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로만 Narrative

[단편소설] 갈매기 - 이윤기

버블건 2007. 11. 17. 10:53

갈매기

이윤기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갈매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바닷가로 나가  갈매기와 놀았다. 갈매기는 그를 도무지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날아와 함께 놀아주었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이웃사람들로부터 그 소문을 듣고는 아들에게, 내 들으니 너는 매양 바닷가로  나가 갈매기를 벗삼아 논다고  하니, 나도 갈매기와 놀고  싶다. 그러니 몇마리 잡아 와서 나도 재미있게 놀게 해다오, 하고 말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리 하겠다고 하고는 바닷가로 나갔다. 그러나 갈매기는 그의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더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그는, 백구야, 날지를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이런  노래를 불렀지만 갈매기는 끝내 그의 곁으로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지어낸 말이 아니다.
  "마음에는 늘 중심을 오로지하여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으니 이를 항심이라고 하거니와, 기회를 엿보아 사특하게 움직이는 교사한 마음이 있으니 이를 기심이라고 한다. 네가  어떤 마음으로 어찌 사는지, 그것은 갈매기에게 물을 일이다."
  이것은 그가 취중에 지어낸 말이다.
  이것은 그가 술을 마시는 까닭이 되기도 한다.
  그는 오피스텔에 산다.
  주차장에는 소형차, 대형차,  외국제 스포츠카가 뒤섞여 있어서 입주자들의 살림  규모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게 하는 오피스텔, 지하는  음식점과 술집이, 옥상은 스카이라운지가 점령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술  취한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오피스텔, 지하와 옥상의 영업이 끝날 즈음  승강기가 가장 붐비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밤새 불이 켜져 있는 방이 아파트보다 훨씬 많은 그런  오피스텔이다. 결혼한 친구들은 그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그를 찾아올 때면, 야, 이놈의 오피스텔에만 들어서면 타락이 하고 싶어서 온몸이 다 근질거린다, 하면서 부러워한다.
  그런 그가 갈매기를 기다린다.
  그는 아파트 삼아 살고 있는 오피스텔 510호에서 술상을 사이에 두고 갈매기와 마주앉는 순간을  꿈꾼다. 갈매기가 초대에 응하면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하루 종일 그를 들뜨게  한다. 그는, 갈매기 역시 들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대에 응하기만 한다면 갈매기는 옥상  라운지에서 배달한 생일 만찬 대접에다 생일 선물까지 받을 수 있을 터이다.
  갈매기는 과연 올 것인가.
  종일 그의 뇌리를 맴도는 질문이다.
  그의 방 510호는 오피스텔  5층 복도 맨 끝에 있다. 승강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 복도 위아래는 천장과 바닥, 좌우는 벽 아니면 철문이어서 발자국 소리가 늘  카랑카랑하게 들린다. 그는, 발자국소리 식별에 일가견이 있다. 승강기  근처에 있는 방 임자의 발자국소리까지는 몰라도  비교적 가까이 있는 6, 7, 8, 9호 임자의  발자국소리는 어지간히 식별할 정도가 되어 있다. 6호  입주자들은 발자국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다. 자정 가까운 시각에 복도가 왁자지껄해지면 영락없이  지하 카페에서 돈 받고 손님들과 술 같이 마셔주고 돌아오는 6호 트리오다. 술 얻어먹고 돈  받는 것이 무안해서 그러는지, 그들의 입은 문 딸  동안도 쉬는 법이 없다. 평일 오후 7시경에 들려오는 뾰족 구두 소리 주인은, 평일에는 캐주얼  구두를 신는 법이 없는 옷가게 여주인 7호, 일요일 밤늦어서 들려오는  투박한 구둣소리 주인은, 하산주 어울려 마시는 재미로 일요 산행 다닌다는 홀아비 화가 8호, 타박거리는 소리를  부록으로 달고 다니는  가죽 슬리퍼 소리는,  시집식구들 들이닥칠까봐 아이 떼어놓고 다니는 법이 없는 이혼녀 9호, 9호  앞에서도 멎지 않고 계속해서 가다가 문 앞에서 딱 멎는 소리가 있으면 영락없이 10호, 바로 그가 사는 510호 내방객이다. 발자국소리가  방 앞에서 멎을 경우, 문 앞에 선 사람을 어림짐작하는 수도 있다. 발자국소리  멎기가 무섭게 초인종소리가 나면 가까운 친구, 발자국소리 멎고 나서도  초인종소리가 나기까지 숨을 한두 번 내쉬고 들이쉴 여유가 있으면 초행 손님 아니면 외판원인 것이 보통이다. 지하 음식점 배달원들의 발자국소리에는  그릇 달각거리는 소리, 철가방 삐걱거리는 소리가 섞인다.
