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애정 Affection/Person

[씨네21] 5가지 코드로 풀어보는 감독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세계

버블건 2009. 4. 30. 19:11

글 : 김도훈 | 2006.03.28




현대 유럽 영화계의 가장 논쟁적인 작가. 미카엘 하네케의 신작 <히든>이 3월30일 개봉한다. 프랑스 중산층 지식인의 위선을 파헤치는 매서운 스릴러 <히든>은 하네케 세계의 종합이자 미학적 절정에 달해 있는 작품이다. 하네케는 언제나처럼 흔들리지 않는 카메라로 멈추어선 채 주인공들을 쥐고 흔들며, 동시에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도 고통스럽지만 지적인 게임을 제안한다. 데뷔작인 <일곱 번째 대륙>으로부터 <히든>에 이르기까지, 지난 17년간 하네케가 만들어온 모든 작품들로부터 5개의 코드를 뽑아 그의 세계를 되짚었다. 함께 실린 서면인터뷰는 폭력과 선동의 작가로만 알려진 하네케를 다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지켜본다. 숨어서 지켜본다. 카메라는 파리의 한 골목에 있는 중산층 가정집의 정면을 지켜본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지켜본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관객은 깨닫는다. 그들이 지켜보는 이미지는 주인공인 조르주와 안느가 지켜보는 비디오 테이프 속 이미지라는 사실을. 테이프에 담긴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이라는 사실을. 통상적인 스릴러영화라면 조르주와 안느는 비디오를 보낸 자를 찾아내고, 관객은 안도감을 느끼며 극장을 나설 것이다. 하지만 하네케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는다.

<히든>은 전형적인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다. 그는 언제나 온화한 중산층 가정으로 침입해 들어가고, 가정은 외부의 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내부로부터 자멸해들어간다. <히든>의 주인공들도 똑같은 운명을 겪는다.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안은 조르주로 하여금 어린 시절의 기억을 거슬러 오르도록 만들고, 어린 시절에 자신의 계략에 의해 쫓겨난 알제리인 입양아 마지드의 복수극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마지드를 찾아가서 협박을 늘어놓지만 테이프는 계속해서 보내진다. 조르주는 마지드와 아들을 경찰에 신고한다. 무혐의로 풀려난 마지드는 조르주를 자신의 집으로 부르고, 조르주의 눈앞에서 죽는다(이 대목을 스포일러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네케의 영화는 스포일러의 의미가 희박하다). 그러나 테이프는 여전히 보내진다. <히든>은 하네케가 조르주와 관객에게 동시에 건네는 지적인 게임이다.


<히든>


<히든>

그간 하네케는 <피아니스트>와 <퍼니 게임>으로 인해 영화 역사상 가장 사디스틱한 작가 중 한명으로 지칭되어왔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오해에 가깝다. <히든>이 비록 무시무시한 충격 효과를 딱 한번 관객에게 전해주기는 하지만 그보다 불편한 영상 폭력을 가하는 감독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를 사디스틱한 작가라고 일컫는다면, 하네케의 영화가 끊임없이 관객의 윤리적 취약함을 두들긴 뒤에 해결방도도 주지 않은 채 극장 밖으로 떠나보내는 탓이다. 사실 이같은 하네케의 영화적 소통방식은 데뷔작인 <일곱 번째 대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미카엘 하네케는 독일 뮌헨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성장했다. 대학에서 정신분석과 철학을 공부한 그는 1967년에 극작가로 경력을 시작했고, 1970년에 오스트리아 TV와 극단에서 프리랜서 감독으로 일했다. 재능있는 TV연출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의 스크린 데뷔작은 <일곱 번째 대륙>(1989)이었다. 여기서부터 하네케의 경력은 손쉽게 둘로 나눌 수 있다. 데뷔작으로부터 <베니의 비디오>(1992)와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1994)을 거쳐 <퍼니 게임>(1997)에 이르는 오스트리아 시절, 그리고 <미지의 코드>(2000)로 막을 열고 <피아니스트>(2001)와 <늑대의 시간>(2003)을 거쳐 <히든>까지 도달한 국제적 작가 시절이다. 이른바 ‘결빙 삼부작’(Glaciation Trilogy)이라 불리는 초기작들은 <히든>과 마찬가지로 미시적인 ‘가족’을 파고들어 결국 중산층 가족의 허위를 벗겨낸다. 국제적인 악명을 안겨준 <퍼니 게임> 이후, 하네케는 오스트리아를 떠나 프랑스 영화계에 정착했다. “이전작들이 ‘내전’영화들이라면, 프랑스로 건너온 이후에 내가 만든 영화는 ‘세계대전’ 영화”라는 하네케의 말처럼, 그는 유럽사회 전반에 대한 고민으로 지평을 넓힌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처음으로 데뷔했던 <미지의 코드>는 당시 통합의 시대를 맞이한 유럽사회를 괴롭히는 계층간의 소통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늑대의 시간>과 <히든>은 9·11 사태 이후 서구사회의 윤리적 붕괴를 다루는 일종의 재난영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작품군 중에서 예외적이라 할 만한 <피아니스트>를 제외한다면 하네케의 영화들은 일정한 공통의 코드를 지니고 있으며, 연대기를 따라 몇 가지 반복되는 코드를 짚어내는 순간 하네케가 던지는 질문은 더욱 또렷해진다.

