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로만 Narrative

[단편소설] 당신의 나무 - 김영하

버블건 2007. 11. 17. 10:52

당신의 나무

김영하


1

어렸을 적 당신은 떡갈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이제는 제목도 생각나지 않고, 책의 장정도 떠오르지 않는, 그저 그렇고 그런 동화책에서였을 것이다. 거대한 나무의 밑둥엔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심술궂게 다문 입이 그려져 있었고, 그 삽화들은 어린 당신을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무. 그때부터 당신은 나무를 두려워했다. 미친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산발하며 뻗어 내려간 뿌리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는 나뭇잎들. 나무들은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고 당신이 죽은 뒤에도 계속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 시절 당신의 집 앞에도 나무가 있었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아카시아 나무. 나무는 지붕을 덮었고 몇몇 가지는 당신 방 창문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둥치로는 개미들이 줄줄이 기어오르고 굵은 가지 끝에는 말벌의 집이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밤이면 부엉인지 올빼민지 모를 새가 당신을 향해 울었다. 어린 당신은 생각했다. 언젠가 저 나무가 자라, 뿌리들은 부엌으로 솟구쳐 오르고 가지들은 지붕을 뚫고 들어오리라. 개미들이 침대를 먹어치우고 새들은 거실에 집을 짓고 가을독 오른 벌떼들이 갓난 동생을 쏘아 죽이리라.

도시로 이사 와서 당신은 안도했다. 밤길을 위협하던 거대한 나무들은 사라졌다. 그악스럽게 대지를 움켜쥔 뿌리들은 이제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좋았다. 도시엔 앙상한 버드나무와 은행나무들만 있었고 그나마도 봄만 되면 가지치기를 당했다. 잘 정비된 포도와 신호등, 횡단보도에 둘러싸여, 바야흐로 어린 당신은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세월은 흘렀고 당신은 전자오락과 담배와 자동차 운전을 배웠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다가가는 기술을 습득했다. 여권과 신용카드를 만들었고 떠나간 사람을 잊었다. 삐삐를 샀다가 삼 년 만에 해지했고, 핸드폰을 사서 아는 전화번호를 모조리 단축번호로 만들어 저장했다. 그러는 사이 또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나무를 보고 있다. 후텁하고 질척한 땅에 발을 딛은 당신 앞에는 5층 빌딩은 족히 덮을 만한 무화과나무가 버티고 있다. 한때 새의 깃털쯤에 묻어온 씨앗에서 발아되었을,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 근원을 어림할 수 없을 웅대한 생명체 앞에서, 당신은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구름이 빠르게 흘러간다. 우기를 맞이한 이곳의 바람은 비의 냄새를 전해준다. 그 기미를 먼저 맡은 검은 나비들이 떼를 지어 숲으로 몰려간다. 맨발의 소년들이 그 나비들처럼 후룩거리며 당신 주위를 유영한다. 당신은 생각한다. 무엇이 당신을 이곳으로 오게 했는가. 어쩌면 그것은 바로 이 무화과나무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 바다를 건너온다는 저 검은 나비떼들?



2

앙코르에 가야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하던 날, 당신은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포장을 뜯은 지 오래되어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커피였다. 사위는 조용했고 아무도 당신을 방해하지 않았다. 일순 도시의 모든 자동차들도 운행을 멈춘 것 같았고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붙잡혀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적요를 깨고, 돌연 건조대 위에 쌓인 그릇들이 어떤 미세한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딱 한 번, 아주 작은 소리로, 덜커덕, 소리를 내며 아래로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그 이동거리란 눈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짧았고 그 이동이 그릇들의 퇴적구조에 심각한 균열을 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덜컥거림이란 당신 집 건조대뿐 아니라 다른 어느 집에서나 날마다 일어나는 일이며 어쩌면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발생하는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날의 당신은 그 일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당신은 생각했다. 물에 젖은 그릇들은 미끄럽게 마련이고 그것들을 쌓아두었으니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구조를 변경하게 마련이겠지만, 어쩌면 세상에는 그런 순간들이 있는 것이 아닐까. 궁극에는 엄청난 일을 초래하는 아주 사소한 덜컥임, 당신은 바로 그 연쇄의 시작을 보았다고 느꼈다.

