걸 언니도 느끼고, 언니가 느끼는 걸 나도 느껴.
[남 지인] 아냐. 우린 같은 자리에서 같은 걸 봤는데 전혀 다르게 생각하잖니? 얼굴이 납처럼 창백해진 부장님은 더 이상 네 말을 듣지 못하겠다는 듯 뛰쳐나가셨어. 의례적으로나마 다시 보자던가, 잘 가라든가 그런 인사말도 안하고 나가신 거야.
[유경화] 곧 다시 볼 사람에게 그런 의례적인 말이 필요 없거든. (소파에 누워있는 남지인 곁으로 다가와서 바닥에 앉는다.) 언니, 우리 다투지 말아. 누가 옳게 봤는지는 곧 판명날 거야.
[남지인] 경화야, 너 여기 온 지 며칠이나 됐지?
[유경화] 글쎄--- 겨우 사나흘쯤 됐나---
[남지인] 그런데도 몇 년이나 된 것 같다. 내 울타리는 흔적도 없고--- 난 네가 온 날부터 침대를 빼앗기고 이 소파에서만 잤어.
[유경화] 침대는 언니가 양보했지, 내가 빼앗은 게 아냐.
[남지인] (침묵한다.)
[유경화] 잘 거야, 벌써?
[남지인] 응.
[유경화] 저녁밥도 안 먹고?
[남지인] 너 혼자 먹어.
[유경화] (남지인의 손을 잡는다.) 언니, 일어나!
[남지인]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
[유경화] (남지인의 손가락을 펴서 바라본다.) 언니 손에는 매니큐어도 안 했네!
[남지인] (놀란 듯 눈을 뜨며) 너, 또 뭘 칠해 줄려구?
[유경화] 아무 색도 안 칠한 걸 보면 이상해서 그렇지! 언니, 살아있는 걸 봐. 산 것들은 모두 아름답게 색깔을 칠했다구.
[남지인] 죽은 것에만 얼룩덜룩 색을 칠하던데? 산 것들은 아무 색을 안 칠해도 아름다워.
[유경화] 언니는 오늘 심사가 뒤틀렸어. 내 말이라면 무조건 반대를 하구--- 눈을 꼭 감고 가만히 누워있어. 그럼 내가 언니 손톱마다 예쁘게 색칠해줄게. 백화점에서 보라색 매니큐어도 샀고, 빨강색, 초록색, 분홍색도 샀어.
[남지인]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며 유경화에게 잡힌 손을 빼낸다.) 싫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앉아 있을 테니까 내 손톱엔 색칠하지 마!
(벽에 걸린 전화기의 벨이 울린다. 꼿꼿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지인과 토라진 모습의 유경화는, 서로에게 전화 받기를 미룬다.)
[유경화] 언니, 전화 좀 받어!
[남지인] 나한테는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 없다.
[유 경화] 도대체 누구야! 안 받으면 그만 끊지, 어떤 미친놈이 저렇게 끈질겨! (일어나서 전화기 있는 곳으로 간다.) 그래, 하마야! 그 하마 같은 인간이 날 찾는 거야. (벽에 걸린 전화기를 떼어내 기다랗게 전화선을 끌고 와서 남지인에게 내밀며) 언니, 나 없다고 해줘!
[남지인] 네가 직접 말해.
[유경화] (남지인의 손에 전화기를 쥐어준다.) 없다고 하라니까!
(남지인, 마지못해 통화한다.)
[남지인] 누굴 찾으시죠?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 긴장하는 태도가 된다.) 아, 저예요. 바로 저라구요.
[유경화] 그거 참 신기하네! 하마가 언니를 찾아?
[남지인] 쉿, 부장님이야!
[유경화] 부장님? 방송국의--?
[남지인] 굉장히 취하셨군요, 부장님.
[유경화] 지금 어디냐고 물어봐.
[남지인] 지금 계신 곳이 어디예요?
(유경화, 전화기 본체에 내장된 스피커를 작동시킨다. 몹시 울적한 중년남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서 들린다.)
[제작부장]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소. 어느 길거리의 술집인데--- 혼자서 술을 마셨지.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고는--- 난 생각하고, 생각해봤는데, 정말 살고싶다는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
[남지인] (당황하며) 그래도 살아야--- 사셔야 해요.
[제작부장] 아니, 난 지금 당장 내 목숨을 끊어야겠소!
[유경화] (남지인에게 수화기를 빼앗아든다.) 무엇 때문에 자살하려는 거죠?
[제작부장] 내 아들이 죽었거든! 단 하나뿐인 내 아들--- 내 미래--- 내 희망--- 너무나 잘 생겼고, 머리도 좋았지. 그런데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불쌍하게도--- 다리 난간을 부수고--- 강물 속으로 떨어졌소--- 난 아무에게도 그놈이 죽었다는 말은 안 했어! 아니,
못했지! 차마 할 수가--- 말할 수가 없었던 거요. 가족이나 친척에게도 그놈이 죽었다는 말은 일체 못하게 하고, 그 놈이 입던 옷과 쓰던
물건은 지금까지 고스란히 간직해뒀소!
[유경화] (남지인에게) 언니도 몰랐었어?
[남지인] 나도 처음 들어. 정말 안됐구나.
[유 경화] (수화기에 대고 제작부장에게 말한다.) 참 슬픈 일을 당하셨군요. 그런 때는 슬픔을 억제하면 안돼요. 오히려 사람들마다 붙잡고 자기가 얼마나 슬픈지를 말해주세요. 그렇게 자꾸만 말해서 슬픈 감정을 풀어내셔야죠. 그렇지 않으면 부장님, 부장님은 꽉 막힌 슬픔 때문에 죽게 돼요!
[제작부장] 차라리 나는 죽는 게 낫소. 내 아들이 죽은 날부터, 단 하루도 나는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는 날이 없었소. (낮게 흐느껴 우는 소리가 말과 함께 섞여 들린다.) 때때로 나는 그놈이 죽은 다리에 가서, 그놈이 가라앉은 저 깊고 어두운 물 속을 들여다보면서--- 나 역시 난간 아래로 떨어지면 된다고--- 그럼, 고통이 끝나는 거라고 생각하였소---
[유경화] 좀 더 크게 흐느껴 우세요, 부장님. 될 수 있다면 실컷 통곡하며 우시는 게 좋아요.
[남지인]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니?
[유 경화] 마음 후련하게 실컷 울고 나면 생각이 달라져요. 그리고 사람들도 부장님의 울음으로 슬픔을 알게 되고, 그럼 그들은 부장님을 따뜻하게 위로해 드릴 테구요. 그럼 차츰차츰 자살하고 싶다는 감정이 사라지면서, 점점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생겨날 거예요. 부장님, 제 말을 듣고 계시죠?
[제작부장] 듣고 있소.
[유경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집에 가셔서 가족들과 함께 마음껏 슬퍼하세요. 가족들도 울지 못하게 막아두셨다니, 가족들 역시 괴로워서 죽고 싶었을 거예요.
[제작부장] 고맙소, 정말. 당신과 전화하길 참 잘했구려. 아, 그리고 그 자살상담 프로그램 있잖소, 꼭 방송하기로 합시다!
(유경화, 전화기를 벽에 걸어 놓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남지인 옆에 와서 앉는다.)
[유경화] 언니, 그냥 이렇게 앉아 있을 거야?
[남지인] 그럼, 앉아있지 않구?