코드1 - 반(反)정신분석학/ 하네케는 설명하지 않는다


<일곱 번째 대륙>

하네케의 데뷔작인 <일곱 번째 대륙>은 일가족의 집단 자살을 그리는 영화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은 문을 걸어 잠그고 예고도 없이 자살을 결심한다. 집안의 모든 물건을 부수고 자르고 찢은 뒤 그들은 독극물을 마시고 죽는다. 하네케는 자살을 결심하고 행하는 가족의 정신상태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일상과 자살의 과정을 차갑게 지켜볼 뿐이다. 두 번째 작품 <베니의 비디오>는 한 소년의 살인행각을 보여준다. 소년 베니는 중산층 부모의 근사한 아파트에서 매일 비디오 장비를 매만지며 소일한다. 그는 우연히 만난 소녀를 집으로 데려와 돼지 잡는 총으로 죽이고 모든 과정을 캠코더에 기록한다. <우연의…>는 한 소년이 권총을 들고 길거리에서 무작위로 학살을 벌이는 시간까지, 학생과 희생자들의 일상을 71개의 시퀀스에 별다른 첨언없이 담아낸다. ‘결빙 삼부작’이라 불리는 초기작들에서 드러나는 하네케의 고유한 특징은 파국으로 치닫는 인물의 내면에 전혀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캐릭터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각본으로 쓴다. 그 이상은 쓰지 않는다. 이것이 왜 내가 나의 영화들을 반(反)정신분석학 영화라고 일컫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정신분석학적인 설명은 관객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당신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는 인물들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시도는 감독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스스로 해석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한 감독의 역할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코드2 - 폭력/ 하네케는 선동하지 않는다

하네케에게 선동가(Provocatuer)라는 악명을 씌운 것은 논쟁적인 스릴러 <퍼니 게임>이다. 1997년에 칸영화제서 열린 <퍼니 게임>의 시사회는 야유와 박수가 오갔다. 빔 벤더스를 포함한 수많은 관객이 영화를 참아내지 못하고 상영 중에 자리를 떴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하네케에게는 처음으로 맛보는 국제적 주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객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폭력적인 영상이 아니라 관객에게 야유를 퍼붓는 듯한 영화의 어조였을 것이다. <퍼니 게임>은 당시 새로운 경향으로 떠오르던 할리우드영화들(<내츄럴 본 킬러>나 타란티노 계열의 작품들)처럼 폭력을 탐구하는 장르영화들과 닮아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반(反)장르, 반(反)스릴러영화다. 실상 <퍼니 게임>에서 폭력의 사용은 극도로 자제되어 있다. 여러모로 <퍼니 게임>과 비슷한 초기작 <베니의 비디오>도 마찬가지다(두 작품 속 살인마는 모두 오스트리아 배우 아르노 프리츠가 연기하고 있다). 베니가 소녀를 죽이는 장면은 캠코더 화면을 통해 어슴푸레 보여질 뿐이다. 하네케 작품 속의 폭력은 대부분 카메라 밖에서 일어난다. 예외적인 <히든>의 자살장면은 카메라 안에서 벌어질지언정 희생자는 카메라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퍼니 게임>


<베니의 비디오>

사실 하네케는 폭력의 직접적인 삽입을 불편해하는 감독이다. “질문은 ‘어떻게 폭력을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관객이 폭력을 마주하고 있는 자신들의 위치를 깨닫게 만들 것인가’다”라는 말에서도 보이듯, 그가 폭력적인 소재를 끌어쓰는 이유는 관객과의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다. 하네케는 관객을 폭력적인 장면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으로부터 막아세우고, 그래서 하네케의 영화는 폭력에 대한 매혹없이도 폭력에 대해 사유할 자유를 쟁취한다.