그런 걸 나비효과라고 한다지. 북경의 나비가 펄럭이면 캘리포니아에선 폭풍이 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당신은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저 덜컥거림이 어쩌면 내 인생의 파열을 가져올지도 몰라. 아무 근거도 없었지만 그 생각은 당신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3

방콕을 출발하여 국경도시 아란야프라텟에 도착, 간단한 입국수속을 밟고 캄보디아 땅에 들어섰을 때, 당신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태국엔 당신의 이십대가 있었고 캄보디아엔 당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시절이 있었다. 맨발의 소년들과 AK소총을 거꾸로 멘 군인들. 가도 가도 끝없는 황톳길. 하나의 선을 경계로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었다. 당신은 돌아보지 않았다. 주저 없이 현지인들과 섞여 작은 짐칸이 달린 왜건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1톤 트럭보다 작은 차에 열여섯 명이 당신과 함께 올라탔다. 우기를 맞아 비포장도로는 군데군데 심하게 패어 있었고 차는 요동쳤다. 세 번쯤 자동차의 타이어가 터졌고 나무다리의 이음새가 무너지기도 했다. 그렇게 여섯 시간을 달려가는 동안 차창으로는 뿌연 흙먼지가 쉼 없이 불어닥치고 1톤도 채 안 되는 왜건에 매달린 사람들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귀에 더욱 힘을 주고 있다.

운전사가 터진 타이어를 갈아끼우는 시간이 유일한 휴식시간이었고 그때마다 당신은 차에서 내려 지평선까지 펼쳐진 열대의 논을 바라보았다. 젖은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마저 시원했다. 먼지와 땀에 찌든 옷에선 모과 냄새가 났다.

어느새 자동차 주위엔 어린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머리에 버짐이 듬성듬성 핀 소녀에게서 대나무통에 넣고 찐 밥을 샀다. 당신은 거친 대나무 껍질을 벗기고 주먹밥처럼 굳게 뭉쳐진 밥을 베어물었다. 사람을 그득 실은 픽업트럭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갔다. 거친 밥에 목이 메었다. 다리를 심하게 저는 운전사가 밝게 웃으며 어서 차에 타라고 재촉한다. 다시 짐칸에 올라타면서 당신은 생각한다. 무엇이 당신을 이리로 내몰았는가를.



4

그릇이 덜컥거린 날, 당신은 당신의 여자에게서 결별의 메시지를 들었다. 당신은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릇이 덜컥거렸고 그 울림이 다른 여러 집의 그릇을 다시 건드렸고 애완견들이 짖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놀란 갓난아이들이 울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아이엄마들이 짜증을 부렸을 것이고 그녀들의 불편한 심기가 전화선을 타고 남편들의 직장으로 날아갔고 그 중 어느 남편과 함께 일하고 있는 당신 여자의 신경까지 건드렸을 것이다. 나비효과, 치고는 경미하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당신의 예상대로 당신의 여자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미쳤나 봐요. 그냥 그렇게 생각해줘요. 당신을 더 견딜 수 없어요. 당신만 만나면 신경이 팽팽해져요. 너무 조여진 기타줄처럼 줄창 높은 음만 나요. 목이 부러진 기타 봤어요? 보통은 줄이 끊어지겠지만 당신이 내게 묶어놓은 줄들은 너무 질기거든요.

만지고 싶을 거야. 여자와 헤어지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게 뭔지 알아? 촉감이야. 엉덩이, 가슴, 배에서 출렁이던 지방질. 골반에 부딪쳐오던 뼛조각들의 날카로움. 입 속에서 충돌하던 앞이빨.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의 촉촉함. 배란일이면 더 미끌해지는 너의 점액.

당신도 알고 있다. 그날 당신의 대응은 적절하지 못했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좀더 더듬거리며, 가지 말라고, 네가 필요하다고, 네가 가버리면 죽어버리겠노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와 통화하는 내내 당신 머릿속엔 그릇들이 덜컥거리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당신의 체념엔 이유가 있었다. 그건 모두 아침나절의 그 덜컥임 때문이라고, 당신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덜컥임이 당신과 그녀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당신의 어조는 더욱 격해지고 여자의 줄은 더욱 팽팽해져갔다.

너를 처음 안았을 때, 사람이 아니라 동물 같았다. 머리카락과 코에서 암컷의 냄새가 풍겨나왔고 피부에선 진액들이 흘렀지. 나는 너에게 했던 모든 말들을 단 한 구절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게 남아 있는 너의 흔적은 오직 촉각뿐이다. 그러니 가라. 내게 남아 있는 너의 언어는 없다. 음성사서함의 메시지들은 지워졌고 자동응답기의 음성도 삭제되었다.

당신의 말들은 톱날처럼 여자의 몸을 긁어댔을 것이다. 당신이 원한 건 아니었겠지만.



5

앙코르에, 더 정확히 말하면 앙코르에 가장 근접한 도시 시앰립에 도착했을 때, 당신의 몸은 한계 치에 도달해 있었다. 방콕으로부터 열두 시간을 여행했고 후반의 여섯 시간은 악몽 같았다. 육로로 앙코르를 가는 건 미친 짓이라고 누군가 말해주었지만 믿지 않았던 당신이었다. 프놈펜에서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그 누군가는 또 말해주었지만 그 역시 당신은 무시했다. 덕분에 당신의 육체는 더위와 먼지에 찌들게 된 셈이다.