[유경화] 배고프지 않아? 저녁도 안 먹었는데?
[남지인] 부장님 걱정 때문에 밥 먹을 생각도 없다.
[유경화] 신경 쓸 거 없어. 부장님은 이제 자살하지 않을 테니까.
[남지인] 그런데 너, 정말 상담을 잘하더라!
[유경화] 보통인데 뭘.
[남지인] 아냐, 아냐, 너를 다시 봐야겠어!
[유경화] 이제야 내 실력을 인정해 주는군. (남지인을 일으켜 세우며) 언니, 일어나! 우리 어디 고급 식당에 가서 비싼 걸로 잔뜩 먹자구! [남지인] 얘 좀 봐. 돈은 누가 내고?
[유경화] 언니 크레디트 카드 있잖아! 우선 쓰고, 내가 나중에 다 갚아줄게!


[장] 6장
(낮. 라디오 방송국의 방송실. 두터운 방음 유리로써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방음 유리 안쪽에는 유경화가 마이크 앞에 앉아 있으며, 바깥쪽에는 프로듀서인 남지인이 방송을 진행시키고 있다. 「방송중」이라는 전광판에 불이 켜지면서 시그널 뮤직이 들린다.)
[아나운서 멘트] 자살상담시간입니다. 상담에는 오늘도 유경화 선생님이 수고하고 계십니다.
[남지인] (유경화에게 시작하라는 수신호를 보낸다.)
[유 경화]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 유경화에요.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문이 있어요. 들어오는 문, 그러니까 태어날 때 들어오는 출생의 문이 있고요, 죽을 때 나가는 문, 즉 죽음의 문이 있어요.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태어나지 못하죠. 하지만 죽음의 문은 달라요. 그 문이 열려서 인간을 내보낼 때도 있지만, 인간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갈 때가 있는 거죠. 그렇게 자신의 의지로써 문을 열고 나가는 경우를 우리는 자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갈 필요가 있을까요? 방안의 답답한 공기를 바꾸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이 창문을 열기만 해도 돼요. 자, 여러분, 창문을 활짝 엽시다. 그리고 신선한 공기를 들여 마시면서 저하고 상담하세요. 자살상담 번호는 887에 1001번부터 1005번까지입니다. 주저 말고 전화 주세요.
(음악, 짧게 삽입된다. 남지인은 유경화에게 시작이 잘 됐다는 만족의 표시를 방음 유리 너머로 보낸다. 남지인의 앞에 놓인 전화 접속장치에 불빛이 깜박인다. 남지인, 유경화에게 전화를 연결한다,)
[유경화] 1002번 전화 받습니다. 말씀하세요.
[한 여자] (격앙된 어조로) 죽고 싶어요! 죽고 싶어요! 난 죽고 싶어요!
[유경화] 아, 진정하세요. 차분차분하게, 죽고 싶으신 이유를 말씀해보세요.
[한 여자] 내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요. 완전히 나를 속이고 바람을 피웠다구요 알고 보니까 그것도 한두 번이 아녜요. 심지어 다른 여자한테서 애까지 낳았더라구요!
[유경화] 네, 그래서요.
[한 여자] 그애를요, 우리 집으로 데려왔는데요, 죽이고 싶도록 밉더라구요. 하지만 더 심각한거는요, 내가 직접 낳은 자식들이에요. 내 자식들 역시 미운 거예요. 남편이 짐승처럼 생각된 다음부터, 남편과 나 사이에 낳은 자식마저 짐승처럼 징그럽고, 흉측하고, 끔찍해요! 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돼,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요, 소용없어요. 저런 흉측한 짐승새끼들을 기르면서 사느니, 차라리 괴롭지나 않게 내가 죽자, 나 스스로 내 목숨을--- 끊어버리자, 이렇게 결론을 내렸어요!
[유경화] 정말 심각한 문제군요. 남편의 부정행위가 얼마나 아내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는지, 남자들은 잘 몰라요.
[한 여자] 그래요. 내 남편은 더러운 짐승이에요!
[유 경화] 인간이 짐승과 함께 산다는 건 괴로운 일이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아내도 남편처럼 짐승의 차원으로 떨어지는 방법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아예 천사의 차원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지금처럼 그냥 인간의 차원에서 머물러 있으면 고통 때문에 결국은 자살하고 맙니다. 하지만 똑같은 짐승이 되면 마음이 편해지고, 천사가 되면 짐승을 초월할 수 있어요.
[한 여자] 천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죠?
[유경화] 스스로 자꾸만 정신적으로 승화시키세요. 종교를 갖고 계시다면 열심히 믿고, 안 갖고 계시면 어떤 신이든 믿으세요. 신은 인간을 반드시 천사의 위치로 끌어올려 주실 거예요. 그리고 예술에도 관심을 쏟으세요. 음악, 연극, 그림과 조각 등에 관심을 기울이면 정신적 승화에 대단히 효과가 있어요. 우선 자살을 보류하시고 천사가 되는 방법을 써보세요,
[한 여자] 네, 말씀 고마워요!
(남지인, 또 다른 전화를 유경화에게 연결해 준다. 유경화는 염려 말라는 몸짓을 해 보이며 전화를 받는다.)
[유경화] 말씀하세요.
[노파] (가래 끓는 쉰 목소리가 들린다.) 여 봐, 난 임자가 뭐라고 해도 죽을 거야.
[유경화] 뭐 때문에 그러시죠?
[노파] 뭐 때문이라니--- 죽을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유경화] 혹시, 나이 많으신 분인가요?
[노파] 그래, 난 늙었다! 지금 연탄불을 방안에 피워놨어. 창문은 꼭꼭 닫았지. 그리고 라디오를 틀어놓고, 마지막 죽는다고 전화하는 거야.
[남지인] (걱정스런 태도가 되어 안절부절 하지 못한다.)
[유경화] 거기가 어디죠?
[노파] 신설동--- 아니, 마장동--- 그런 건 알 거 없어!
[유경화] 좋아요, 할머니! 할머니가 원하시는 건 자살이군요. 하지만 자살이 자살로서 인정받으려면 증거가 필요해요. 뚜렷한 증거도 없이 죽으면요, 할머니는 그냥 돌아가신 것이지 자살은 아니거든요.
[노파]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유 경화] 생각해 보세요, 할머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방안에 연탄불을 피워 놓고 창문을 꼭꼭 닫겠어요? 그건 노망해서,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저질러진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럼 할머니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정신착란에 의한 것이어서 아무 효과도 없고, 아무 소용도 없어요.
[노파] 난 멀쩡한 제 정신으로 자결해야 해! 그래야 그년이나를 얼마나 서럽게 구박했는지 가족들 모두가 알게 될 거야!
[유경화] 누가 할머니를 서럽게 했죠?
[노파] 며느리지, 뭐!
[유경화] 며느리가요?
[노파] 그래, 그년이 나더러 개만큼도 쓸모가 없다고 했어! 개는 집이라도 잘 지키는데 나는 집도 못 지킨다는 거야!
[유경화] 아, 집에 도둑이 들어왔었군요?
[노파] 밤엔 도둑이 안 와. 꼭 나 혼자 집 지키는 낮에만 오지. 그래도 그렇지, 시어미를 개만도 못하다니, 그런 몹쓸 년이 어디 있어! 나
죽는 꼴을 봐야 그년은 울고 불면서 자기 잘못을 뉘우칠 거라구!
