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로만 Narrative

[단편소설] 바람이 분다 - 김영하

버블건 2007. 11. 17. 10:51

바람이 분다

                                                                                                                      김영하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분다, 바람이 분다. 다섯번을 되뇌고 하늘
을 본다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를 끈다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를 끈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흐른다  한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다 게임을  한다.
게임이 한다. 게임을 한다. 시간이  가지 않는다. 시간이 가지 않는다.  시간은 가지 않는다.
불을 끈다. 이제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가 온다 머리를 짧게 자른  그녀가 온다. 치렁한 흑갈색 원피스에  머리를 짧게 자른
그녀가 온다. 한 때 나를 미치게 했던 치렁한 흑갈색 원피스에 머리를 짧게 잘라 더 고혹스
러워진 그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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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훼밍웨이의 소설 킬라만자로의 표범을 읽고 있었다. 그 소설엔  왠지 커피가 어울릴 것같
아 한 잔 끓여 마시면서 하지만 커피가 채 식기도 전에 그 소설을 다 읽어 버렸다. 나는 자
리에서 일어났다. 표범은 왜 킬리만자로의 정상에서 얼어 죽었는가? 소설은 그 이유를 설명
하지 않고 있다. 대신 소설은  아프리카의 뜨거운 대지와 만년설의  킬리만자로를 선명하게
대비시키면서 하찮은 사고로 인생을 망친 한 바람둥이의 말로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생각했다. 왜 표범은 킬리만자로의  정상까지 올라가 얼어죽고 말았는가  왜 돈많은
유부녀를 유혹한 바람둥이는 사소한 사고로 죽음에 이르고 말았는가. 왜 헤밍웨이는 킬리만
자로의 표범처럼 우아한 죽음을 바람둥이의 사고사따위에 비교하는가. 왜 그의 문장은 그토
록 간결하고 명료한가 그것은 소설의 문장인가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킬리만자로 오르기 위해 나는 석달동안 새벽신문을 돌렸습니다”
  한 사진 현상업소의 광고문구 사진작가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그는 자랑스럽게 웃고 있었
다. 정말로 그는 석달동안새벽신문을 돌렸을 것이다. 돈보다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였겠지
만 나는 그가 부러웠다. 꿈꾸는 일을 위해 석달을 하루같이 뭔가를 할 수 있는 그가 경이로
왔다. 나였다면 단 일 주일도 힘들었을 것이다. 세상은그런 사람들 때문에 굴러간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세상에서 슬쩍 비켜서 있었다. 달려오는  사람을 피하듯이 몸을 살짝 
비틀었을 뿐이다. 그런 자세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평화롭기만 하다. 그 평화로운  세상으로
그녀가 달려와 슬쩍 비켜설 틈도 없이 내게 충돌해버렸다.  뒤로 나동그라지면서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다 쓰잘데 없는 

    2
  밤도 없고 낮도 없다. 신도시 아파트 단지들 사이  식객처럼 자리잡은 단독주택지구의 한
상가의 지하에서 사는 나에게는 반도 없고낮도 없다. 직장이면서 집인 이 습한 공간까지 기
어들어 오는 빛은 없다. 아니 처음에는 있었으나 막아버렸다. 영화 포스타보다 조금 큰 들창
그 빛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구석엔 작은 침대, 그 옆으로 이단짜리
싱크대가 놓여 있었다. 책꽃이로 형식적인 칸막이를 해두었지만 애당초 그런 구분이란 무의
미한 공간이다. 영화 캘리포니아의 포스터가 싱트대 옆에 붙어 있다. 눈을 가린 긴 머리카락
사이로 백인남자가 나를 쏘아보고 있다.
  싱크대에서 다섯 발자국쯤 걸어가면 사무용 책상 두개가 벽을 바라보며 앉아 있고 그 위
엔 의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컴퓨터와  모니터 키보드와  스케너 등속이  자리잡고 있다. 
소형 스피커 두개에는 컴퓨터가 연결되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TV와 비디오도 비슷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컴퓨터가 없으면 음악도 영상도 없다.