  그가 기다리는 소리는, 8호 앞에서도 9호 앞에서도 멎지  않고 10호 앞까지 이어질, 간격이 일정하게 긴  하이힐 소리, 그리고 그 소리가 멎고 나서 숨 서너  번 내쉴 동안이 지난  다음에 들려올 수동식 배꼽  초인종소리다. 갈매기는 다리가 길고 걷는  훈련을 특별하게 받았을 터이니 발자국소리의 간격이 일정하게 길  것이고, 문 앞에서 옷매무새를  바로 잡을 터이니, 그 뜸이 조금 더 길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어떤 일에 대한  예감으로 흥분해 있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느끼는  법이다. 번번이 복도 중간중간에서 끊어져버리고는  하지만 그는 발자국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 위로 뜨거운 물이 한 방울씩 뚝뚝 듣는 듯한 느낌과 비슷한, 기대와 불안이 반반씩  섞인 착잡한 느낌에 시달린다. 갈매기가 초대에  응하면 둘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될지도 모른다.
  ...갈매기야, 훨훨 날지를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갈매기여, 푸른 물에 그림자 드리우는 기미 아는 새여.
  그에게 갈매기는 기심과 항심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갈매기>와 처음 만난 것은 반년 전 오피스텔의  승강기 안에서다. 그가 미국으로 출장을 떠나는 날이었다.  비행기 떠나는 시각은 오전 10시, 적어도 8시까지 공항에  도착하자면 7시에, 도중에 있을지도 모르는 교통  체증을 감안한다면 그 전에 오피스텔을 나서야 했다.
  그는 가방을 끌고 나와  승강기 앞에 섰다. 그러나 짝수 층  승강기는 오르내리는데 그가 타야 할 홀수 층 승강기는 먹통이었다.  한쪽 승강기에 이상이 생기면 다를 승강기를 전층  운행 체계로 바꾸는 것이 오피스텔의 관례다. 그날은 이른 시각이라  관리자들이 미처 손을 쓰지 못했던 모양인가. 그는 가방을 끌고  4층으로 내려가 짝수 층 승강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승강기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그는 전날  밤 혼자 마신 술의 숙취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위층에서 승강기를 타고 내려온, 쭉 뻗은 다리로 보아 젊은 숙녀임에 분명할 터인 앞사람에게  눈인사 건네기가 망설여졌던 것도 눈 때문이다.  그래서 눈을 내리깔고 있는데 문득 그의 눈에 여자 옆에 서 있는 가방이 낯익어 보였다. 무리지어 다니는  것이 보통인, 항공기 여승무원들이 끌고 다니는, 조그만 화장 가방이 매달린 검은 옷가방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맨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날개를 편, 갈매기 같기도 하고  독수리 같기도 한 항공사의 하얀 휘장, 그리고 그 다음  눈에 들어온 것이 항공사  제복 위로 솟은 불룩한  젖가슴이었다. 자신이 일본을 경유해서 미국까지 타고갈 항공기의 소속 항공사 휘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인사를  건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술기운이 남아  있을 동안은 수줍음을 몹시 타는 자칭 특이 체질의 소유자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탑승권의 봉투  노릇을 하는, 항공사 수송 약관이 찍힌 팸플릿을 꺼내어 하얀  휘장이 팔랑거릴 만큼 흔들어 보였다. 건네도 자연스러웠을 터인, 우연의 일치를 반가워하는 인사는 수줍어서 건네지 못했다. 여자는 그가 보내는 무언의 인사를 곧 알아들었다.