[유경화] 할머니, 당장 창문을 여세요!
[노파] 창문을 열어---? 그랬다간 또 도둑이 들어올 텐데?
[유경화] 또 도둑이 들어오면요, 그때는 밖에서 창문을 잠가버리세요.
[노파] 밖에서 잠궈 버려---?
[유경화] 네, 할머니. 도둑을 잡으면, 이번에는 며느리가 할머니를 칭찬해 줄 거예요.
[노파] 그렇구만, 임자! 왜 내가 그걸 생각 못했지?
[유경화] 칭찬 받고 싶거든 죽으면 안돼요, 사셔야지. 어서 창문을 열어요!
[노파] 그래, 그래! 당장 창문을 열께!
(남지인,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 유경화는 여유 있게 미소를 짓는다. 또 다른 전화가 연결된다.)
[유경화] 1004번 전화, 연결됐습니다.
[중년남자] (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는 제주도, 파라다이스 호텔입니다.
[유경화] 나도 그 호텔에 가봤어요. 바닷가의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에, 스페인 식의 이국적인 건물이죠.
[중 년남자] 그래요, 이름 그대로 여기는 낙원입니다. 나는 이 호텔에서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했습니다. 아, 자살하기에 참 멋진 곳이구나, 그런 감탄이죠! 난 조금 전에 내 방으로 커피를 가져오도록 시켰고, 그 커피에 한 스푼의 독약을 탔습니다.
[유경화] 어떤 종류의 독약인데요?
[중년남자] 나는 사업상 외국 여행을 자주 다닙니다. 내가 지금 마시려고 하는 이 독약은 방콕에서 산 것입니다. 잔뜩 독이 오른 코브라의 침샘에서 뽑아낸 것인데, 아침 이슬처럼 투명합니다.
[유경화] 그럼, 한 방울만 먹어도 죽겠군요?
[중년남자] 그렇습니다.
[유경화] 값도 엄청나게 비싸겠죠?
[중년남자] 네, 보석보다 비쌉니다.
[유 경화] 그걸, 한 스푼이나 먹는다는 건 지나친 낭비가 아닐까요? 바닷가의 아름다운 경치에 스페인식 최고급 호텔, 그리고 보석보다 더 값비싼 독약--- 당신을 둘러싼 이 아름답고 화려한 풍경에 비하면, 당신 마음속의 풍경은 어떤가요? 분명히, 당신 내부의 풍경은 쓸쓸하고 삭막할 테죠?
[중년남자] 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내 마음속의 풍경은 쓸쓸하고 삭막합니다.
[유경화] 그래요, 자살은 인간 내부의 풍경과 외부의 풍경이 어긋날 때 하게 됩니다. 밖은 아름답고 화려한데 안은 쓸쓸하고 삭막할 때, 그 엄청난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여 죽고 마는 거죠.
[중년남자] 하지만 뭐라고 할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내 마음속의 삭막한 풍경은 바꿔지지가 않습니다.
[유 경화] 그렇다면 외부의 풍경을 바꿔보시죠. 일부러 경치 좋은 곳만 골라 다니며 죽겠다 마시고, 알래스카의 황량한 얼음 벌판이라든가, 오직 모래뿐인 사하라 사막을 구경 다니세요. 그럼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 숨어있던 아름다움이 눈에 뜨이겠죠. 그걸 소중하게 키우세요. 처음엔 보잘것없고 조그맣던 것이, 나중엔 우람한 나무처럼 자라날 거예요. 가지들이 사방으로 뻗고, 파릇파릇 잎새들이 돋아나고, 그리고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면 온갖 귀여운 새들이 날아와 지저귈 테죠. 그때 당신은 나에게 다시 한번 전화해 주세요. 값비싼 독약을 팔아서 포도주를 샀는데, 그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생명의 은인인 나를 위해 건배중이라구요. 아시겠죠, 내가 드린 충고를?
[중년남자] 알겠습니다. 당장 알래스카 행 비행기 표를 예약하죠!


[장] 7장
(저녁. 남지인과 유경화가 들어온다. 유경화는 큼직한 종이가방에 가득 담겨있는 엽서와 편지들을 탁자 위에 쏟아놓는다.)
[유경화] 언니, 이것 좀 봐!
[남지인] 방송국에 두지 않고 넌 또 그걸 집에까지 가져왔니?
[유 경화] 날마다 수많은 편지와 엽서들이 오고 있어! (손에 집히는 대로 주워들고 빠르게 읽는다.) 생명의 은인께 감사합니다, 경주 김순철. 자살상담 프로그램 감명 깊게 듣고 있어요, 안양 이정자. 꼭 한 번 뵙고싶습니다, 인천 박상훈. 방송 안 듣고는 못살겠어요, 압구정동 조경숙---
[남지인] 너, 그 많은 걸 다 읽을 거야?
[유경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합니다, 광주 최기춘. 우리 협회의 명예회장님으로 모시고자 하오니--- 별게 다 있네! 자살상담 애청자 클럽을 만들었어요, 대구 허경숙. 목소리가 참 아름답습니다, 부산 안수경---
[남지인] 그만 하렴.
[유경화] 재미있잖아, 언니!
[남지인] 인기란 허망한 거야. 하루아침에 생긴 인기는 하루 저녁에 사라져.
[유경화] 내 인기는 안 그래. 영원할 거야!
[남지인] 물론 영원해야지! (핸드백에서 릴테이프를 꺼내면서) 방송국에서 녹음된 테이프를 빌려왔어. 우리가 오늘 방송한 내용을 검토해 보려구.
(장롱 문을 열고 릴테이프용 녹음기를 꺼내온다.) 탁자 위의 그 편지와 엽서들 좀 치어주겠니?
[유경화] (편지와 엽서들을 종이 봉투에 쓸어 담으며) 오늘 방송에 무슨 실수가 있었어?
[남지인]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남지인, 녹음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릴테이프를 건다. 작동 스위치를 누르자 릴테이프가 돌아가면서 방송 내용이 재생되어 들린다.)
[노파] 그래, 그년이 나더러 개만큼도 쓸모가 없다고 그랬어. 개는 집이라도 잘 지키는데 나는 집도 못 지킨다는 거야!
[유경화] 아, 집에 도둑이 들어왔었군요?
[노파] 밤엔 도둑이 안 와. 꼭 나 혼자 집 지키는 낮에만 오지. 그래도 그렇지, 시어미를 개만도 못하다니, 그런 몹쓸 년이 어디 있어! 나
죽는 꼴을 봐야 그년은 울고 불면서 자기 잘못을 뉘우칠 거라구!
[남지인] (멈춤 스위치를 누른다.) 바로 이런 점이 문제야.
[유경화] 글쎄, 난 아무 문제도 못 느끼겠는데?
[남지인] 방송으론 적합한 말들이 아냐. 사석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들도 공적인 방송에서는 해선 안 되는 게 있어. 시어미를 개만도 못하다든가, 나 죽는 꼴을 봐야 그년은 뉘우칠 거라든가, 너무 말들이 거칠고 지나쳐.
[유경화] 하지만 언니,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잖아? 난 점잖고 품위 있게 말했어.
(남지인, 녹음기를 작동시켜 테이프를 앞부분으로 되돌린다. 녹음기에서 유경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유경화] 인간이 짐승과 함께 산다는 건 괴로운 일이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아내도 남편처럼 짐승의 차원으로 떨어지는 방법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남지인] (멈춤 스위치를 누른다.) 들었지? 이걸 점잖다고는 할 수 없잖니?