일박에 1달러 50센트인 숙소에 짐을 풀었다. 침대 곁으로 주먹만한 왕거미와 도마뱀들이 기어다녔다. 눈을 감고 벙크베드에 몸을 맡겼다. 깨어나니 아침이었다. 거미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침을 먹으며 계속해서 당신의 눈은 거미를 찾았다. 거미는 나타나지 않았다. 검고 털이 북숭한, 그 검은 왕거미는 낮에는 돌아다니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신은 아무 말 없이 따뜻한 닭죽을 먹어치웠다.

앙코르왓을 시작으로 앙코르 일대의 광대한 유적군을 찾아나선 것은 그날부터였다. 햇볕은 당신의 피부를 검게 그을렸고 달아오른 사암(砂巖)들은 복사열을 저장했다가 내뿜어 열기를 더했다. 부처를 닮은 힌두의 신상들은 당신을 보며 알 듯 모를 듯 웃으며 말했다. 왜 이제야 왔는가. 당신은 할말이 없었다. 동서남북 네 방향을 지배하는, 그리하여 얼굴도 네 방향인 아발로키테스바라도 당신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수백 기의 아발로키테스바라의 두상이 탑을 이루며 솟아 있는 바욘의 계단을 오르며, 당신은 보았다.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위에도 아래에도 네 방향을 바라보는 신이 당신을 지켜보는 것을. 그러니 당신이 숨을 곳은 없었다.

당신은 오체투지의 자세로 엎드려 절했다. 주황색 장삼을 입은 승려가 1달러를 시주한 당신을 향해 향을 흔들며 축문을 외워주었다. 12세기에 아발로키테스바라로 지어진 두상들은 이제 보살상으로 경배받고 있었다. 당신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그 미소는 당신이 익히 보아왔던, 절집에 틀어앉아 당신을 내려다보던, 관음보살의 그것이었다.

이제 당신은 두상의 숲, 바욘에 앉아 정확하게 장방형으로 지어진 고대도시 앙코르 톰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워 문다. 앙코르. 여긴 어쩐지 지구가 아닌 먼 외계의 도시인 것만 같다. 그런데도 당신은 이곳이 낯익다. 푸스스 새들이 날고 아발로키테스바라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진다. 두상의 코와 입 사이에서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해가 지고 있었고 당신의 시간은 계속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6

여자의 엄마가 자살을 기도한 건 그릇이 덜컥거린 지 일주일쯤 되던 날이었다. 여자가 당신에게 구원을 요청했을 때, 당신은 없었다. 자동응답기에 남아 있는 여자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병원으로 좀 와줘요. 피를 많이 흘렸어요. 무서워요. 미안해요. 왜 당신에게 전화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화내지 말아요. 여자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여자는 엄마와 단둘이 살았다. 여자의 엄마는 아마 누군가의 첩이 아니었을까. 당신은 여자의 집에 들를 때마다 그런 인상을 받았다. 남자의 흔적이 전무한 집이었다. 명절이 되어도 아무 냄새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집에 돌아온 당신이 메시지를 확인하고 병원으로 갔을 때, 여자도 엄마도 없었다. 간호사는 더 큰 수술을 받기 위해 다른 병원으로 옮겨갔다고 전해주었다. 핏줄을 봉합해야 한다고 했다. 당신은 망설이다가, 조금 더 망설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여자의 엄마는 죽을지도 몰라. 친척 하나 없는 쓸쓸한 장례식이 되겠지. 그럼 여자는 완전히 미쳐버릴지도 몰라. 목이 부러진 기타처럼.

이 모든 일은 그릇이 덜컥거렸기 때문이라고 당신은 되뇌었다. 그릇이 덜컥거려 여자와 결별했고 그 결별이 여자의 엄마로 하여금 손목을 긋게 만들었다고. 팽팽하던 줄이 느슨해진 여자가 집에서 온갖 히스테리를 부렸을 것이고 엄마의 운명과 자신의 팔자를 대비해가며 구석으로 몰았을 것이다.

여자는 다음날 당신을 찾아왔다. 전화해서 미안해요. 나도 모르는 새 피 묻은 손가락들이 버튼을 누르고 있었어요. 오다가 길에서 사람 키보다 큰 국화 화환을 싣고 가는 오토바이를 봤어요. 어느 장례식장에서 오는 길인가 봐요. 비닐포장도 안 된 거여서 오토바이가 속력을 낼 때마다 국화가 길로 흩날렸어요. 엄마가 피를 많이 흘렸어요. 집에서 비린내가 나요. 락스로 아무리 씻어내도 지워지지가 않아요. 택시 바퀴에 국화가 밟혔어요. 병원에는 안 가봐도 돼요. 전남편이 와 있어요. 이럴 때는 쓸 만해요. 당신보다는.