  "열시 비행기죠? 네, 같은 비행기예요, 안녕하세요?"
  여자가 웃었다. 그가 항공기 안에서  흔히 보던, 연습이 잘 된 함박꽃 같은 웃음이었다. 여자가 웃자 수박 껍질이나 지초 잎에서  나는 것과 비슷한 향수 냄새에 섞여 달콤한 술 냄새가 났다. 자기 입에서  날 터인 역한 냄새와는 달랐다.
  같은 택시로 갑시다, 성질 급한  사람이 택시 요금 내고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여자가 같은 오피스텔에 사는 남자와 얼굴 익히게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려 말이 되지 못했다. 여자는 승강기를 나서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오피스텔을 나서서 길을 건너갔다. 그는 짐이  만만치 않아서 길 건널 염두를 내지  못하고 오피스텔 앞에서 택시를 잡아야 했다.
  그는 항공기가 동해상으로  빠지기까지는 여자를 떠올리지 못했다.  까다로운 출국 수속과, 이륙하고 급상승해서  순항 고도에 이르기까지  항공기 자체가 주는 긴장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내 승무원들이  일본 입국신고서를 나누어주고 있을 즈음이었으나 아마 동해를 거의 건넌 시각이었을 것이다. 그는, 신문을 읽고 있다가  문득 코끝을 스치는 수박 껍질이나 지초 잎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한,  시원하게 향긋한 냄새를 맡고는 고개를 들었다. 역시 맨 먼저 갈매기 날개 같기도  하고 독수리 날개 같기도 한 하얀 휘장이 눈에 들어오고 이어서 불룩한 젖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입국신고서 필요하지 않으세요?"
  오피스텔 승강기에서 만났던, 가슴에  하얀 날개 휘장을 단 여자였다. 날개 휘장을 단  여자는 그가, 아항, 갈매기로구나, 하는  순간에 <갈매기>가 되었다.
  "아, 역시 그랬군요.  내 목적지는 일본이 아니고 미국인걸요.  그런데 택시비 절약하고 싶지 않던가요? 나는 성질이 급한데..."
  그가 긴 분장을  써서 말한다는 것은 숙취에서  완전히 깨어났다는 뜻이다. 그에게는 취중에 참고 있던 말을 성시에 쏟아내는 버릇이 있다.
  "늦잠 자는 바람에 분초가 급한 판이었어요. 외국 항공사, 느슨해 보여도 규칙이 되게 엄하거든요. 늘 저희 항공사 이용하세요?"
  <갈매기>는 상대의 시선을 의식했던지 부채처럼 펼쳐 쥔 입국신고서 용지로, 움직일 때마다  그의 눈 높이에서 출렁거리는 가슴을 가리면서  물었다.
  "거의 그런 셈입니다. 좋은 점이 있거든요. 한국과 일본 구간을 담당하는 스튜어디스들은 꽃다운 아가씨들이지만,  일본과 미국 구간을 담당하는  스튜어디스들은 연세들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거든요."
  "세상에... 젊은 한국 스튜어디스보다 연세 지긋한  미국 아주머니들을 더 좋아하시는 분도 다 있네요?"
  "연세 지긋한 스튜어디스의  서비스를 받으면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거든요."
  "누님들 같아서요?"
  "그것은 아니고요, 스튜어디스가 그 나이 될  때까지 줄기차게 뛰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회사 항공기가 안전하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늙수그레한 기내 승무원만큼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은 없답니다.  수호이 기가 미사일을 달고 오기까지는..."
  "...적절한 농담은 아니네요, 일본 입국 안 하신다고 했죠?"