[유경화] (짜증스럽게) 언니, 이건 자살상담 방송이야. 자살하겠다는 사람이 물 불 안 가리니까, 나도 자연히 심하게 말할 때가 있다구!
[남지인] 그래, 나도 그건 알아. 하지만 방송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유경화] 언니는 너무 과민해서 탈이야!
[남지인] 더구나 생방송은 위험해. 한번 방송으로 나간 말들을 고칠 수도 없고 취소할 수도 없어.
(남지인, 녹음 테이프를 뒤로 돌린다. 유경화의 중년남자의 상담 내용이 재생된다.)
[유경화] 그럼, 한 방울만 먹어도 죽겠군요?
[중년남자] 그렇습니다.
[유경화] 값도 엄청나게 비싸겠죠?
[중년남자] 네, 보석보다 비쌉니다.
[유 경화] 그걸, 한 스푼이나 먹는다는 건 지나친 낭비가 아닐까요? 바닷가의 아름다운 경치에 스페인식 최고급 호텔, 그리고 보석보다 더 값비싼 독약--- 당신을 둘러싼 이 아름답고 화려한 풍경에 비하면, 당신 마음 속의 풍경은 어떤가요? 분명히, 당신 내부의 풍경은 쓸쓸하고 삭막할 거예요.
[중년남자] 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내 마음 속의 풍경은 쓸쓸하고 삭막합니다.
(남지인, 녹음기의 멈춤 스위치를 누른다.)
[남지인] 이 남자에겐 진심이 없어.
[유경화] 진심이 없다니?
[남지인] 일부러 꾸민 듯한 목소리야.
[유경화] 언니도 참! 이젠 별 걸 다 트집 잡네!
[남지인] 난 경험이 있어서 그래. 오랫동안 상담 프로그램만 맡아왔잖니.
[유경화] 어린애 상담이었어. 지금까지 언니 했던 건! 젖을 언제 먹여야 하느냐, 똥은 언제 싸게 하느냐, 그 따위 유치한 상담경험으로 어른들의 자살상담을 평가해선 안 돼!
[남지인] (차분한 태도로써 타이른다.) 평가는 똑같은 거야, 그게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보다 나은 내용이 되기 위해 방송한 걸 반드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거라구.
[유 경화] 무슨 그럴 필요가 있어? 지금 굉장히 잘 되고 있는 걸! 라디오 청취율 조사에서 자살 상담 프로그램이 전국 최고를 차지할 거구, 난 일약 유명 인사가 될 거야! 두고 봐, 영화 텔레비젼의 스타도 내 인기를 따라오진 못할 테니깐!
[남지인] 상담이란 내용이 중요하지, 인기가 중요한 건 아니야. (녹음기를 가리키며) 녹음된 걸 반복해서 들어봐. 그럼 뭘 고쳐야 하는지 알게 돼.
[유경화] 이걸 지겹게 또 들으라는 거야?
[남지인] 경화야, 너 자신을 위해 들어.
[유경화] 언니가 직접 말해 줘. 내가 뭘 고쳐야 해?
[남지인] 넌 상대방에게 이끌려 들어가는 버릇이 있어.
[유경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며) 이끌려 들어간다---.
[남지인] 너무 지나치게 상대방의 반응을 의식하기 때문이야. 냉정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다뤄. 그렇지 않으면 흥분한 상대방의 감정에 이끌리게 되고, 더구나 거짓으로 꾸민 상담은 가려낼 수가 없어.
[유경화] 언니, 좋은 충고야. 냉정하도록 조심할게.
[남지인] (탁자 옆의 종이 봉투를 가리키며) 우선 저런 편지와 엽서에 관심 쓰지 말어. 오직 상담에만 전념해야지, 인기에 관심을 갖게되면 마음이 흔들려.
[유경화] (다시 짜증스럽게) 옳은 지적이야, 언니.
[남지인] 가만 보니깐, 너는 편지와 엽서마다 꼬박꼬박 답장을 쓰더라.
[유경화] 고맙다는 인사지 뭐, 간단한 거야.
[남지인] 그리고 너는 방송국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잖아.
[유경화] 그럼 왔는데 안 만나고 보내?
[남지인] 그렇다면 전화는?
[유경화] 전화---?
[남지인] 그래, 전화!
[유경화] 음, 그건--- 언니도 알잖아? 방송상담으론 부족하다면서 집으로 걸려온 전화들인데---
[남지인] 그런 건 거절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니?
[유경화] 나도 거절했어.
[남지인] 하지만 넌 그들 전화번호를 적어놓던데?
[유경화] 내가--- 뭘 적어?
[남지인] (소파에서 일어나 전화기 옆에 걸려 있는 메모판으로 가서) 여기 이렇게, 전화기 옆 메모판에 잔뜩 써놨잖아?
[유경화] 아, 난 또 뭐라구! 그건 낙서야, 언니!
[남지인] 낙서---?
[유 경화] 그냥 딱 잘라 거절할 순 없잖아. 나중에 전화해 주겠다고 하면서 번호를 받아쓴 거지. 하지만 언니, 오해마. 난 절대로 그들에게 전화한 적 없어. (다른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리면서) 그런데 이상하지? 어떻게들 집 전화번호는 아는 지 몰라! 방송국에서도 가르쳐주진 않을 텐데, 무슨 방법으로 알아내는지 기가 막혀 죽겠어!
(전화기의 벨이 울린다. 유경화, 재빨리 뛰어가서 수화기를 든다.)
[유 경화] 네, 바로 난데요--- 낮에 상담했던 사람이라구요? 지금은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어요. 전화번호를 말씀해 주시면, 혹시 시간아 날 때 걸어드리죠. (메모판에 상대방이 불러주는 번호를 받아 적은 다음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남지인을 바라보며 말한다.) 인기란 언니, 귀찮기도 하지만 좋기도 한 거야!


[장] 8장
(저녁. 유경화,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다. 현관문으로부터 침대까지 남자의 구두, 양말, 윗저고리, 와이셔츠, 넥타이, 바지 등이 급히 벗은 흔적을 남기듯이 줄지어 놓여 있다. 현관문이 열리며 장바구니를 든 남지인이 들어온다. 그녀는 문이 잠겨있지 않은 상태가 마음에 걸리는 태도이다.)
[남지인] 이상하다. 문이 열려 있어---
[유경화] 이제 와, 언니?
[남지인] 너 들어올 때 문 안 잠갔구나?
[유경화] 아마 그런 모양이지, 급해서.
[남지인] 급해도 그렇지! 꼭꼭 문은 잠그렴!
(남 지인, 현관문 앞에 벗겨져 있는 남자 구두를 발견한다. 그녀의 시선이 남자가 벗어놓은 옷들을 따라 옮겨가서 침대까지 이른다. 남지인은 놀라서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떨어뜨린다. 유경화, 침대에서 내려와 장바구니로부터 쏟아진 채소와 생선을 주워 담는다.)
[유경화] 놀랠 것 없어, 언니. 언니랑 둘이서 함께 오다가, 언니는 저녁거릴 산다고 슈퍼에 갔었잖아. 그래서 나 혼자 집에 왔는데, 어떤
남자가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어.
[남지인] 어떤--- 남자인데?
[유경화] 몰라. 나도 처음 보는 사람이야.
[남지인] 처음 보는 사람을 집 안에 들여놓아?