7

앙코르는 아침과 저녁, 일출과 일몰, 건기와 우기를 비롯한 모든 시간을 위해 건축되었다. 태양이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다른 모습을 드러냈고 특히 하늘이 트는 무렵엔 장관을 이룬다. 당신은 사면을 바라보는 아발로키테스바라에 기대어 이리저리 몸을 옮겨가며 하루를 보낸다. 달궈진 사암이 당신의 몸을 데우는 동안 유적 곳곳에선 소떼들이 풀을 뜯는다. 그들은 춤추는 압살라 부조 사이를 비집고 나온 풀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운다. 밤이 되면 앙코르왓을 둘러싼 거대한 해자를 건너 소떼들이 물을 가르며 우리로 돌아간다. 석양을 받는 갈색의 사원 아래 소떼들의 행진이 어우러져 당신의 시간은 정지된다.

그리고 일주일. 당신은 지금 나무를 보고 있다. 판야 나무 한 그루가 사원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판야 나무의 씨앗은 바람에 날려 지붕에서 싹을 틔우고 천천히 뿌리를 지상으로 내려 수분과 양분을 흡수해올린 후 끝내는 사원 하나를 자신의 뿌리로 온전히 덮어버렸다. 그 그악스런 뿌리 사이로 손에 꽃을 든 여인의 입상 부조가 서서히 허물어져내리려 하고 있다. 뿌리 줄기 하나하나가 웬만한 거목 뺨치게 굵어 그 앞에선 당신은 마치 개미라도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또 어떤 나무는 아발로키테스바라의 머리 위에 싹을 틔웠다. 그 뿌리는 조상(彫像)의 두 눈 사이를 가르고 내려와 대지에 뿌리박았다. 그 때문에 슬쩍 치켜올라간 조상의 입매도 두 조각으로 쪼개어져 그가 띤 웃음도 미소라기보다는 조소에 가까웠다. 당신은 무서웠다. 그가 무엇을 향해 웃고 있는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쯤 되면 20세기 초에 이곳을 찾아와 악마의 땅이라며 저주를 퍼붓고 간 폴 클로델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누구라도 유적들을 휘감고 탐욕스럽게 커버린 10층 건물 높이의 판야 나무를 본다면 이곳을 떠도는 마성(魔性)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작디작은 씨앗의 위력. 그것에 떨게 되고 자연스레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당신 역시 당신의 삶에 날아들어온 작은 씨앗에 대해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 머리 어딘가에 떨어졌을, 그리하여 거대한 나무가 되어 당신의 뇌를 바수어버리며 자라난, 이제는 제거불능인 존재에 대해서.



8

여자의 엄마는 더 이상 왼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여자는 술을 많이 마셨다. 당신은 알고 있었다. 나비가 이미 펄럭였다는 것을. 그러니 이제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도.

그릇의 덜컥거림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당신은 궁금했다. 당신의 기다림은 곧 결실을 얻었다. 당신과 여자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 낡은 아파트 한 채가 콘크리트 더미가 되었다. 여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불과 네 블록쯤 떨어진 곳이었다. 밤새 차오른 가스가 담뱃불에 인화되면서 순식간에 몇 집을 날려버렸고 나머지 주민들은 허물어지는 아파트에서 대피했다. 경찰은 누군가가 가스 밸브를 절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왼손의 신경이 끊어진 여자의 엄마는 슈퍼마켓 계산대의 점원과 다투었을 것이다. 한 손으로 계산하는 일은 불편한데도 여자의 엄마는 드러내기 싫었을 것이다. 지불을 독촉하는 점원 앞에서 지갑을 떨어뜨려야 했던, 아직 불구자의 삶에 익숙지 않은 여자의 엄마는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 험한 욕이 오갔을 것이고 줄을 선 채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 종국엔 그녀 팔목에 드러난 수술 자국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실패한 자살의 흔적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슈퍼마켓의 점원과 고객들은 각기 집으로 돌아가 불쾌한 싸움의 전말을 떠올릴 것이다. 그녀의 히스테릭한 소프라노와 팔목의 상처, 점원의 앙칼진 대응을 적어도 며칠은 되새길 것이다. 그 중 몇몇은 자살에 대해 단 일 분이나마 생각해봤을 것이며 그 속내를 모르는 남편의 술주정에 분노를 터뜨렸을 것이고 그 중의 또 누군가는 가스 파이프를 스위스 군용 칼로 잘라버렸을 것이다.