코드3 - 미디어/ 하네케는 미디어를 믿지 않는다


<히든>

하네케 영화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TV를 본다. <일곱 번째 대륙>의 가족은 죽어가는 순간에 TV 수상기에서 흘러나오는 팝송(<Power of Love>)를 듣는다. <베니의 비디오>의 베니는 도살당하는 돼지를 담은 테이프를 반복적으로 본다. 스쳐지나가는 장면에서도 TV는 끊임없이 네오나치의 살인과 장난감 광고와 전쟁영화를 방영 중이다. <히든>에서도 거실에 켜져 있는 수상기에서는 끊임없이 이스라엘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들은 미디어가 보여주는 세계적 폭력의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무엇도 배우지 못한다. 보스니아 학살현장을 담아온 <미지의 코드>의 포토 저널리스트도 아내와의 소통에서는 실패할 뿐이다. “미디어는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며 의식을 교란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네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TV계에서 17년을 일했고, 그 경험으로 인해 TV의 무용성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997년에 카프카의 <성>(城)을 TV용 영화로 만든 적이 있다. 하네케 초기작의 배우들이 모조리 등장하는 이 작품은 의외로 원작의 충실한 각색이다. “<성>은 TV용 영화다. TV를 위한 영화는 책에 가까워야만 한다. 왜냐면 TV영화의 목적은 관객에게 문학을 통역해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TV는 결코 어떤 종류의 예술도 아니다.”

코드4 - 롱테이크/ 하네케는 실제 시간으로 향한다

하네케의 작품 중 미학적인 구조가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우연의…>와 <미지의 코드>일 것이다. <우연의…>는 71개의 분절된 신으로 주인공들의 일상을 따라가고, <미지의 코드>는 <우연의…>의 형식을 반복한다. 여배우와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 포토저널리스트, 루마니아에서 온 불법 입국자들은 서로 알거나 모르는 채 영화 속에서 지나치거나 만난다. 하네케는 주인공들의 여정을 27개의 독립적인 시퀀스에 담는데, 대부분의 시퀀스는 하나의 숏으로 이루어진 플랑세캉스다. 그리고 각각의 시퀀스는 급작스러운 암전으로 서로를 건너뛴다. 이는 영화의 주제인 ‘개개인의 사회적 소통의 실패’를 미학적인 방식으로 구현해내려는 야심찬 시도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


<미지의 코드>

<미지의 코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오프닝이다. 주인공인 앤(줄리엣 비노쉬)과 남자친구의 동생이 만나고 헤어진다. 동생은 지나갔던 길을 거슬러 걸어가다가 루마니아 출신의 여인을 모독한다. 이에 발끈한 흑인 남자가 동생과 싸우고, 경찰과 앤이 소란을 듣고 달려온다. 오프닝은 수평 트래킹으로 찍힌 하나의 신으로 만들어졌다. “<미지의 코드>에서 각각의 숏은 한 가지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관객을 속이거나 보호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는 언제나 교묘한 조작이다. 그러나 만약 각각의 신이 단지 하나의 숏으로 이루어진다면, 그때는 캐릭터가 ‘실제 시간’에 좀더 가깝게 머물 수 있고, 관객의 시간에 대한 감각은 사기당하지 않는다. 몽타주를 극도로 최소화하는 것은 관객이 좀더 심사숙고해서 화면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책임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코드5 - 역사의 묵시록/ 하네케는 서구의 윤리적 부채를 조소한다