그러니 내가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컴퓨터를 켜는 일이다. 물론 자기 전에 마지막
으로 하는 일도 그것을 끄는 일이다. 창이 없는 이방에서 컴퓨터는 내 창이다. 그 곳에서 빛
이 나오고 그 곳에서 소리가 나오고 그 곳에서 음악이 나온다. 그 곳으로 세상을 엿보고 세
상도 그 창으로 내 삶을 훔쳐 본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그녀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 던진 말이다. 나는 조금 놀랐다. 몇명의 여자들이 이 방을 방
문했지만 그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라는 말보다 훨씬 좋았다. 그
녀는 정말로 이곳을 마음에 들어했다.  아주 느리게 하지만 완전하게 그녀는  이 곳에 젖어
들었다.
  그녀를 구한 곳은 컴퓨터 통신망의 구직란이었다. 그 무렵  나에게는 사람이 하나 필요했
다. 나는 무심히 엔터키를 쳐가며 올려진 자료들을 검색하고 있었다. 공간이 하나  주어지면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서로 닮아간다. 구직란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이 대동소이  약간
의 관장을 섞어 자신의 이력을 소개하는데 그 내용이란 컴퓨터통신의 특성상 컴퓨터와 관련
된 것이 많았다. 워드프로세서 1급  자격증 소지 한글 400타, 영문  250타 C 프로그래밍 할
수 있어요 워드 입력해 드려요 등등등 그 천편일률 속에서 그녀는 빛났다.
  일자리를 구해요 아무것도 잘 하는게 없어요 워드는 조금 치고 컴퓨터 통신은 채팅만 잘
해요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못해요 잘 웃고 아주 가끔 우울해요 종교도 없고 침구도 없어요
야근할 수 있지만 토요일은 일하고 싶지  않아요 영화를 좋아하고 소설을 싫어해요  바흐나
너바나를 좋아해요 조용한 곳이면 좋겠어요 호출기로 연락주세요
  호출하자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돈을 많이 주지는 못합니다. 나는 처음부터 잘라  말하
였다. 그녀는 놀라지 않는 기색이었다. 돈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  생각을 해두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일을 한다고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둘러댔다. 시디롬 홈쇼핑업체지요 아직 직원은 없습니다. 전화로
주문받고 직배로 보내니까 직원은 많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녀는 선선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3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마나야 할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나는 오
년전에 다 겪어 버렸다. 그 후로는 사람보다는 책이 책보다는 음악이 음악보다는 그림이 그
림보다는 게임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그녀는 아침 일찍 나타났다. 찾기 힘든 곳이었는데 용케  찾아온걸 보면 그리 멍청하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었고 바람이 거세게 불던 날이었던지라 그녀의 목엔 빨간
머플러가 갑옷처럼 둘러 있었다. 들어오세요 한동안을  멍하니 입구에  서있던 그녀가 천천
히 계단을 내려오며 외투와 머플러를 벗었다. 그러자 그 속에  감춰져 있던 긴 머릿단이 흘
러 내렸다. 알이 작은 안경엔 김이 서렸고 그 때문에 계단을 내려서며 잠시 멈칫거렸다. 
  나는 그녀를 위해 커피를 끓여 내놓았고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쩐지 그녀가 아
주 멀리서 찾아온 친구로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그녀가 먼저 입을 땠다.  여
기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라 해봐야 책상과 의자 컴퓨터가 있
을 뿐이지만 그녀는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이제 날마다 갈 곳이 생겨서 좋아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이름은 송진영이라고 했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쯤 얼굴엔
아직 주름이 없을 나이였다. 
  송진영 씨가 할 일을 알려드리지요. 전화를 받아주고 시간나면  가끔 통신망에 광고를 올
리면 되는거에요. 채팅을 해도 좋아요  채팅하다가 우리 제품이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으면
물건을 팔면 됩니다. 프로그램 시디나 게임시디가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을거에요. 이게 우리
제품 가격표에요. 용산보다 훨씬 싸니까 사겠다는 사람은 많을 거에요. 가끔 우체국에  나가
서 물건을 부치거나 하는 일도 있을거에요. 