  그는,  일본 입국신고서  용지를 거두어들고  다음 좌석으로  돌아서면서 <갈매기>가 살짝 찌그러뜨리는  곱지 않은 눈초리를 보고서야  비로소, 아뿔싸, 했다. 아닌게아니라 4만 피트 상공에서,  그것도 젊디젊은 스튜어디스를 상대로 한 농담으로는 적절하지 못했구나 싶었다. 그는, 취해 있을 때는 얌전하다가도 술에서 깨어나면 하는  짓이나 말이 턱없이 활달해지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갈매기>는  서울과 동경  구간의 탑승 근무를  마치고는 인사도 없이 나리타에서 내렸고 그는 두어 시간 나리타 대합실에서 자투리 시간을 죽이다가, 스튜어디스만 미국인으로 바뀐 같은 항공기  편으로 미국으로 갔다.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뒤로  그는 <갈매기>의 안부를 궁금해한 적이 두어 번 있고 어디에 산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뿐,  더불어 어울릴 상대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갈매기>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근 한  달 뒤인 어느 일요일의 느지막한 아침,  그가 <갈매기>를 우연히 다시 만난 곳은 여자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도 오피스텔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복국집이었다. 오피스텔 바로 뒤에  있는 복국집은 정기휴일이어서 그가 물어물어  찾아간 데가 바로 그 집이었다. 그가  복국집으로 들어섰을 때 <갈매기>는 마악 계산대를 돌아나오고  있었다. 그는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 것이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연한 만남에 부여되는 의미는,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에  따라 우연성의 가치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 횟수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는 얼굴이 붉어질 만큼 반가워했는데도 불구하고 <갈매기> 쪽에서는 전혀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은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갈매기>는, 여자가 지니는 경계 본능으로 반가운 마음을 가린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다. 제복 차림이 아닌 <갈매기>는  큰 키가 조금 돋보일 뿐, 수더분한 것이 여느 처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그로서는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이 주는 선입견과  의상이 과연 날개는 날개로구나 싶었다.
  <갈매기>가 뜻밖의 질문을 했다.
  "혼자신가요?"
  그가 너무 반가워한 것이 무안해서 말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갈매기>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혼자 오는 사람에게는 팔지  않는대요. 재료값이 워낙 비싸서 1인분은 팔지 못한다면서 이렇게 쫓아내네요..."
  그 역시, 그렇구나, 싶어서 돌아서려는데 안주인이, 아시는  사이면 두 분이 합석하시면 되잖아요, 하면서  구석 자리를 가리켰다. 웬만한 여자 같으면 발끈했을 텐데도  <갈매기>는 전혀 불쾌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얼굴  화장이 지워진 <갈매기>는 수더분한  외모에 어울리면서도 나이답지 않게 속도 무던한 여자 같아 보였다.
  그는, <갈매기>를 자리로 안내하는 시늉을 하면서 안주인을 나무랐다.
  "아니, 머리가 그렇게  좋은 분이 이렇게 아름다운 손님을  쫓아내요? 오피스텔 근처 음식점이  혼자 오는 사람 쫓아내면  누구 데리고 장사하자는 건가요. 매운탕... 매운탕  하실 거죠... 2인분 주세요...  건강에 안 좋다니까 알은 빼고요..."
  "농담, 늘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하세요?"
  <갈매기>가 의자를 뽑아 앉으면서 혼자말하듯이 물었다.
  "늘 그런 것은 아니고요,  농담의 페이스 조절에 서툴러... 그래서 맨정신일 때는 오버액션 투성이랍니다."
  "취해 있을 때는요?"
  "액션이 영 없어지지요."
  "왜요?"
  "못 하는 거죠."
  "그건 또 왜 그렇죠?"
  "소화가 안 되니까..."
  "술이, 말인가요?"
  "아뇨, 액션이..."
  "복잡하네요."
  "...하지요. 6층 살지요?"
  "어떻게..."
  "지난번 승강기 타는  걸 보고 알았지요. 짝수 층 전용  승강기에서 만나지 않았어요?"