슈퍼마켓이 아니었다면 버스도 좋고 백화점도 좋다. 이런 식의 연쇄는 멈추지 않는다. 당신의 상상도 계속된다. 이 가스 폭발이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을 불러올지 당신은 궁금하다.



9

왕거미는 밤늦게 욕실 거울 위에 다시 나타났다. 갑자기 쏟아진 빛에 놀라 움찔도 하지 않고 가만히 당신의 대응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라이터를 들고 천천히 거미에게 다가간다. 독이 있을지도 몰라요. 게스트 하우스의 직원이 전날 당신에게 겁을 준 바 있었지만 당신은 주저하지 않고 불을 댕긴다. 라이터의 가스 조절장치를 활짝 열고 말이다. 거미는 그대로 욕실 바닥으로 추락해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도주한다. 거미털 타는 냄새가 연하게 피어난다. 당신은 등산화를 들어 도망자를 겨냥했다가 그만두었다. 거미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도마뱀 한 마리도 그 서슬에 벽을 타고 사라진다.

거미는 반드시 복수를 합니다. 당신의 무용담에 게스트 하우스의 직원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때 당신은 거미가 어미의 몸을 파먹고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다. 불로 지진 거미의 새끼들이 당신의 침대 주위로 새카맣게 몰려드는 상상에 몸서리도 쳐본다. 당신은 에어졸 살충제와 모기향을 준비하고 모기장 속으로 기어든다. 알고 보면 당신은 아주 겁이 많은 자다.

그날 밤 당신은 기어이 아팠다. 다음날 무거운 몸을 일으키다 다시 누워버린 당신은 그날의 여정을 포기한다. 거미의 복수인가. 당신의 실없는 피해망상은 그칠 줄을 모른다. 신열이 나고 식은땀이 흐른다. 밖에는 스콜이 쏟아붓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 위론 말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파서일까. 여행 떠난 뒤 처음으로 여자가 그리웠다. 줄이 팽팽하게 조여진 기타 같은 여자 말이다. 기어이 목이 부러지고야 말았을까. 여자의 엄마는 또다시 자살기도를 했을까. 이번에는 성공했을까. 당신은 다시 생각한다. 어쩌다 그 두 여자가 당신 삶에 틈입하도록 내버려두었을까. 어쩌면 내가 그 여자들을 불러들인 것은 아닌가. 그릇이 덜컥거려 이 모든 일이 빚어진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이 그릇을 덜컥거린 것은 아닌가. 무엇이 먼저인가. 당신은 혼란스러웠다. 분명한 것은 지금 당신이 그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고 아주 잠시 그들을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당신이 그러는 사이에도 그릇의 덜컥임이 야기한 일련의 사태는 계속되고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이 가져다 준 영자신문 일면에는 프놈펜에서 발생한 세 건의 폭탄 테러 기사와 사진이 올라 있었다. 총선의 승리자 훈센을 노린 반대파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했다. 이어 전개된 시위에서 승려 두 명이 총에 맞아 피살당했고 물대포와 총, 탱크가 진압에 동원되었다 한다. 인도에선 기차가 벼랑으로 굴러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하고 스위스항공의 여객기가 캐나다에 추락해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고 한다.



10

여자가 안락의자에 앉아 당신의 눈길을 피하고 있다. 임상심리사인 당신은 로샤하 테스트를 그녀에게 실시하는 참이다. 이 그림이 뭘로 보입니까? 당신이 펼쳐든 카드에는 잉크가 번져 만들어낸 무의미한 그림들이 의미를 얻으려 하고 있었다. 벌거벗은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네요. 여자는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여자의 질 같기도 하구요. 여자가 덧붙였다. 환자들의 그런 반응이 처음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그림에서 나비나 박쥐를 본다. 당신은 그녀의 반응을 꼼꼼히 기록한다. 그녀가 그림의 세부를 보는지 전체를 보는지, 여백을 전경(前景)으로 보는지 배경으로 보는지, 따위까지.

당신은 계속해서 다른 카드를 내민다. 이건 뭘로 보이시나요. 두 사람의 식인종이 한 여자를 잡아먹고 있네요. 왜 그렇게 보셨나요? 당신의 질문에 여자는 긴 손톱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보세요. 가운데 있는 여자가 거꾸로 들려 있잖아요. 그리고 두 사람이 그 여자의 다리를 붙잡고 있구요. 뭘 하려고 그러겠어요. 잡아먹으려는 거지요. 사람을 잡아먹는 건 누구겠어요. 식인종이죠.