(화장실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들린다.)
[남지인] 저건 무슨 소리지?
[유경화] 그 남자가 샤워하는 소리지, 뭐. 성질 급한 남자는 여자하구 그걸 하고 나서 금방 몸을 씻거든.
[남지인] 너, 미쳤구나---?
[유경화] 언니는 오늘 저녁 생선 요리를 할 모양이지? (화장실 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묻는다.) 저녁까지 먹고 갈 거예요? 아니면 그냥 갈 거예요?
[남지인] (유경화의 손목을 붙잡아 식탁 쪽으로 끌고 가서) 당장 내보내! 어서! 어서!
[유 경화] 나도 사실은 놀랬어. 글쎄, 저 남자가 방송국으로 자살 상담을 하려고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는데, 그때마다 통화중이거나 혼선이었다는 군. 신경질은 머리끝까지 뻗쳐오르고 뭔가 가만있다간 꼭 자살할 것 같더래. 그래서 무작정 나를 만나러 왔다는 거야.
[남지인] 그럼 만났으면 돌려보내야지, 왜 집안엔 끌어들여?
[유경화] 얼굴을 처음 본 순간에, 이 남자는 살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남지인] 살려줘---?
[유경화] 음. 그냥 되돌려 보냈다간 죽겠더라구.
[남지인] 도대체 넌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유 경화] 살려는 줘야겠는데, 무슨 좋은 방법이 떠오르질 않잖아. 더구나 급한 사람 붙잡고 이러쿵저러쿵 길게 늘어놓을 수도 없고--- 그래서 극약 처방을 한 거지. "벗어요!" 그랬더니 옷을 벗기에, "침대로 올라가요!" 그랬지. 그런데 언니, 병원이나 여기나 환자가 옷 벗고 침대에 올라가는 건 똑 같잖아! 어쨌든, 저 남자는 살았어! 이젠 죽을 고비를 넘긴 거라구! 언니, 얼마를 청구할까? 사람 목숨을 살려줬으니깐 꽤 비싸게 청구해도 되겠지?
[남지인] 듣기 싫어! 어서 그냥 내보내!
[유 경화] 하긴, 생명을 살려주는 고귀한 일을 했는데, 야박하게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지. 부처님도 예수님도 그래, 위대한 스승들은 인간을 거저로 고쳐줬지 돈 받은 적 없잖아. (화장실로 다가가서 문을 두드리며) 이봐요, 생선 요리 좋아해요? 이왕이면 저녁가지 먹고 가세요!
[남지인] 난 저녁밥 안 해!
[유경화] 언니---
[남지인] 네가 해서 먹이렴! 난 안 해!
[유경화] (남지인에게 다가오며) 언니, 그건 이기주의야! 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몸도 주는데, 언니는 밥 한 그릇도 못 줘?
[남지인] 나더러 이기주의자라구---?
[유경화] 그래, 수천 마디 말보다는 단 한번의 행동이 더 값진 거야. 오늘 방송으로, 자살하지 말라고 떠든 것 보다 난 저 남자에게 해준 것이 더 기분 좋아.
[남지인] 너--- 저 사람 이름이나 알고 있어?
[유경화] 몰라.
[남지인] 주소는?
[유경화] 이름도 모르는데 주소는 어떻게 알아?
[남지인] 그럼, 직업도 모르겠구나?
[유경화] 언니, 난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아. 내가 지금 궁금한 건 저 남자의 이름, 주소, 직업이 아냐.
[남지인] 네가 알고 싶은 게 뭔데?
[유경화] 저 남자의 사랑이지. 그러니까 저 남자가 진짜로 나를 사랑해서 함께 잤느냐, 아니면 사랑하지 않고서 그냥 잤느냐, 그게 궁금한 거야 언니도 그건 알고 싶지?
[남지인] (고개를 저으며) 아냐, 아냐! 난 단순히 저 남자의 이름, 주소, 직업을 알고 싶어!
[유경화] 그렇다면 실망인데---
[남지인] 뭘 실망이야?
[유 경화] 언니의 고지식한 태도에 실망했다구. 언니는 먼저 나에게 저 남자를 사랑하는지 물었어야 했고, 다음에는 정중히 저 남자를 식탁에 초대해서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봐야 했어. 그런데 언니는 이름과 주소 따위만 물었고, 정말 중요한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남지인] 그럼 묻겠다. 넌 저 남자를 사랑하니?
[유경화] 아니
[남지인] 그것 봐라! 내가 물을 필요도 없잖아!
[유 경화] 하지만 언니, 우리가 맛있는 생선 요리를 먹으면서 점잖게 미소지은 얼굴로 묻고 대답했다면 좋았을 거야. 그럼 비록 사랑이 없이도 사람 목숨을 살려줄 수 있다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 보다 더 욱 아름답고 고귀하게 보였을 거라구. (실내에 흩어져 있는 남자의 구두, 양말, 옷들을 주워 모아 화장실 문 앞에 놓는다.) 여봐요, 샤워 다 했어요? 유감이지만 그냥 굶고 가세요!
[남지인] 얘, 경화야! 발가벗고 나오면 어떻게 하니?
[유경화] 언니, 눈을 감아.
[남지인] 눈을---?
[유경화] 언니가 꼭꼭 눈을 감으면 안 보여.
남지인] (눈을 감고 뒤돌아 서서) 그래. 나, 눈감았다!
(유경화, 남자의 옷과 구두 등을 집어서, 현관문을 열고 밖에 내던진다. 그리고 "안녕히 가세요!"라고 커다란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한다.)
[남지인] 이젠 갔니?
[유경화] (현관문을 소리나게 닫으며) 응, 갔어.
[남지인] (감았던 눈을 뜬다) 그런데 그 남자, 소문을 내면 어떻게 하니? 너하고 잤다는 소문이 퍼지면 이 세상 자살할 남자들은 모두
몰려오겠다.
[유경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남지인] 너, 미쳤구나!
[유 경화] 난 남자들이 몰려 와야 안 미쳐. 아주 멋진 남자들, 정열적으로 화끈한 남자들이 몰려오는 거야. 그 남자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모두 다 죽어. 그래서 당장 숨이 넘어갈 듯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내 사랑을 생명수처럼 갈구하는 거야.
[남지인] 방금 나간 남자가 그랬잖아. 넌 그 남자 목숨을 살려 줬고!
[유경화] 아니야. 언니. 그 남자는 내 상상이야.
[남지인] 상상이라니---? 남자 옷이 여기, 구두와 양말은 저기,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걸!
[유경화] 누가 이사가면서 버린 건지 우리 집 앞 쓰레기통에 잔뜩 쌓여 있던 거야. 그걸 주워 다가 내 상상대로 늘어놔 봤지.
[남지인] (현기증이 나서 소파에 주저 않는다) 너 때문에 난 깜짝깜짝 놀라 죽겠다!
[유경화] 언니, 상상이 현실로 변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라디오는 구식이야. 내가 텔레비젼 상담을 했더라면, 상상이 금방 현실로 나타났을 텐데. (초조한 표정으로) 목소리만 들리는 라디오는 너무 시간이 걸려.
[남지인] 너, 또 무슨 상상을 하는 거니?
[유경화] 내 목소리 말이야, 내 목소리가 방송되는 시간엔 전국에서 모두들 일손을 놓은 채 라디오를 듣게 만들어야 해. 그러려면 언니, 코미디, 뉴스, 대중가요,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자살 상담이 재미있어야 한다구.