  "짝수 층에 6층만 있는 것은 아니죠."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아침, 승강기가 멎은 곳은 6층이었는걸요."
  "우리... 처음... 근사하네요."
  "610호라는 것도 아는데?"
  "아니, 어떻게요? 뒷조사하셨어요?"
  "아뇨, 6층의 김 아무개가 몇호에 사느냐... 우편함에 꽂힌 전화요금 청구서 한 차례 훑어보면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제 이름은 또?"
  "기내 근무할 때 명찰 안 달았어요?"
  "...무섭네요. 오늘 그럼, 미행당한 건가요?"
  "천만에... 그런 능력  있으면 이 나이까지 이러고 있겠어요?  사실은 608호의, 출장 중인  내 친구의 우편물 정리를 대신해주고 있어요. 내가 출장 중일 때는 그 친구가 내 것을 정리해주거든요. 우편함  몇개 훑어봤더니 바로 답이 나옵디다. 경계할 것은 없어요. 나잇값은 하는 사람이니까."
  "..."
  "나는 510호 살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
  "한밤중에 610호가 좌변기 물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산다는 뜻이에요. 이만하면 다정한 이웃 아닌가요?"
  "농담의 페이스 조절, 정말 잘 안되는 모양이군요?"
  "승강기에서 만나고, 비행기에서 만나고, 좌변기 플러싱하는 소리 듣다가 복국집에서 또 이렇게 만나고...  우연의 일치가 세 번씩이나 겹친다... 인연이 있어서 이런 것이 아닌가 몰라..."
  "우연의 일치는 한 번뿐이죠. 나머지는 필연적인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이고요."
  "한 번뿐이다... 그러면 그것은요?"
  "오피스텔... 나머지는 오피스텔을 중심으로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유사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거 아닐까 싶은데요?"
  "결국은 이 땅에 함께 사는 것부터가  우연의 일치이다, 나머지는 유사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뜻인 모양인데... 그러면 이래도 되겠네요? 우연의 일치 같은 것을 두고 호들갑 떨 것은 없다?"
  "호들갑 떤다고까지는 안 했는데..."
  복국집 나설 때, 계산은 그가 치렀다.
  "신세졌어요... 이런 자리 또 생기면 한번 갚을게요."
  <갈매기>의, 빈말 같지 않게 푸근한 인사에  그는, 만들면 되잖아요...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필경은 해장하느라고 마신 몇잔의  술 때문이겠지만, 그는 자기 말이 일으킬 파장을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머뭇거리느라고 끝내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자연이 매우 자연스럽지 못하게 된 이 시대에도, 혼자  사는 남자와 혼자 사는 여자가 서로를 기웃거리는 것은 여전히 자연스럽다. 그 사는 데가, 이런 것을 부추기는 곳이기도 하다. 혼자 여행을 떠나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여행자는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난 자신을 위해 타향이  혹은 타국이 어쩌면 달콤한 드라마 한 편을 마련하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 같기도 하고 환상 같기도 한 것에 빠지고는 한다. 무엇인가가 기다릴  것이라는 들뜬 예감이 이런  착각을 부추기기도 한다. 여행자중에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 드라마를 무리하게  연출하려는 여행자가 있는가 하면, 이 착각과  환상의 실체를 꿰뚫어보고 마음의 고삐를 다잡는 여행자도 있다. 그 사는 데가, 그런 여행지와 비슷한 곳이다.  그리고 그는, 여행자로 말하자면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가 <갈매기>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여러 번 있다.  그러나 만나는 데 필요한 어떤  노력도 기울인 적이 없고, 어떤 행동도  시도한 적이 없다. 전화번호를 물어본  적도 없고, 610호 우편함에다 메모를 남긴 적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연이 닿아서 된 것이든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만난 것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가 된다. 그는 처음에는  두 사람이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은  식성이 비슷하고, 동선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날, 그에게 갈매기는 여느 여자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갈매기를 부를 수 없었다.
  막연한 것이나마  드라마에 대한 예감이라면  그에게도 없었을 리  없다.