치료는 당신의 일이 아니다. 당신은 그저 정확히 기록하고 판단하여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면 그뿐이다. 당신은 계속 꼼꼼히 그녀의 대답을 받아적는다. 열 장째의 카드를 내밀었을 때, 여자가 말했다. 열 장째니까 그게 끝이죠? 그 유치한 테스트들은 언제 없어지죠? 로샤하, MMPI, TAT 따위 말이에요. 나는 그 무수한 문항들에 대답했지만 나아진 건 없었어요. 로샤하 테스트라는 그룹사운드가 있는 거 알아요? 그 사람들 음악 들어봤어요? 앤디 워홀이 1984년에 로샤하 테스트라는 그림을 그렸던 건 알고 있나요? 유치한 그림이에요. 쓱쓱 물감들을 뿌리고 그걸 반으로 접으면 끝나는 거죠. 물론 완벽한 대칭, 그러면서 무의미한 그림이 되겠죠. 그걸 보면서 박쥐를 상상하든 여자의 질을 상상하든 그게 무슨 무의식을 드러내주나요? 드러내주면 또 무슨 도움이 되나요. 당신들이 아는 만큼 나도 알아요. 그러니 쓸데없는 그래프는 그만 그려요.

4년 경력의 당신은 당황하고 있다. 워홀이 누구인지 알 바 없는 당신이지만 환자가 테스트를 꿰고 있다면 당신이 여자에게 실시한 테스트들은 종이쪼가리가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테스트를 중단할 수도 없다. 당신에겐 그럴 권한이 없다. 담당 의사는 검사 결과를 요구할 것이고 당신은 제출할 의무가 있다.

그렇다면 뭐 하러 병원에 왔습니까? 당신은 여자에게 묻는다. 여자는 대답한다. 말이 하고 싶어서겠죠. 버림받은 엄마와 이혼한 딸이 한 집에 살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며 따스한 말을 나누며 살게 될까요? 결혼한 친구들이 독신 생활의 즐거움을 얻어 나누려고 앞다투어 제게 전화를 걸어올까요? 집에는 칼이 너무 많아요. 두 그루의 식칼과 한 그루의 과도, 그 칼을 가는 전동 칼갈이도 있구요. 우리 집은 13층이에요. 내려다보면 밑이 아득하죠. 5층쯤이 제일 두려워요. 13층쯤 되면 높이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죠. 난 하루에 한 번씩은 아래를 내려다봐요. 저희 집 개도 저를 싫어해요. 동네 사람들은 반상회 때도 연락을 안 하죠.

당신은 여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여자는 정신과 계통의 사람들이 반쯤은 미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어떤 말이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지도 꿰고 있었다. 테스트를 교란했고 그래프를 얽어놓았다. 정신분열과 망상과 우울증이 결합된 중증의 결과 뒤에는 경계선 성격장애 정도로 평가될 결과를 만들어 내놓았고 인터뷰에선 일순 논리적이다가 돌연 종잡을 수 없는 횡설수설로 상담자를 오도했다.

씨앗이 당신 머리에 내려와 앉은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11

환자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당신의 선배들은 누누이 말해주었다. 당신은 그 룰을 어겼다. 환자들은 굶주린 독사와 같아. 조금만 빈틈을 줘도 물고 자기가 공격을 당해도 물고. 그러니 언제나 적절한 거리를 지켜야 해. 당신은 충고를 저버렸다. 여자는 자주 찾아왔다. 당신은 나를 치료하려 하지 않아서 좋아요. 이빨이 목에 박히는 걸 느끼면서도 당신은 여자를 뿌리치지 못했다.

강남의 한 술집에서 당신과 그녀가 술을 마시고 있다. 당신은 말한다. 어렸을 적 우리 집 앞엔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죠. 밤이 되면 가지의 그림자가 커튼에서 흔들거렸는데 나는 언젠가 그 나무가 집을 뚫고 들어오리라는 망상에 시달렸어요. 나뭇가지에 매달린 말벌집에서는 말벌들이 윙윙대며 날아다녔고 아버지가 키우던 꿀벌들은 말벌들에게 몰살당했죠. 말벌 한 마리가 족히 수백 마리를 물어 죽이는데도 꿀벌들은 맹목적으로 달려들어 싸웁니다. 언제부터 그들은 싸웠을까요? 내가 태어나기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겠죠. 아마도 그들의 유전자엔 그 싸움이 각인되어 있을 겁니다.