[남지인] 지금 넌 제 정신이 아니구나!
[유경화] 쓰레기통에서 남자 옷이나 주워 오는 건 초라해서 싫어. 난 실제로 살아있는 그들이 필요해. 어서 빨리 그들에게 둘러 쌓여서 선망의 여왕이 되고 싶다구!


[장] 9장
(늦은 밤. 남지인, 식탁 위에 신문을 펼쳐 놓고 부동자세로 앉아 있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을 향한 채 몹시 심각한 표정이다. 유경화의 들뜬 목소리가 현관문 밖에서 남지인을 부른다.)
[유경화] 언니, 나야! 문 열어 줘!
[남지인] (현관문을 열어주며) 너, 오늘 또 늦었구나
[유경화] (현관문 밖에서) 언니, 맞춰봐! 오늘밤에 내가 누굴 만났는지 알아?
[남지인] 들어오기나 하렴.
[유경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온다.) 난 지금 기분이 너무너무 좋아!
[남지인] 술 마셨어?
[유 경화]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이야. 마침내 상상이 현실로 변했거든 (손가락을 내밀어 반지를 보여준다.) 이 굉장한 보석반지를 봐! 언니도 기억날 걸? 언젠가 보석보다 비싼 독약을 먹고 죽겠다던 남자 말야, 오늘밤 그 남자와 만나 데이트했어. 나한테 주려고 독약을 팔아서 이 반지를 샀데. 아주 세련되고, 엄청나게 재산도 많은 사업가야.
[남지인] (아무 대꾸 없이 식탁 의자에 가서 앉는다.)
[유 경화] 언니가 잘못 판단했던 거야. 언니는 그 남자의 목소리만 듣고서 진 실성이 없다고 했잖아? 하지만 만나보니깐 진짜 진실한 사람이야. 내가 충고한 대로, 자긴 알래스카 빙판에도 갔었고 모래뿐인 사막에도 갔었데. 그러나 그곳에 가서도 늘 생각했던 건 나였다는 군. 나하고 함께 있어야 자기 마음 속의 삭막한 풍경이 아름답게 변할 거라는 확신을 얻고 돌아온 거래.
[남지인] 경화야, 오늘 저녁 신문 봤어?
[유경화] 신문---?
[남지인] (식탁 위의 펼쳐진 신문을 가리키며) 안 봤으면 여기 와서 이걸 봐.
[유경화] (식탁으로 다가온다.) 뭐가 났는데?
[남지인] 너, 이게 사실이니?
[유경화] (신문을 들여다본다.) 어머, 이게 벌써 났네!
[남지인] 어째서 나하고는 아무 의논도 안 했지?
[유경화] 언니하곤 상관없는 일이잖아.
[남지인] 상관 없다구---?
[유 경화] 이 사진의 내 왼쪽에 서있는 뚱뚱한 남자가 하마야. 오른쪽은 영화사 사장, 그 옆은 감독이구. 하마가 오늘 아침에 날 만나자고 했어. 자살상담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썼는데 직접 나더러 출연해 달라는 거지. 지금 내 인기가 최고니깐 영화는 대성공할 테고, 흥행 수익금의 삼분지 일을 나에게 주겠다는 거야. 그래서 당장 기자들을 불러다 놓고 계약했어. 나중에 딴소리 못하게 말야. 어쨌든 언니, 영화에서 생긴 돈은 언니에게도 나누어 줄께.
[남지인]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아니? (식탁의 빈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 앉아. 나하고 심각하게 이야기 좀 하자.
[유경화] 난 심각한 건 싫어,
[남지인] 싫어도 들어야 해. 넌 요즈음 너무 기분이 들떠 있어. 자살상담은 흥행이 아냐. 이 신문의 기사를 보렴. 완전히 흥미위주로 쓰여 있잖아!
[유경화] 하마가 그러는데 내가 자살에 실패했던 모든 장면들을 영화로 찍을 거래. 삼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던 것, 목을 매달았던 것, 수면제를 서른 두 알이나 먹었던 것, 그 모두가 멋진 영화장면이 된다는 거야.
[남지인] 방송은? 라디오 방송의 상담 장면도 나오겠구나?
[유경화] 물론이지, 뭐.
[남지인] 넌 그게 문제라고 느껴지지 않아?
[유경화] 왜 그게 문제야?
[남지인] 넌 영리한 애야. 네가 모를 리 없어.
[유 경화] 내가 모를 건 오히려 언니의 속셈이야. 어째서 언니는 나를 자꾸만 감춰두려 하지? 사람들은 만나지 못하게 하구, 전화도 못 걸레 하구, 편지나 엽서도 못 쓰게 해. 나라는 존재는 아예 보이지 않게, 꼭꼭 숨겨 놓으려고 할 뿐이야.
[남지인] 모든 건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시작하면 변질되기 마련이야.
[유경화] 변질---?
[남지인] 그래, 감춰져 있을 땐 순수했던 것이 드러나면 변하게 돼.
[유경화] 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내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의 인기 최고의 우상이 되고 싶다구!
[남지인] 우상이란 뭐니? 그건 보이지 않는 신이 타락해서 보이는 것으로 변질된 거야. 난 네가 신처럼 인간을 초월해서 상담을 하기 바래. 그럼 넌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어.
[유경화] (소리내어 웃는다) 언니, 유감이지만 난 신이 아니라 인간이야.
[남지인] 난 너를 위해 말하는 거야. 네가 우상이 되면, 너는 오직 사람들의 경배 받기에만 열심일 뿐 다른 건 관심도 없을 거다.
[유경화] 자꾸만 어렵게 말하지 마. 쉽게 말해서, 언니는 내가 싫은 거야. 나 역시 언니가 싫어, 솔직히 그렇잖아? 우린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서로가 싫어져. 지난번에도 그랬고, 지지난번에도 그랬어.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된 거야.
[남지인] 난 아직 헤어지자는 말은 안 했어.
[유 경화] 언니의 잔소리, 간섭과 구속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특히 헤어질 무렵이 되면 언니는 나를 들들 볶아대지! 며칠만 기다려! 난 다른 집을 구해서 여기를 나가겠어! 언제나 그랬듯이, 내가 나가야 언니는 입 다물고 조용해져! (남지인 곁을 떠나 침대로 가서 앉는다.) 오늘은 행복한 날이었는데, 언니 때문에 엉망이야!
(유경화, 분하고 속상한 듯이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운다. 남지인은 침묵을 지킨 채 부동자세로 식탁 의자에 앉아 있다.)
[유경화] 나한테 전화 온 것 없어?
[남지인] 있지.
[유경화] 누군데?
[남지인] 매일 전화하는, 너의 단골들이야.
[유경화] 그것 봐. 모두들 나 아니면 단 하루도 살수가 없다잖아! 그런데 언니는 왜 그래? 왜 나를 싫어하고 괴롭히는지 모르겠어!
[남지인] (여전히 침묵한 채 부동자세로 앉아있다.)


[장] 10장
(낮. 남지인, 우울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유경화는 대단히 불만스런 태도로서 남지인의 주위를 서성거린다. 탁자 위에 놓인
라디오에서는 음악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바이올린 독주가 끝나고, 전화로써 음악을 신청하는 여성 청취자와 남성 아나운서의 대화가 들려온다.)
[신청자] 녹번동 사는 김정아인데요, 안녕하세요!