그 러나 드라마는 연출을  통해서 진행된다. 연출이 무엇인가? 연출은  책략인데, 그는 책략을 쓰지 못한다.  바닷가 사람이 더 이상 갈매기를 부를 수 없게 된  사연이 그의 정신에는 맹독처럼  퍼져 있다. 명저라고 불리는  책 한 권, 명구라고 불리는 옛말 한 토막은, 그것을 완화시키는 끊임없는 공부가 뒤따르지  않을 때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거기에 걸려 있는 고압의 전하가 그것을 대한 사람에게는 끝없는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바닷가에서  갈매기와 놀던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갈매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기심을 읽은 갈매기가 오지 않아서 더 이상은 갈매기를  잡을 수도, 더 이상은  갈매기와 놀 수도  없게 된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도 없고  바닷가로 나갈 수도 없어서 술집으로 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술집에서 술을 마실 때만 갈매기와 놀던 꿈에 잠길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갈매기와의 드라마를 한 장면도 연출할 수 없는 까닭, 그가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바닷가 사람 이야기를 했을 때 갈매기는 말했다.
  "저도 비번일 때면 밤마다 취하도록 술을 마셔요."
  "왜요?"
  그는 그제야 승강기에서 만나던  날 아침 <갈매기>의 입에서 향긋한 술 냄새가 나던 까닭,  복국집에서, 연쇄점 주류 코너에서,  해장국집에서 갈매기와 자주 만나게 되는 까닭을 이해했다.
  "바닷가의 착한 사람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아서...는 아니고요. 저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어요."
  "왜요?"
  "설명할 수 없는 까닭까지 설명해야 하나요?"
  "그럽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과 술집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왜요?"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아야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있는데, 취하면, 아버지 명에 못  이겨 갈매기를 잡으러 나가는  바닷가 사람이 되고 말아요.  가야 하는데 갈매기가 오지 않아서 갈 수도 없고, 가지  말아야 하는데 아버지의 명을 거절할 수 없어서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말지요. 이 짓을 해도 이게 아닌 것 같고  저 짓을 해도 저게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내 몸은 굳어지고 말지요. 이 말을 해도  이제 아닌 것 같고, 저 말을 해도 저게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내  혀가 굳어지고 말지요. 이렇게 떠들어대는 내가 싫어서 마시고, 마시면 몸과 마음이 굳어지는 게 싫어서 끊고... 술을 안 마시면 술 마시는 내가 덤벼들고,  술을 마시면 술  안 마시는 내가  덤벼들고..."
  "저 같으면 마시겠어요."
  두 사람의 술집 동행은 이것이 처음이다.
  두 사람이 두 번째로 술을 마신 날은, 그가 날짜까지 기억하는, 그해 9월 1일이었다.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그의 생일이기도 했다. 연쇄점에서  혼자 마실 거리 먹을 거리를 준비해가지고  들어오는데 경비실에서 메모가 남아 있다고 했다. 밤에 함께  술을 마시지 않겠느냐는 갈매기의 메모와 직장의 전화번호였다. 갈매기가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거나 추적할 수 없을 터이니, 우연의 일치이거니 했다.
  좋은 친구 노릇이 좋은 의사를  겸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술자리에 어울린 갈매기가 그랬다. 갈매기는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었을 뿐, 그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갈매기는 호텔 찻집에 먼저 날아와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이 기념할 만한 날이라는 것을?"
  "뭘요?"
  갈매기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표정이 밝지 않아서  여느 때의 갈매기 같아 보이지 않았다.
  "같이 마시자는  사람 끊어진 지도 오래되었지만  유난히 부르는 사람이 기다려지는 날이었답니다."
  "그래요?"
  "부르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라도 기어이 마시는 날이고요."
  "저도요."
  차 마시고 거리로 나서기까지 두 사람이 나눈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두 사람은 서로, 왜  마시는 날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술을 마시면 말수가 줄어드니까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갈매기는 말수가 많아지는데도 그 화제만은 한사코 비켜가고는 했다.