  가격표를 보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슬쩍 웃었다. 이거 불법이지요? 불법복제해서
파는거 맞지요? 나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래요 하지만 진영씨는 안전할 거에요.  직접적인
거래는 다 제가 하니까요. 만약 무슨일이 생겨도 몰랐다고 하시면 되요 나는 다소 더듬거리
며 말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할게요 의리없다고 나중에
욕하지나 마세요
  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안전하게 일한다. 파고다 공원에 나가 할아버지들에게  오
만 원씩을 주고 통장을 개설한 뒤에 그것으로 거래한다. 프로그램 불법 복제자 따위를 잡자
고 경찰이 폐쇄회로 테이프까지 조사하지는 않겠지만 만약을 위해 카메라가 없는  지하철의
현금자동지급기를 이용해 돈을 인출한다.  역시 그 할아버지들의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으로
통신상에 아이디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바꾼다. 통신회사들의 전화접
속 경로 추적이 가장 까다로운 장애지만 그것도 인터넷으로 몇군데를 돌라다녀 흔적을 지운
후에 텔넷으로 접속하면 되니깐 귀찮을 뿐 큰 장애는 되지 않는다 이 모든 걸 그녀에게  당
장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했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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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빛도 없는 방에서 하루종일 함께 보내게 되었다. 내가 시디롬 리코더로 계속 원본
을 복제하고 있으면 그녀는 통신망을 돌아다니며 채팅을 했다. 가끔 그녀가 웃었고 보기 좋
았다. 시간이 나면 나는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녀가 어깨 너머로 그
걸 구경했다. 처음엔 익숙해 지지가 않았다. 혼자 하는 데 너무 길이 들어 있어서였을  것이
다. 그러다가 그녀도 게임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격투사가 되어 서로 싸우기도  했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서 함께 폭격에 나서기도 했다. 가끔  그녀는 늘씬한 미녀로 변신하여
나를 흠씬 두들겨 패고는 즐거워했다 나는 일부러 그녀에게 맞아 나가떨어지는 일을 즐기기
시작했다. 화면속에선 피가 낭자해도 화면밖에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게임만이
반복됐다.
  왜 이렇게 살아요? 어느날 그녀가 물어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어서 나는 조금 당황하여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화면속에 고정되 있었고 손은 열심히 키보드 위에서 놀고 있었
다.이렇게 사는게 어떤건데요? 나 역시 같은  자세로 되물었다. 화면속의 내가 그녀의  턱을
갈겼다. 그녀의 에너지가 줄어들었다. 그녀는 두 걸음쯤 물러나 앞차기와 돌려차기로 반격을
가해 왔다. 나는 재주를 넘어 뒤로 피했다. 내가 사장님이면 이렇게 안 살 것같아서요. 그녀
가 다가와 업어치기로 나를 메치고는 다시 발길질을 해댔다. 화면속의 나는 피를 흘리고 있
었다. 그럼 진영씨는 어떻게 살건데요?저요?  저라면 이 컴퓨터 같은 거  다 팔아서 여행을
갈거에요. 사무실 보증금도 빼구요 그 때 화면속의 나는  주먹으로 그녀의 얼굴을 난타하고
있었다. 진영씨는 어딜 가고 싶은데요? 내 주먹질 때문에 그녀의 에너지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곧 결판이 날 것 같았다. 에너지바는 빨간색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저요? 저라면 세계일주를 하겠어요 요새 이백만원이면 세계를 다 도는 비행기표를 살 수 있
어요 싼거는 백만 원 짜리도 있어요 단  제한이 있어요 한 방향으로만 돌아야 한다는 거에
요. 여기서 미국 미국에서 유럽 유럽에서 방콕 방콕에서 다시  한국 그런 식이에요 한번 떠
나면 지구를 한 바퀴 다 돌기 전에는 돌아올 수 없는 거지요. 그렇게 일년쯤 한 방향으로만
가는거에요 나는 오른발로 그녀의 가슴을 지른 후에 그녀를 업어서 멀리 던졌다. 그녀는 비
명을 지르며 쓰러져서는 일어나지 못했다. 게임은 끝났다. 우리는 다시 서로의 일에  열중했
다. 