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안겨준 <피아니스트> 이후, 하네케는 <베니의 비디오>보다도 먼저 각본을 써두었던 <늑대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는 일종의 묵시록적 SF다. 일가족이 시골의 별장에 도착한다. 별장은 이미 낯선 가족이 차지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들에게 살해당한다. 게다가 그들은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재앙이 세상을 덮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이자벨 위페르)와 딸과 아들은 이제 전기도 물도 없는 자연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늑대의 시간>은 관객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재앙인지, 그들이 있는 장소는 어디인지, 모든 정보는 차단된다. “무엇이 그들을 이런 상황으로 집어넣었는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당신이 재앙에 대한 단단한 이유를 찾는 순간, 관객의 시선은 곧 그들이 어떻게 문제를 풀어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일상적이지 않은 재앙에 처했을 때 행하는 집단적 행동이다.” 하네케는 <늑대의 시간>을 통해 서구 유럽인들로부터 물질적 토대를 빼앗아 던진 뒤, 당신들이 그토록 미워하는 이민자들의 고향에서 살아보니 기분이 어떠시냐고 이죽거린다. 서구인의 얄팍한 윤리가 쉬이 무너지는 과정을 묘사하며 조소를 보내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늑대의 시간>

<히든> 역시 윤리에 대한 문제제기다. 조르주의 부모는 ‘1961 파리 대학살’(박스 참조)에서 부모를 잃은 알제리 고아 마지드를 입양한다. 아마도 그것은 중산층 가정이 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윤리적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 조르주는 계략을 꾸며 마지드를 쫓아내고,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테이프를 보낸 자가 마지드라고 생각한다. 소년 시절의 악몽은 여전히 프랑스 중산층 지식인들의 부채로 남아 밤마다 침대를 적신다. 어떻게 보면 <히든>을 ‘하네케의 포스트 9·11 영화’라고 일컫을 수도 있을는지도 모른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불타오르는 TV화면을 보며 자신의 안방이 쉽게 침범당하는 것에 충격을 받은 미국인들의 공포와, 자신의 집이 찍힌 테이프를 보고 공포에 떠는 조르주, 그들은 다같이 항변한다. 도대체 왜 그들은 우리를 향해 분노하는가. 하네케는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게 답한다. 당신들이 짊어진 식민지배와 학살의 부채는 영원히 살아서 당신을 지켜볼 것이라고.

하네케는 예술가를 “사회의 상처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영원히 소금을 발라대는 존재”라고 말한다. 과연 <일곱 번째 대륙>으로부터 <히든>에 이르기까지, 하네케는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의식과 공포를 까발려낸다. 게다가 하네케는 주제를 담아낼 적절한 미학적 게임의 규칙을 만든 뒤에 관객으로 하여금 참여를 권한다. 해답없는 게임은 답답하지만 적극적으로 게임에 참여한 관객은 생각없는 소비자로부터 능동적인 비평가로 변모할 것이다. 그것은 “급진적으로 해답을 부정할 때, 관객은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나설 것”이라는 하네케의 믿음이다. “하네케야말로 관객을 지성적인 존재로 대하는 거의 유일한 감독”이라는 <시네아스트>의 호언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관객을, 당신을, 우리를, 그와 동일한 지성체로 바라본다. 그래서 하네케가 제의하는 게임은 결코 선동이나 윤리강의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네케의 게임은, 고통스럽지만 지적인 영화적 유흥(Funny Game)이다.

<히든>의 역사적 배경, 1961년 파리 대학살

40년 전 그날이 <히든> 속 사건을 불렀다


1961년 10월17일의 파리. 수천명의 알제리 이민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이 주도한 이 시위는 알제리인들에게만 부여된 통금령을 해제해달라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총기로 무장한 파리 경찰과 특공대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결국 200여명의 알제리인이 잔인하게 학살당해 센강으로 던져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부 경찰과 시민들이 잔혹한 진압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프랑스 정부는 모든 항의를 묵살했다. 이후 프랑스 경찰은 무력충돌이 우연에 의한 것이며 단 3명의 알제리인만이 진압과정에서 숨졌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학살은 2차대전 중 나치에 협력해 유대인들을 프랑스에서 쫓아내는 데 앞장섰던 경찰청장 모리스 파퐁에 의해 명령되어진 것이었다. 그는 직접 경찰 고위간부들을 불러 살인도 불사하는 초강경 진압을 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20세기 서구사회가 저지른 가장 섬뜩한 죄악 중 하나인 이 사건은 프랑스 정부의 철저한 검열과 주류 언론의 자의적인 은폐로 오랫동안 함구되어졌다. 파리 대학살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지난 1998년에 프랑스 정부와 파리시가 학살극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부터다. 학살극의 중심인 생 미셸 다리 근처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패가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껏 단 한명의 학살 가담자도 정식으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서면 질문지에 대한 미카엘 하네케의 답변은 절반만 도착했다. 그는 얼마 전에 있었던 수술로 인해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고, 남은 절반의 질문지를 채워낼 여력이 없다는 전언이었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보내준 답변에 외신과의 인터뷰를 일부 발췌해서 첨부했다.