  근 서너 시간 동안 독주 한 병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서기 직전에야 갈매기가 말했다.
  "기념이 되었어요."
  "무슨 기념이오?"
  "밖에서 이렇게 기념하기는  하나... 부모님 제삿날... 오빠와 막내동생 제삿날...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다리를 다쳐 입원해 있는 바람에 식구들 따라 언니 결혼식에 가지 못했어요. 부모형제는 오는 길에 변을 당했고요."
  "교통사고...였나요?"
  "잊어버릴 만도 하죠... 소련 전투기에 추락한  대한항공 007기에 우리 식구들이 타고 있었어요. 나와 맏언니만 빼고... 벌써 13년이나 되었네요?"
  "...비행기에서 농담한 거, 사과해요."
  "페이스 조절이 워낙 잘 안 되는 분이시니까..."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오피스텔 앞까지 걸었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그가 말했다.
  "나도 오늘 기념이 되었어요."
  "..."
  "11월 11일은 비번인가요?"
  "그 날은 어떻게 아셨어요?"
  "내 방으로 초대하겠어요. 오늘의 이 음영이  엇갈리는 초대에 대한 답례로..."
  "음영이 엇갈리다니요?"
  "그런 일이 좀 있었지요."
  "제 생일은 어떻게 알아내셨는지 궁금하군요?"
  "나는, 술 취하면 바보가  되지만 깨어 있을 때는 꽤 똑똑하답니다. 우리 사이에는 수습해야 할  우연의 일치가 너무 많아요. 오피스텔 임대료  내면서 고액권 수표를 냈더니 10만원짜리 수표로 거슬러주는데,  공교롭게도 거기에 당신이 낸 수표가  섞여 있습디다. 배서(背書)한 주민등록번호를 읽었지요. 711111, 맞지요?"
  "맞아요. 제 생일. 뷔(V) 포인트를 잡은 기분이겠군요?"
  "그건 또 뭐?"
  "조종사가, 항공기를 이륙시킬 것인지, 이륙을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포인트... 정비가 완벽하지  않은 상황이면 이륙해도 큰일이니까 이  포인트에서 활주 속도를 줄여야 해요."
  "그 포인트를 넘겼는데도 이륙을 결정하지 못하면?"
  "활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아니죠. 활주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활주로 끝에는 펜스가 기다려요."
  "내가 뷔 포인트를 제대로 잡은 것 같나요?"
  "선생님의 뷔 포인트인지는  모르지만 제 것은 아니에요.  전에도 방으로 여지를 초대한 적 있나요?"
  "있어요."
  "갈매기가 날아오던가요?"
  "물론이오."
  "붙잡지 않았겠군요."
  "물론이오."
  "약속할 수는 없어요.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요."
  "두 달이나  남았어요. 여덟시가  좋겠어요. 그동안 나는  마음을 닦으리다."
  복도를 걷는 발자국소리는 승강기 앞에서 시작되어 방방으로 스며들고는 한다. 7시에는, 평일에 캐주얼 구두를  신는 법이 없는 옷가게 여주인의 뾰족구두 소리가 들리더니  7호로 사라진다. 타박거리는 소리를 부록으로  달고 다니는 이혼녀의 가죽 슬리퍼 소리에는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섞여 있다.   그날따라 유난히 출입이 잦은  이혼녀 모자가 그의 귀를  성가시게 한다.
  8시가 되었는데도 그가 기다리던 발자국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는 인터폰을 들고는 경비에게 물어본다.
  "510호입니다. 내게 온 메모 없어요?"
  "스튜디어스 아가씨, 꽃다발 들고 방금 올라가셨는데요?"
  갈매기의 메모를 두 차례  전해준 적이 있는 경비, 두 사람이  같은 승강기 앞에서 헤어지는 것을 몇차례  보아온 경비는 얼김에 신이 났던 모양이다.
  "스튜디어스가 아니고 스튜어디스랍니다."
  그는 인터폰을 놓고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