술이 더해가자 누가 상담자였고 피상담자였는지 불분명해졌다. 그 경계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당신과 여자는 침대 위에 있었다. 말이 필요없는 상태에서 당신과 여자는 편안했다. 여자는 엄마처럼 당신을 어루만져주었다. 젖을 물려주었고 당신을 씻어주었다. 섹스에 미숙한 당신을 다독여가며 길을 들였다. 겁내지 말아요.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사람들의 얘기를 너무 많이 듣고 살아서 그래요. 모든 환자들은 거짓말을 해요. 그들은 의사가 자신을 정상인으로 보아주길 바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수백 가지 질문들 속에 섞여 있는 가짜 질문에 넘어가죠. 날마다 일간신문의 사설을 읽는다, 같은 항목에 동그라미를 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더욱 신뢰를 의심받고, 아, 정신과는 정말 지겨운 곳이죠? 당신의 얘기를 해요. 사람들 얘기는 이제 그만 들어요.

그제야 당신은 평생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느라 세월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고 그게 부끄러워서 여자를 끌어당겼다. 여자의 이빨과 당신의 이빨이 부딪혔고 팔과 무릎이 교차되었다. 어디선가 괘종시계 소리가 들려왔고 여자가 당신의 정액을 삼켰고 당신은 여자의 머리채를 그러잡았다. 질펀한 정사 뒤에 당신과 여자는 나무처럼 서로를 얽은 채로 잠이 들었다.



12

여자의 상태는 현저히 호전되었다. 약이 없이도 잠들 수 있었고 환청도 사라졌고 울증도 가라앉았다.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생겨서인지 아니면 섹스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는 당신에게 탐닉했고 당신은 여자를 떠나지 않았다. 여자와 함께했던 두 번의 여행도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가끔 자기 방에 틀어박히곤 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여자에겐 미약한 히스테리아 증세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때의 여자에겐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히스테리아들이 그러하듯이 여자 역시 드라마틱한 전개를 좋아해서 가끔 당신을 기분 좋게 놀라게 해주었다. 저녁 식탁에 와인과 촛불이 올라오는가 하면 아무도 입지 못할 대담한 옷을 입고 당신을 기다렸다.

여자의 상태가 좋아질수록 당신은 불안을 느꼈다. 여자는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이 당신이 불안을 더 가속했다. 씨앗은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가지는 이미 훌쩍 자라나 당신 창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는 심하게 흔들렸다. 당신은 여자가 환자일 때가 더 좋았다고 추억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집착은 완강했고 모든 환자와의 관계를 의심했고 섹스는 더 격렬해졌고 전화와 삐삐가 잦아졌다.

먼저 결별을 선언한 건 당신이었다. 여자는 한 번은 자신을, 두 번은 당신을 죽이려 했다. 여자는 울지 않았다. 대신 칼을 들었다. 당신이 여자를 떠나려 할 때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한 번의 과도는 당신의 목을 비켜 어깨를 찔렀고 다음번의 주머니칼은 허벅지를 스쳤다. 그때마다 당신은 주저앉았다. 그런 다음 날이면 여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얼굴로 당신을 맞았다. 당신의 온몸을 혀로 핥고 대대적으로 집 안을 청소했고 멋진 메뉴들을 차려냈다.

이젠 당신이 서서히 미쳐가는 것 같았다. 그 생활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더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몰랐다. 당신은 지방 대학의 상담소로 자리를 옮겼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두 달 만에 여자는 당신을 찾아냈다. 다시 치료를 받고 있어요. 의사가 당신을 놓아주래요.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대요. 아침마다 명상원에 나가요. 마음이 넉넉해져요. 당신도 해봐요. 이제 당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어요. 남자도 생겼어요.

여자는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은 흔들렸다. 여자가 돌아간 지 이틀 만에 당신은 여자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13

나무를 보고 있는 당신 앞으로 주황색 장삼을 걸친 맨발의 승려가 지나가다 멈춘다. 승려가 짧은 영어로 말을 붙여온다. 뭘 보는가. 당신은 손을 모으고 대답한다. 나무를 봅니다. 승려는 장삼을 치켜올리며 다시 묻는다. 나무에서 뭘 보는가. 당신은 다시 대답한다. 시간을 봅니다. 서로의 영어가 짧으니 대화는 자연 선문답을 닮아간다. 승려는 대꾸하지 않고 당신이 앉아 있는 등걸 위에 함께 몸을 붙인다. 더운 바람이 훅 하고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간다. 그 사이 승려는 바랑에서 꺼낸 음식을 오른손으로 주섬주섬 집어먹는다. 먹겠는가. 당신은 사양하지만 그의 손은 물러날 줄 모른다. 역한 향료 냄새가 당신의 코를 찌른다. 당신은 받아 먹는다.