-당신은 현대 유럽 영화계의 가장 논쟁적인 작가로 불린다. 그같은 명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난 내 자신에게 끊임없이 ‘지루하냐?’고 물어본다. 감독으로서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은 관객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암시한다. 가능한 한 관객의 마음을 최대한 많이 동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히든>은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여러 해 동안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온 다니엘 오테유를 위해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를 보면 내면에 어떤 비밀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하네케는 2000년작 <미지의 코드> 역시 작업을 제의한 줄리엣 비노쉬를 위해 만들었다- 편집자).

-<히든>은 개인적인 죄의식의 기원을 좇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알제리 전쟁에 대한 사회적 환기로 나아간다. <히든>이 지난해 파리 근교에서 무슬림 폭동이 벌어진 몇주 전에 개봉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전에 ‘1961 파리 대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프랑스처럼 자유로운 언론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40년 동안 그런 비극이 감추어져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영화 속의 상황이 북유럽이나 아메리카의 어떤 나라, 사람이 죄를 짓고 있는 다른 나라의 어떠한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가족 구성원 사이의 비밀과 속임수, 그것을 토대로 한 가족제도에 대한 냉소는 초기작들로부터 <히든>까지 지속적으로 읽힌다. 많은 작품들이 중산층 가족을 토대로 하며, 여기 등장하는 가족은 현존하는 사회적 문제와 균열의 축소판이다. 가족제도가 서구 유럽사회에 팽배한 사회적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하는가.
=나에게 가족은 미니어처 전쟁이다. 만약 당신이 서구사회의 가족제도를 탐구한다면, 당신은 가족이 모든 분쟁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피해갈 수 없다. 하지만 내 의도가 ‘가족 해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난 네 자녀를 가졌고, 내가 사는 곳이야말로 내 보금자리라 느껴지는 유일한 장소이다. 초점을 두고 싶은 단 한 가지는, ‘가족이 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상당한 폭력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야말로 안정성에 가치를 부여하고 뭔가를 만들어나가겠다는 의지와 만족감을 구체화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의 상징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우리 가정의 어떠한 것도 잃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이 <히든>의 키워드이다. 가족이 위협을 받거나 그로 인해 뭔가를 상실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폭력’이 가끔씩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조르주를 TV 문학토론 프로그램의 사회자로 설정한 이유는 뭔가.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마지드가 조르주를 만났을 때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유명한 캐릭터이길 원했다. TV 사회자는 요즘 세상에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니까. 하필 그가 문학 프로그램을 담당하도록 만든 이유는, 조르주가 지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의도다. 게다가 그런 지성을 가진 사람도 여린 성격을 지닌 겁쟁이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여기에는 특히 TV를 중점으로 하는 미디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여전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신이 오스트리아 TV계에서 경력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TV에 대한 지독하게 비판적인 시선은 스스로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인가.
=물론이다. (웃음) 나의 미디어에 대한 비판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얼마 전 호텔에서 TV용 영화들을 보면서 완벽하게 결론내렸다. 지금은 심각하고 좋은 TV영화나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1997년에 당신은 카프카의 <성>을 TV용 영화로 만들지 않았나.
=카프카의 원작으로 TV용 영화를 만드는 것은 국제적인 영화계에서 성공을 거둔 뒤여서 가능했던 일이다. 사실 나는 TV 제작진을 위한 알리바이 구실을 한 것이다. 이를테면, <성>은 그들 스스로 뒤를 돌아보면서 “이것보라고, 우리 제작진이 얼마나 멋진 일을 해냈는지를!”이라고 자위할 만한 알리바이다. (웃음)