  그날이후로 나는 종종 그녀와 함께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오르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혼자서 떠나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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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그녀가 아무 말 없이 결근을 했다.  함께 일을 한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아주  드문일이었
다. 사람을 기다려 본적이 언제지? 나는 멍하게 앉아 카드 게임을 하면서 햇수를 꼽고 있었
다. 아주 오래 전에 나도 누군가를 기다려 본 일이 있었다. 추웠다는 게 기억나는 걸로 봐서
겨울이었고 실외였을게다.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증오하며 그 사람을 증오하는 자신
을 증오하며, 증오하면서도 증오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실없음을 증오하며 나는 아주 오래도
록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사장님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아 좋아요 언젠가 그녀가 그렇게 말한적이 있었다. 나는 후회
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대학에서 추운나라의 언어를 전공했
다는 것과 컴퓨터를 약간 다룰  줄 안다는 것, 그리고 이력서에  기재된 전화번호와 주소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나는 카드게임을 시작했다. 컴퓨터의 손놀림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그는 신속하게 카드를 배열하고 거두어 간다.  기다릴 필요는 없다. 잘 섞여 있는  숫자들을
숫자 순서대로 배열하면 게임은 끝난다. 어렸을 적, 골방에서 할머니가 홀로 반복하던  화투
놀이와 닮아 있다. 목표는 오로지 다시 시작하는 것 난관이  있다면 원하는 패가 나오지 않
는 것 뿐이다. 원하는 패가 나와서 질서정연하게 다 맞아 떨어지면 게임은 끝난다. 그럼  카
드를 다시 섞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
  어쩌면 ‘원하는 패’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패’를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
다. 이 게임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한 패 한 패 뒤집는 것일지도. 할머니는 결국 화투를 떼
다가 가셨다. 쓰러진 할머니의 얼굴 옆에는 꽃들이 만발했으리라. 구월 국화, 삼월 벚꽃,  오
월 난초. 할머니에겐 꽃이 아니라 그저 9, 5, 3을 의미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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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이틀 후에 출근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렁한 흑갈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렇게 차려 입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드벤처 게임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처럼 그녀는 매
혹적이었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은 그녀가 나를 향해 커피를 마
시겠느냐고 물었다.
  송진영 씨. 아무리 허술해도 여기는  회사고 당신은 일 주일에 오일은  여기 나와야 하고
만약 그러지 못할 때는 연락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는  화를 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아주 낯선 장면이다. 내가 화를 내다니. 감정을  드러내다니. 그건 내가 아주 오래전에
포기한 의사 소통 방식이었는데.
  송진영도 그걸 간파했다. 사장님은 화 같은 거 안 내실 것 같았는데, 아니네요. 그녀는 웃
었다. 그녀가 웃어서 모든 것이 우스워져 버렸다. 그녀가 오지 않은 이틀 동안 무수히  모였
다가 흩어졌던 스페이드와 하트, 클로버와 다이아몬드들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도시락을 주문해 점심으로 먹었다.  조미료로 범벅된 밑반찬들을 뒤적이다가
문득 고개를 들자 그녀가 입을 우물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누군가를 바
라보는 일에는 감정이, 때로는 감상이 개입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건 연인이나 가족이
하는 일이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내 삶을 비집고 들어오는 불길한 징조를 읽은 셈이었다. 읽
었으면서도, 나 역시 한참 동안 그녀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식물을 다 씹은 그녀가 다시  고
개를 떨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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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떠나요.
  길고 따뜻한 정사가 끝난 후에 그녀가 또박또박 힘을 실어 말했다. 컴퓨터에 연결된 스피
커에선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첼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콤팩트  디스크의 발명이 이런 일
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이런 CD가 좋다. LP의 추억  따위를 읊조리는 인간들을 나는 신뢰
하지 않는다. LP의 음은 따뜻했다고,  바늘이 먼지를 긁을 때마다  내는 잡음이 정겨웠다고
말하는 인간들 말이다. 그런 이들은 잡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잡음에 묻어 있을 자신의
추억을 사랑하는 것이고, 추억을 사랑하는 자들은 추억이 없는 자들에 대해 폭력적이다.  한
때 내가 사랑했던 산울림과 들국화의 앨범들을 부숴 버리면서  아버지는 말했다. 그건 음악
이 아니라 소음이다. 천박하다. 그런 걸 듣겠다고 용돈을 써버리다니. 아버지의 진공관 앰프
로는 바그너가 출렁거렸지만 실제로 진공관 속에서  원심 분리되던 이는 다름 아닌  아버지
자신었다.
  오래 전부터 CD의 세계에서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오다 보면  CD에도 기억이 깃들인다.
음의 신로를 1초간에 44,100으로 분해하고 그 하나하나의 크기를 약 65,000단계의 16비트 디
지털 숫자로 나누어 기록하는 그 미세한 틈 한구석에도 온기가 남아 삶을 데운다.