나무가 무섭습니다. 당신의 말에 승려는 웃는다. 거대한 석조 불상의 틈새에 자신의 뿌리를 밀어넣어 수백 년 간 서서히 바수어온 나무를 보며 승려는 반문한다. 나무가 왜 무서운가? 이곳의 나무들이 불상과 사원을 짓누르며 부수어나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승려는 보시음식을 싼 기름종이를 다시 바랑에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무가 돌을 부수는가, 아니면 돌이 나무 가는 길을 막고 있는가. 승려는 나무 뿌리에 휘감긴 불상을 향해 합장을 하며 말을 이어간다.

세상 어디는 그렇지 않은가. 모든 사물의 틈새에는 그것을 부술 씨앗들이 자라고 있다네. 지금은 이런 모습이 이곳 타 프롬 사원에만 남아 있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밀림에서 뻗어나온 나무들이 앙코르의 모든 사원을 뒤덮고 있었지. 바람이 휭 하니 불어와 승려의 장삼을 펄럭였고 당신의 땀을 증발시켰다. 승려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그때까지 나무는 두 가지 일을 했다네. 하나는 뿌리로 불상과 사원을 부수는 일이요, 또 하나는 그 뿌리로 사원과 불상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도록 버텨주는 일이라네. 그렇게 나무와 부처가 서로 얽혀 9백 년을 견뎠다네. 여기 돌은 부서지기 쉬운 사암이어서 이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흙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 사람살이가 다 그렇지 않은가.

캄보디아의 노승은 해맑게 웃었다. 크메르 루즈의 학살을 견딘 승려는 불과 수백이었다. 나이로 미루어 그는 프랑스 식민지배와 론놀과 크메르 루즈와 베트남의 침공과 최근의 내전을 겪어내었을 것이다. 끝내 살아남았고 이렇게 사원 근처에서 불교도와 관광객의 보시로 연명하고 있다. 그런 그가 부처를 쪼개는 나무를 어루만지더니 휘적휘적 갈 길로 가버렸다. 당신은 다시 나무를 본다. 나무는 대꾸가 없다.



14

승려가 가버린 뒤에도 당신은 타 프롬 사원에 앉아 나무를 본다. 검은 나비 두 마리가 펄럭이며 당신 머리 위를 지나간다. 문득 하나의 의문이 튀어오른다. 혹, 당신이 그녀의 나무는 아니었는가. 상담자라는 지위가 가진 매력을 후광 효과 삼아 여자를 유혹하고 당신이 편안할 때마다 섹스 파트너로 삼았던 것은 아닌가. 오히려 치료를 받았던 건 당신이 아니었는가. 여자의 히스테리아는 당신이 도망칠 좋은 구실이 되었던 건 아니었나. 당신이 내뱉은 말들은 그녀가 휘두른 과도보다 더 위험한 건 아니었을까. 과연 누가 나무이고 누가 부처인가.

당신은 오토바이를 타고 천천히 숙소로 돌아온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캄보디아인들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있다. 그들을 지나쳐 당신은 천천히 숙소로 들어선다. 로비에 켜져 있는 CNN 위성방송에서 과학 뉴스 한 조각이 흘러나오고 있다. 뉴스는 그릇의 덜컥임이 야기한 최종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마젤란 운하에서 초신성이 폭발했다는, 1604년 케플러가 발견한 초신성에 맞먹는 밝기였다는 기사. 그릇이 덜컥였고 그 때문에 여자가 당신을 떠났고 한 여자가 자살을 기도했고 아파트 한 동이 가스 폭발로 날아갔고 프놈펜에서 세 발의 폭탄이 터지고 캐나다에선 비행기가 떨어졌고 그 모든 일들이 종국엔 수억 광년 너머에 있는 별을 폭발시켰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별로 놀랍지 않다. 수억 광년 너머의 폭발이 관측되었다면 그 폭발은 이미 수억 년 전에 발생했으리라는 과학 상식도 당신의 신념을 교정하지는 못한다. 단지 당신은 이렇게 타협한다. 어쩌면 그 별의 폭발이 당신 방의 그릇을 덜컥였을 것이라고. 수억 년 동안 날아온 성간 먼지의 파편들이 지구에 도달하여 당신과 수많은 사람들의 그릇을 건드렸으리라고.

그렇게 믿으면서 당신은 한 여자에게 전화를 건다. 자신이 뿌리를 내려 머리를 두 쪽으로 쪼개버린 한 여자에게 말이다. 네 몸이 그립다. 안고 싶고 빨고 싶고 네 속으로 들어가 또아리를 틀고 싶다. 나무와 부처처럼 서로를 서서히 깨뜨리면서, 서로를 지탱하면서 살고 싶다. 여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잘못 건 전화인지도 몰랐다. 당신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여장을 꾸려 앙코르를 떠났다. 당신의 시간이 다시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