[아나운서] 김정아씨, 안녕하십니까! 신청곡은요?
[신청자]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듣고 싶어요.
[아나운서] 장송곡을 듣고 싶은 무슨 특별한 일이 있으신지---?
[신청자] 오늘은 구질구질 비가 오구요, 마음이 우울해요.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도 생각나구요.
[아나운서] 네, 그러시군요. 쇼팽의 장송행진곡은 연주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피아노, 오케스트라, 브라스밴드 등이 있는데요, 어느 연주로 들으시겠습니까?
[신청자] 브라스밴드요.
[아나운서] 알겠습니다. 녹번동의 김정아씨가 신청하신 쇼팽의 장송행진곡이 브라스밴드로 연주됩니다.
(라디오, 장엄하고 화려한 장송행진곡을 들려준다.)
[유경화] 속상해서 미치겠네! 언니, 라디오 좀 꺼!
[남지인] 음악인데 뭘 그러니?
[유경화]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아? 갑자기 자살상담 프로그램을 없애버리고 저따위 너절한 음악방송을 하다니 말야!
[남지인] 그건 방송국 이사회에서 결정한 거야.
[유경화] 이사회가 뭔데! 그들이 직접 프로그램에 간섭할 권리는 없어!
[남지인] 문제가 컸어, 자살상담 프로그램은. 이사들의 긴급회의 때 분위기를 너도 알잖아?
[유경화] 그 꼰대들이 날 불러다 놓고 야단만 쳤지, 내 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았어!
[남지인] 제작부장님은 사표를 냈고, 나 역시---
[유경화] 부장님과 언니가 뭘 잘못했기에 사표를 내?
[남지인] 어쨌든 자살상담은 방송으로 부적합했다는 결론이 났으니까 그 책임을 져야했지. 부장님은 정말 안됐어. 아직 방송국에서 물러날 나이는 아닌데---
[유 경화] 나도 물러날 나이는 아냐! 절대로 아냐, 절대로, 절대로! 인기 최고의 정상에 올라선 내가, 하루아침에 아래로 곤두박질 칠 수는 없어! 내 소설들은 불티나게 팔리는 중이구, 거들떠보지 않던 평론가들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고 있지! 그리고 또 영화가 있잖아! 내가 직접 출연하는 영화 말야! 어떻게 해서든지 자살상담 프로그램을 살려야 해! 꼭 살려내야 한다구! 그걸 살려내야 난 그 모든 것을 잃지 않게 되는 거라구! 그런데 제작부장과 언니가 사표를 내고 물러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맙소사, 싸움은 해보지도 않고 손부터 드는 거잖아? 우리는 싸워야 해! 도대체 앞뒤가 꽉 막힌 멍청이들, 양로원에나 보내버릴 꼰대들의 이사회와 맞서서 싸워야 하는 거라구!
(라디오에서는 쇼팽의 장송행진곡이 계속되고 있다. 유경화, 탁자 위의 라디오를 들어올려 침대 쪽으로 내던진다.)
[유경화] 듣기도 싫어!
[남지인] 난 네 말이 더 싫은데!
[유경화] 뭐, 내 말이---?
[남지인] 그래. 네 신경질보다는 장송곡이 훨씬 더 듣기 좋아.
[유경화] 오호라, 그러니깐 언니는 자살상담 방송이 없어진 게 잘 됐다는 거야?
[남 지인] 너도 내 옆에서 보고 있잖니? 내가 얼마나 상심하는지를---. 하지만 이미 늦었어. 자살 상담 프로그램은 물 건너간 거야. 난 너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줬고 사정도 했었어. 날마다 녹음된 테이프를 가져 왔지만, 너는 전혀 듣지도 않았지. 그래서 점점 상담 내용이 흥미 본위로 되는 걸 넌 알지 못했어.
[유경화] 흥미 본위라니, 뭘 가지고 그러는 거야?
[남 지인] 인간의 생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진지하기는커녕 완전히 코미디였지. 심지어 너는 이런 농담까지 즐겨했어. "아, 내가 너무 상담을 잘해요! 그래서 오늘도 자살하겠다는 사람들을 몽땅 다 살릴 거예요!---. " 하면서---.
[유경화] 진짜 그건 농담이었지. 심각한 사람들은 웃기려고 말이야! 그렇게 웃긴 다음에 문제를 풀어야지, 다른 방법으로 효과가 없다구!
[남지인] 어쨌든 그래서 인기는 최고였지. 네가 원했던 대로 전국 최고의 청취율을 기록하였고, 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유명해졌어. 하지만 결과적으론 어떻게 됐지? 자살 상담 프로그램은 없어지고 만 거야.
[유 경화] 난 절대로 잘못한 것 없어! 모든 잘못은 잘 되가는 방송을 중단시킨 멍청이들에게 있지. 아까도 말했지만 언니, 우리는 싸워야 해! 우리 셋이 힘을 합쳐 항의도 하고, 농성도 하면서, 필요하다면 변호사를 고용해서 법정 투쟁도 해야 한다구! 그럼 많은 청취자들이 우리를 도와줄 거야. 만약 우리가 방송을 포기하면, 그들은 단 하루도 살지 못하고 죽게 될 거야!
(남지인, 유경화가 말하는 동안 장롱에서 여행용 가방을 꺼내 옷과 세면도구 등을 챙겨 담는다.)
[유경화] 언니, 뭘 하는 거야?
[남지인] 보면 모르겠니?
[유경화] 여행---?
[남지인] 며칠 동안 집을 떠나 있고 싶어.
[유경화] 나와 함께 있기 싫다는 거군?
[남지인] 그래. 너도 말했잖니? 우린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서로를 괴롭게 들볶는다구.
[유경화] (남지인을 붙잡으며) 이런 중요한 때 나가면 안 돼!
[남지인] 지금 중요한 건 내 삶의 울타리야. (유경화의 붙잡은 손을 떼 내며) 미안하지만 부탁이야. 내가 없을 때, 너도 네 갈 곳을 찾아
떠나렴.
[유경화] (더욱 힘을 주어 붙잡는다) 언니가 가면 나 자살할 거야!
[남지인] 자살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경화야, 네가 누구였니? 자살할 사람들을 살리는 상담 자였어.
[유경화] (남지인을 놓는다.) 어디로 가는 거야, 여행은?
[남지인] (여행용 가방을 들고 나가며) 글쎄--- 그냥 나가면 정해지겠지.
[유경화] (열린 현관문 밖을 향하여 외친다.) 두고 봐! 내가 죽는지, 안 죽는지, 두고 보라구!
(유 경화, 현관문을 소리 내여 닫는다. 그녀는 잔뜩 성이 나서 거칠게 실내를 돌아다니며 식탁과 의자들을 밀쳐버리기도 하고, 소파와 탁자를 뒤집기도 한다. 그러다가 벽에 걸린 전화기와 메모판을 떼어내 던지려는 순간, 그녀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성난 표정이 풀어지며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한 손에는 전화기를, 다른 손에는 전화번호들이 적힌 메모판을 들고 장롱으로 다가간다. 장롱의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서 앉는다.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리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어조로, 그러나 때로는 설득하는 어조로 통화한다.)