  갓 스물을 넘겼을 때, 한 여자가 보낸 결별의 선물을 기억한다. 우리는 술에 취한  것처럼
만났고 숙취에 절어 싸우고 맨정신이 되어 헤어졌다. 히스테리 증세가 조금 있었던,  그래서
매력적이었던 여자였다. 그녀가 보낸 마지막 선물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을 때, 나는  쉽사리
그 봉투를 뜯지 못했다. 우체부에게서 받아든 우편물의 배는 불룩했고 만질 때면 그 속에서
뭔가 불규칙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심스럽게 개봉했을 때, 내 발 밑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린 것은 그녀를 만날 때면 자주 들었던 음악의 LP음반이었다. 손으로 부러뜨린 것
도 아니고 가위로 잘게 잘려 있었다. 그것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무서웠다. 우리  떠
나요. 그녀는 다시 반복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8
  그녀가 퇴근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우리는 함께 장을 보기도 했고 비디오를 빌려 오기
도 했다. 소시미적인 일상이 예고 없이 내게 찾아왔다.
  어느 날, 담배를 사러 가는 길에 한 남자를 보았다. 색이 바랜 검은 반코트를 입고 사무실
앞을 서성대고 있었다. 남자의 뒤로는  삼층짜리 건물이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것이  남자를
더 추레하게 만들었다. 남자의 눈빛이 나를 쫓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남자는 담배
가게로 걸어가는 나를 따라왔다.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결찰이든 아니든 이미 이 곳
까지 와 있다면 모든 걸 알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남자는 돈을 치르는 내 뒤에 서 있었다. 얘기는 좀 하지요. 남자는 내 가슴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맥주 두 병을 사서 가게 앞 파라솔 아래에 앉았다. 종이컵에 술을 따랐다.
거품이 넘쳤다. 술을 받아 마시는 걸 보면 경찰은 아니었다.
  무슨 일입니까? 앉자마자 내가 그에게 물었다.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그가 말을  꺼냈다.
여직원이 하나 있지요? 미스 송이라고 부르나요? 나는 굳이 부인했다. 아닙니다. 그렇게 부
르지는 않습니다. 남자는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개 한 마리가 코를 킁킁거리며 가게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군데군데 털이 빠진데다가 다리를 절고 있었다. 늙고 병든 개였다. 입춘을
갓 넘긴 시절의 차가운 대기가 발치를 훑고 지나갔다. 그 때 나는 보았다. 종이컵을  집어드
는 남자의 왼손 새끼손가락엔 한 마디가 부족했다. 남자는 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저희 애엄
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가 오래 돼서 이렇게 찾아와  봤습니다. 출근은 했습니까?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엔 초조가 묻어 있었다. 송진영 씨가 결혼한 줄은 몰랐습니다. 말을 안
했으니까요. 어느 새 내 손은 맥주를 찾아 종이컵에 붓고 있었다. 가게 주인이 익숙한  솜씨
로 가면 상자를 들어 가게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애엄마더러 오늘은  집에 꼭 다녀가라고
전해 주십시오. 남자는 종이컵을 쓰레기통으로 집어던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 여부 따위를 알고자, 이런 메시지 따위를 전하고자 나를 보자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
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챌 나이가 되었다. 직접 만나서 말씀하시죠. 내 종이컵도  쓰레기통으
로 들어갔다. 남자는 다시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다 알면서 왜 그러느냐는 투로 그는 내 어
깨를 툭툭 치더니 큰길을 향해 걸어가 버렸다.

    9
  다 거짓말이에요.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나하고 가까워 보이는 남자들에게 항상
하는 소리예요. 신경쓰지 마세요. 여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는 다시 게임에  열중
했다. 나도 그녀 옆에 앉아 함께 게임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한 팀이 되어 보물을  찾아
마법의 성으로 떠났다. 불을 뿜는  용가리와 괴물들을 차례차례 처치했다. 그럴수록  우리의
무기는 점점 강력해졌다. 그녀는 칼로, 나는 처로티로 마법사와 괴수들을 무찔렀다.
  한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다른 사람이 가서 도왔다. 그런 남자 있으면 피곤하지요? 내 철
퇴가 용의 머리를 강타했다. 아까 그 남자 손 봤어요? 여자가 용이 흘린 보물을 주었다.  에
너지가 최고로 상승했다. 박쥐 한 마리가 재빠르게 내 머리를 치고 날아가 버렸다. 내  에너
지는 줄어들었다. 칼을 더 굳게 움켜쥐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칼로 자른 거예요. 엄마는 기절하고, 하여간 난리
가 났었어요. 피가 많이 났어요. 마법사가 그녀의 칼을 빼앗고 공격해 왔다. 그녀를 뒤로 빠
지게 하고 내가 마법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마법사는 불을 뿜었다. 그의 목을 잘라야만 이 코스를 통과할 수 있다. 칼을 되찾
은 그녀까지 가세하여 우리는 마법사의  목을 노렸다. 박쥐들이 날아왔고 정신이  혼란했다.