-당신은 종종 불편한 장면을 삽입하는 것으로 관객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당신은 이같은 극적 장치의 이용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가. 혹시 이런 충격요법이 더 많은 관객과의 소통을 어렵게 할 위험은 없는가.
=관객에게 ‘폭력’을 보여주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유혈이 낭자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폭력을 ‘클로즈업’하는 것은 참을 수 없고 불쾌하다. 가끔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좀더 고상하고 좀더 믿을 만하며 효율적이다. 일종의 도덕적인 규칙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의 롱테이크 신에는 아무런 해석도 없기 때문에 당신의 어떤 영화들보다도 관객을 의문에 빠뜨린다. 어떤 의도인가.
=마지막 장면에 대한 무수한 해답과 해석들이 있다. 관객이 자기 나름의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면 영화 자체는 훨씬 덜 흥미로울 것이다! 난 관객이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논쟁하고 “오늘 저녁 뭐 먹을까?”라고 말하는 대신에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논쟁을 하며 극장을 떠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영화는 답을 주는 대신에 관객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 사실, 정치인과 돌파리 의사만이 답을 주는 척하는 것 아닌가! 나는 누가 테이프를 보냈는지에 대한 해답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히든>을 다 보고나서도 누가 테이프를 보냈는지 알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히든>은 어쨌든 스릴러 장르의 외피를 쓰고 있으며, 그래서 해답을 기대하고 들어온 일반 관객은 이같은 결말에 갑갑함을 느낄 것이다. 사실 당신 영화를 보는 관객은 당신이라는 감독의 특성과 어떤 약정을 맺어야만 하니까.
=내가 관객에게 제의하는 것은 오랜 전통을 가진 계약적 동의다. 다시 말해, 예술가와 청중이 서로를 심각한 파트너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습적인 대량 유통 영화들은 관객을 파트너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지 은행의 돈기계로 볼 뿐이다. 내 작업의 유효성은 지난 수천년간 예술의 역사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다. 극장의 초기 역사를 보라. 그곳에는 관객과 창조자 사이의 상호적인 존중이 존재했다.

-<히든>에서는 카메라가 진실을 밝혀내는 대신에 사기극과 공모한다. 이것은 영화가 “1초에 24프레임의 진실”이라던 고다르의 아포리즘과는 정반대에 있다.
=고다르의 말을 개작한다면 “영화는 진실을 서비스하는 1초간 24프레임의 거짓말”이다. (웃음) 영화는 인공적인 건조물이다. 그것은 리얼리티를 다시 건설하는 양 가장한다. 매우 교묘한 속임수의 한 형태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을 폭로할 수도 있는 거짓인 것이다. 만약 영화가 예술적 작업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저 솜씨있는 거짓말의 공정에 불과할 것이다.

-당신은 오스트리아 출신이지만 프랑스 배우와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고, 심지어 <피아니스트>처럼 오스트리아를 배경으로 프랑스어 영화를 만든다. 프랑스에서 일하는 특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프랑스에서 작업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오스트리아는 연간 10편 정도의 영화를 제작하는 반면, 프랑스는 같은 기간 150편 이상을 만든다! 하지만 외국에서 일하는 것이 내 방식까지 바꾸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당신이 오스트리아 출신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클래식 문화와 팝 문화의 상충을 잘 보여준다. <피아니스트>는 물론이거니와 <퍼니 게임>의 오프닝에서 클래식 음악이 갑자기 격렬한 펑크 록음악으로 바뀌는 장면도 그러하다. 이런 대비를 통해 당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 점점 더 냉혹해지고 있다. 동시에 우린 ‘팬’ 문화라 불리는 젊고 즐거운 문화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건 나에게 극단적으로 비인간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난 우리가 가치라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미쳐버릴 것만 같다.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러한 선천적 모순과 모호함을 지적해주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독일어로 찍을 4년 전에 쓴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1913∼14년을 배경으로, 20년 뒤에 나치가 되는 세대인 독일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금 내가 구상 중인 스토리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독일의 한 마을에 관한 3시간짜리 초상이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가.
=아니. 그러나 세상을 지금보다 덜 슬픈 장소로 만들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