[유경화] 여보세요, 내 목소리 기억하시죠? 요즈음엔 자살상담 방송이 중단되어서 살기가 힘들 거예요. 네, 네, 그래서요?--- 듣고 보니깐 더욱 문제가 악화되었군요. 남편은 부인을 의심만 하구--- 저런, 가엾어라! 그럼 부인은 남편이 때리는데도 맞고만 있었나요? 맙소사, 아무 반항도 안 한다고 더욱더 때려요? 이젠 정말 어쩔 수가 없겠어요. 부인의 결백을 증명할 길은 자살밖엔 없겠다구요. 부인이 원하신다면, 간단히 죽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죠. 취사용 도시 가스를 사용하세요. 가스의 밸브를 열어놓고 가만히 누워서 심호
흡을 하는 거예요. 이때 주의할 점은요, 가스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모든 구멍을 꼭꼭 막는 거예요. 하수도 구멍, 환기통 구멍, 창문의 빈틈, 만약 구멍이나 빈틈이 있으면 헝겊으로 틀어막고 접착 테이프로 붙이세요. 아참, 그리구요, 마지막으로 방송국에 전화하시죠. 자살상담 프로그램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다구요. 아, 네-- 네--- 하루 이틀 더 있다가 남편과 의논해 보시겠다니--- 그러세요, 그럼---
(유경화, 실망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다. 메모판의 다른 번호를 골라 다이얼을 돌린다.)
[유 경화] 안녕하세요, 선생님? 방송은 중단됐지만, 그동안 자주 상담했던 단골들에겐 특별히 전화를 해드리는 거예요. 어떠세요, 요즈음은?--- 아, 그렇군요. 나도 이해가 돼요. 선생님처럼, 나 역시 행복과 불행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쓴맛을 봤답니다. 더구나 나 자신의 잘못은 전혀 없는데, 타인의 잘못으로 불행해지다니, 정말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옛날의 노예들, 자존심도 없고 감정도 없는 노예들은 이런 상태를 순응하고 살았겠죠. 하지만 선생님은 노예가 아니잖아요? 굴욕적인 불행을 참고 살기보다는, 그 불행을 과감히 거부하는 자유인이 되세요.--- 네, 잘 결심하셨어요! 역시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선생님답군요. 그러나 자살은 결심한 순간 실행해야 돼요! 지난번 그랬잖아요, 나하고 상담하면서 차일피일 미뤄두니깐 마음이 변덕을 부렸었죠? 또다시 그런 비겁한 자기배반에 빠지기 전에, 오늘은 먼저 목숨을 끊으세요. 선생님, 내가 자살의 좋은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목욕탕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워 놓구요, 온 몸을 그 물 속에 담그면요, 마치 태어날 때의 어머니 자궁처럼 편안해진답니다. 그럼 그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죽을 때까지 연장시키면서, 면도칼로 손목의 동맥을 자르세요. 아, 한가지 빠진 게 있군요. 목욕탕 속에 들어가기 전에 방송국으로 전화하세요. 자살 상담이 있었다면 죽지는 않았을 거라구요. 선생님, 꼭 그렇게 전화하고 죽으세요. 그--- 그런데요? 보일러가 고장나서--- 더운물이 안나와요? 언제 고치실 거죠? 뭐--- 내년 봄이나--- 고칠 거라구요?
(유경화, 전화를 끊는다. 그녀는 옷장 속에 앉아서 계속해 다른 전화번호를 골라 다이얼을 돌린다. 점점 자신감을 잃고, 초조하며, 애가 타는 모습이다.)
[유 경화] 할머니, 안녕하셨어요? 나, 유경화예요--- 오, 그래요! 내 전화를 기다리고 계셨다니 고마워요! 할머니, 오늘도 혼자서 개처럼 집을 지키시는군요.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너무 안됐어요. 웃어른으로서의 체신과 권위는 사라진 채, 그저 쓸모 없는 늙은이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뭐라구요, 할머니? 오늘도 생각하는 게 죽음뿐이라구요?--- 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사람은 죽고 나서야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알게 되죠. 나 역시 지금 죽고 싶어요. 할머니, 우리 함께 죽어요. 동반자살 하자는 거죠. 죽는 방법은 간단해요. 비닐 봉지를 얼굴에 둘러쓰고, 공기가 통하지 않게 고무줄로 묶는 거죠. 시장에서 배추와 무를 담아줬던 비닐 봉지가 있다구요? 됐어요, 바로 그거면 돼요. 잠깐만요, 할머니. 저도 부엌에 가서 비닐 봉지를 찾아보겠어요.

(장롱에서 전화기를 들고 나와 부엌 쪽으로 걸어간다)

아, 여기에 있어요! 할머니는 고무줄도 준비하셨다구요? 저는 포장용 끈으로 묶겠어요. 자, 그럼 우리 똑같아, 비닐봉투에, 머리를 집어넣어요. (자신의 머리에 비닐 봉투를 씌운다) 목까지 내리덮으셨죠? 네, 잘하셨어요. 다음엔 목둘레를 단단히 묶어요! 공기가 통하지 않게, 숨을 쉴 수 없게, 꼭꼭 졸라매요! (포장용 끈으로 자신의 목을 감는다. 점점 고통스럽게 숨이 가빠지는 목소리로) 할머니, 방송국에 전화해서 할머니의 신음 소리를 들려줘요! 저도 방송국에 전화할게요. 그리고 마지막 한 호흡까지, 멍청이 이사들한테 들려 줄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 왜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죠? 가슴이 답답할 것 같아서--- 고무줄을 풀었다구요---.
(유경화, 목을 묶었던 끈을 풀고서 비닐 봉지를 벗어 내던진다. 그리고는 장롱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서 울음을 터뜨린다. 사이. 남지인,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지럽혀진 실내를 둘러보더니, 장롱 앞으로 다가온다.)
[유경화] 언니, 난 살아있어---.
[남지인] 그래, 죽지는 않았구나.
[유경화] 이번엔 동반자살 하려 했는데, 또 실패야.
[남지인] 동반자살?
[유경화] 응, 한꺼번에 여러 사람들이 죽으면, 방송국에서 다시 자살 상담 프로그램을 할 줄 알았지! (울음소리가 더욱 커지며) 그런데 언니, 아무도 죽지 않았어! 도대체 아무도 자살하지 않는 거야!
[남지인] 다행이다. 모두들 죽지 않고 살아있다니 깐. (여행용 가방을 내려놓는다.) 그런데도 난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되돌아왔지. [유경화] 잘 왔어, 언니! 정말 잘 돌아왔다구!
[남지인] 청승맞게 왜 장롱 속에서 우니? 밖으로 나오렴. (두 팔을 벌리고 안아줄 자세를 취하며) 경화야, 어서 밖으로 나와.
(유경화, 장롱 밖으로 나와서 멈칫멈칫 다가온다. 남지인은 유경화를 품에 안아준다.)
[남지인] 너, 기억하니? 우리가 시골에서 자랄 때, 내가 어린 너를 안고서 불러주던 노래 있잖아?
[유경화] 자장가지 뭐.
[남 지인] 가사는 다 잊었는데, 가락은 잊혀지질 않아. (한 소절을 구음으로 나직하게 부른다.) 참, 어쩔 수 없구나. 너하고 한 울타리에 있기 싫어도 함께 있을 수밖엔--- 그만 울어. 오늘은 모두 죽지 않고 살아있는데 울 것 없다.
(남지인, 자장가의 나머지 가락을 구음으로 부르면서,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유경화의 등을 다독거린다. 무대, 서서히 암전 되면서 막이 내린다.)

-막-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