마법사는 점점 더 뒤로 물러섰다. 나는 철퇴를 휘두르며  마법사를 추격해 들어갔다. 컥, 하
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고 그녀만 남았다.
 함정을 뛰어넘은 그녀가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마법사의  머리를 갈랐다. 레벨 2가 끝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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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 밤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 몸 위에 올라앉은 그녀가 다시 나를 채근
했다. 그녀의 허벅지가 내 허리를 조였고, 더없이 안온했다. 함께 떠나고 싶어요. 한번  떠나
면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어요. 남미와 로키와 케냐, 긔고 이
집트를 가는 거예요. 네팔에선 트래킹도  하고 치앙마이에선 코끼리를 타고  밀림을 누비는
거예요. CD복제 따위는 잊어버리구 말이에요. 비행기값을 빼고 오백만 원이면  육 개월쯤은
넉넉히 돌 수 있대요. 천만 원만 있으면 일 년은 문제 없구요. 나도 돈이 있어요. 월세 보증
금을 빼면 되거든요.
  나는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통신망을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광고를 올리고 아침이 되면
지웠다. 낮에도 게시되어 있으면 경찰이나 저작권 협회의 눈에 띌 우려가 있었다. 주문이 몰
려들었다. CD한 장에 온갖 프로그램이 다  들어 있는데 만 원, 이만 원이라면  혹하지 않을
사람은 적었다. 삐삐가 하루 종일 울려 댔고 우체국과 은행을 부지런히 오갔다. 잠이 부족했
다. 게임 CD도 많이 나갔다. CD리코더는 분주히 복제품을 ‘구워 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주문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오십만 원어치를 팔아치웠다.
그녀를 만나기 전엔 하루 평균 오만 원이면 족했다. 그녀를  고용한 후에도 십만 원이면 넉
넉했다. 하지만 떠나야 했으므로, 나는 갑자기 성실해졌고 그러자 돈이 굴러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돈이 모이고 일이 부누ㅈ해질수록 그녀가 우울해지는 날들이 많았다. 그녀는 낮에 일했고
나는 밤에 일했다. 건물주를 만나 사무실을 빼겠다고 말했다. 보증금은 다음 사람이  드러와
야 주겠다고 했다. 부동산업자 예기로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이 어둡고 침침한 공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빛도 낮도 밤도 없는 이 공간. 떠난다는 일이 처
음으로 두려워졌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왜 눈 덮인 정상에서 얼어 죽었는가, 나는 다시 생
각하게 되었다. 킬리만자로를 오르기 위해 석 달 동안 새벽  신물을 돌린 남자와 나는 무엇
이 다른가. 다리를 불구의 비둘기들이 청계 고가 아래에 살고 있다던데. 왜들 그렇게 살아가
게 되는 걸까. 그러나 그런 돌아봄은 잠깐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일에 열중했다.
이미 미세한 균열이 내 삶을 흔들어 놓았고 나는 떠난다는 것말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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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꿈엔 점점 더 그녀가 많이 출현했다. 정체 불명의 남자들이 나타나 그녀를 빼았아가
는 흉몽 뒤엔 그녀와 함께 카리브 해안을 거니는 류의  꿈들이 이어졌다. 미래도 과거도 생
각하지 않던 내가 계획을 시작했다. 여권을 만들고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우리는 함께  여행
사에 갔다. 지도를 샀고 대형 서점에 가서 여행 안내 책자르 구입했다. 지도를 펴놓고  도시
마다 동그라미를 치며 일정을 짰다. 그건 참으로 행, 복, 한, 일이었다. 지도 위엔 우리가 가
야 할 도시와 산들이 냉정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우리, 정말 가는 거예요? 그녀는 몇  번이
나 내게 물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우린  빈털터리가 되어 있을 텐데. 그녀의 심중을  떠보면
그녀는 활짝 웃어 나의 심려를 털어 줬다.  또 이렇게 살면 되지. 임대료가 싼 지하실  하나
얻어서 조금만 벌면서 살면 되잖아요. 가끔 소시지 안주삼아 맥주나 마시면서.
  우리는 여행 가서도 그녀가 좋아하는 바흐와 너바나를 듣기 위해 소형 워크맨을 샀다. 일
제였고 성능이 좋았다. 두 개의 이어폰을 동시에 연결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탈 때, 우리는 하나의 음악을 함께 듣게 될 터이었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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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혹한 킬러들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가 예정되어 있다. 그 실수란 나약함 때문에 빚어지
므로 그건 인간 된 자의 숙명이다. 그 단 한번의 실수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게 하
드보일드의 문법이다. 킬러도 못 되는, 그저 세상에서 조금 비켜 섰을 뿐인 나 같은  인간에
게도 지켜야 할 룰이 있다. 나는 그 룰을 어긴 셈이었다. 한 남자가 한꺼번에 열 장의 CD를
주문했을 때는 의심했어야 했다. 게다가 그가 직접 만나서 받기를 요구했을 때는 더더욱 그
랬다. 하지만 그런 손님은 가끔 있어 왔고 별 탈은 없었다. 계좌로 입금하면 즉시  발송하겠
다는 불법 복제업자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열 장씩 사는 사람은 드물
었다.
  어느 대학 학생회관까지 나갔다. 일은 단순했다. 나는 CD꾸러미를 넘겨 주었고 그는 대충
훑어보고는 돈을 건네 주었다. 그는 간단하게 몇 마디를 물어왔다. 장사가 잘되냐는 정도 이
야기였고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려 주었다 그는 내가 통신망에 게시한 가격표에 없는 물
품 중에서 몇 개를 구해 달라고 했다. 해보겠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며 연
락 달라고 했다. 그리곤 헤어져 서로이 갈 길로 갔다.
  송진영을 찾아왔던 남자는 그 뒤로도 계속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
내지는 않았다. 오직, 나에게만 슬쩍 자신의 존재를 내비치고는 사라졌다. 이빨을 드러낸 개
처럼 그가 으으렁거리는 것 같았다. 잘려 나간 그의 새끼손가락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렸다.
킬리만자로를 오르기 위해 석 달  동안 새벽 신문을 돌렸다는 남자와  그는 무엇이 다른가.
또 나와는 무엇이 다른가.
  며칠 후, 우체국에 다녀오니 사무실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전선들이 흩어지고 끊어져  있
었고 컴퓨터와 장비, CD들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처음에 나는 도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
지만 도둑이 CD따위를 가져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건물 경비원을 만나자  분명해졌다. 경
찰들이 다녀갔고 그녀를 연행해 갔다고 경비원은 전했다. 경찰이 이 사무실까지 알 수는 없
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이 곳에서 거래를 한 적도 없거니와 통신망 등에 주소
를 노출한 적도 없었다. 대번에 나는 손가락이 잘린 남자를 의심했다. 지하에서  뛰쳐올라오
니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남자가 그 앞에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거머쥐었다. 당신이지?
당신이 한 짓이지? 그러자 남자는 오히려 내 멱살을 거머쥐었다. 애엄마 어딨어? 우리는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있었다.
  금세, 아주 빠르게, 나는 그가 한 짓이 아님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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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나는 변호사를 고용했고 그와 함께 경찰에 출두했다. 오백만 원쯤 변호사에게 준
다 해도 풀려나기만 한다면 아깝지 않았다. 떠나야 했으므로.
  경찰서에서 만난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처음 한동안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
다. 그녀의 긴 머리는 거추장스러워  보였고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미안하게 됐어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게  CD를 샀던 형사가 앉아서 웃고  있었다.
요새 장사 잘돼? 경찰다운 유머에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나는 모든 걸 다 이야기했다. 변호사
가 함께 온 덕분에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송진영도 바로 석방되지는 못했다.  경찰의
불기소 처분을 받고서야 나갈 수 있었다. 그녀가 경찰서를 나설 때, 언뜻 손가락이 잘린  남
자의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제지를 받았다.
  형사는 일사천리로 조서를 작성해 갔다. 함정  수사였다. 그가 건네 준 전화 번로로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번호를 추적했고  그것으로 모든게 완료되었다고 했다. 저작권법  위반에
금융 거래법 위반이 추가됐다. 마지막으로 조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미처 도장을  준비
해 오지 못한 나는 지장을 찍고 구속되었다가 변호사가 신청한 적부심으로 다음 날 풀려났
다. 벌금 액수가 상당할 것이라고 일러 주는 것을 변호사는 잊지 않았다. 남자가 받았다. 나
는 그 목소리를 알 것 같았다. 송진영 씨 부탁합니다. 남자도 내가 누군지 알것이었다. 잠깐
만 기다리세요. 그녀가 전화를 받았고 나는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어요. 무심한 대꾸가 돌아
왔다.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어쩐지 이런 날이 꼭 올  것만 같았어요. 처음 그 곳에 들어갈
때 부터요.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꼭  내가 있을 때 일어날 것 같았구요. 당신이  나갈
때마다 겁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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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이 잘린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여자는 잘 있다고 했다. 컴퓨터로 채팅과  게임을
하며 세월을 죽이고 있다고 했다. 그녀와 함께 했던 게임들을 생각했다. 우리는 다른 연인들
처럼 극장에도 가지 못했고, 공원을 거닐거나 동물원의 원숭이도 보지 못했다. 멋진  식당에
서 밥을 먹지도 못했고 카페를 전전해 보지도 못했다. 우리가 함께 한 일이라고는 마법사들
을 무찌르거나 서로 격투를 벌인 일뿐이었다. 배달된 중국 음식과 도시락, 찌개백반  따위가
우리가 함께 먹은 모든 것들이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회전돌려차기를 할 때 그녀의  얼굴에
는 득의만만한 웃음이 흐르곤 했었다. 마법사의 목을 자를 때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에 힘
을 너무 주는 바람에 키보드가 부서지는 줄 알았었다. 내게 어울리는 추억이란 그런 것들이
었다.
  손가락이 잘린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네 살 된 아들이  있다고 했다. 추운 나라의 언어를
전공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라 했다. 아들은 뇌성 마비를 알고 있다 했다. 이혼한 지 이년째라
했다. 나는 새로운, 하지만 별로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었다. 남자의 말도, 여자
의 말도 반쯤만 믿기로 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손가락을 잘랐을 것이다. 여자는 그  남자
와 결혼했을 것이다. 추운 나라의 언어도 배웠을 것이다. 뇌성 마비를 앓는 아이는 그  여자
의 아이가 아닐 것이다. 둘은 이혼했을 것이다. 여자는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그럴 것이다. 남자가 다녀간 뒤 여자는 통신을 통해 편지를 보내 왔었다. 편지를 보다가  불
현듯 그녀의 글씨체가 궁금해졌다. 언제나 깔끔하게 인쇄된 워드프로세서만 그녀의 글을 보
아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궁금해했을까. 내 글씨체를.
  우리, 다음주에 떠나요.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테이프에 음악을 녹음하고 있거든요.  제
가 좋아하는 곡들로만 가려서 말이에요. 어시아에 가면 카자흐 노래를 가르쳐드릴게요. 남자
가 부르면 훨씬 멋지거든요. 그곳에 계속 계신다면 찾아갈게요. 이젠 정말로 떠나는 거예요.
그 남자가 당신에게 갔다는 거 알아요. 그 남자를 믿지 마세요.
  나도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사무실은 빠졌고 보증금도 돌려받을 예정이다. 남은  집기를
모두 팔아치웠고 비행기도 예약해 두었다. 하지만 그녀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러면서도 나는 무연히 게임을, 또 게임을 하고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
다. 빛도, 낮도, 밤도 없는 이 지하실에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게임을 한다. 게임을  한
다. 게임이 한다. 게임을 한다. 그녀가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석 달 동안 새벽 신문을 돌릴 팔자는 아니었던 것같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 만년설이 쌓인 정상까지 기어올라가 죽은 까닭을 다시 생각한다. 아마도, 바람이  불어서
였을 것이다. 마사이 초원에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고 또 바람이 불어 표범은
무료했을 것이다. 사냥을 하고 사냥을 하고 사냥이 하고 사냥을 하다가 지루해졌을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백인 남자가 나를 쏘아보고 있다. 내일이면 나는 떠난다. 떠난다.  떠난다.
떠날 수 있다. 그녀가 없어도 떠날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게임 따위는 집어치울 것이다.  나
는 컴퓨터가 깔아 주는 카드를  순서대로 맞추어 가면서 계속 되뇌고  있다. 카드들은 벌써
수십 번이나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었다.
  사방이 꽉 막힌 이 지하실로 어디에서 이렇게도 바람이 불어 오는 걸까. 바람이 분다.  바
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한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분다.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