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로만 Narrative

[시나리오] 처녀네 식당 - 이종언

버블건 2007. 11. 17. 10:15
작가 소개 이종언 - 시나리오, 연출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과 <키위> <진희와 다미> 연출 본 작품의 수상경력 및 제작지원 금관 청소년 영화제 장려상 수상 1999 영진공 사전제작 지원 작품

#1. 오후, 처녀네 식당 안. 젊은 사내는 문에 있는 뿌연 창문으로 안을 힐끗 들여다 본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다. 먼지로 쌓여 있는 진열대 위의 식료품들, 천장과 기둥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하게 메달려 있는 거미줄과 먼지 뭉치들. 사내는 무심결에 탁자에 손을 짚었다가 묻어나온 먼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진열대 양 옆으로는 밥도 팔고 술도 팔았을 것 갇은 네모난 탁자들이 놓여 있는데 의자들은 모두 가지런히 거꾸로 올려져 있다. 탁자들 사이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는 사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래된 나무 바닥은 조용한 주변 탓인지 유난히도 삐그덕 소리를 낸다. 안쪽으로는 주방과 식당의 경계인듯한 길고 두꺼운 나무빠가 가로막고 있고, 한쪽을 살짝 들어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주방으로 들어서자 낡은 싱크대 하나와 녹이 잔뜩 슨 가스렌지 하나가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위로는 벽에 선반이 붙어 있는데 조촐한 그릇들이 비교적 잘 정돈되어 차곡 차곡 쌓여 있다. 옆 선반에는 먼지 쌓인 싸구려 술병들과 이것 저것 깡통들이 진열되어 있다. 사내가 자기가 걸어온 곳을 한바퀴 둘러보자 주방 끝에 그가 미처 보지 못했던 방문이 있는 것을 알아 챈다. K는 그곳으로 천천히 다가가 문을 연다. #2. 오후, 방안. 문을 열자 드거운 열기가 확 뿜어져 나오는 방안은 너무도 어둡다. 방 구석에 나무로 된 침상과 그 발치의 화분 하나, 침상 옆에 놓여있는 장롱이 눈에 들어온다. <나레이션> K : 나는 창문부터 열었다. 태어나서 그때까지 그렇게 더운 방에는 들어와 본적이 없었다. 사내가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팔로 훔쳐 내린다. 화분의 크기에 비해 너무 많이 자라 거의 천장에 닿을 듯한 나무가 침대 가운데를 가리고 있어 침대엔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방의 크기에 비해 옆으로 만 길쭉한 좁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한 낮이어서 인지 침상 근처에는 이르지도 못한다. <나레이션> K : 그리고 그렇게 지독한 냄새도 맡아 본적이 없었다, 나는 내가 너무 늦게 도착했음을 알았다. 침대 위에는 야위다 못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어린애로까지 보이는 노파가 곧게 누워있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노파위로 여전히 가방을 맨 K의 다리가 다가와 선다. 노파의 가는 숨소리가 들린다. #3. 오후, 가게 안. 진열대 위의 식료품들이 쓰레기 봉지 안으로 쓸어 담겨지고, K가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진열대 위 구석구석을 빗자루로 쓸어낸다. 이번에는 K가 빗자루를 매단 긴 각목을 가지고 신이 난 듯 사방으로 뛰어 다니며 천장에 붙어있는 먼지 뭉치들과 거미줄들을 걷어내고 있다. 깨끗해진 진열대가 보이고, 우당탕탕 마루 위를 뛰어 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바지를 걷어올린 K가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한쪽에서 반대편까지 걸레질을 하며 맨발로 뛰어다니고 있다. <나레이션> K : 도착한지 이틀이 지나도록 노인네는 일어나지 않았다. (K가 걸레를 든 채 천천히 일어나며 노파의 방 쪽을 바라본다.) 나는 순간 순간 노인네가 저대로 죽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K가 분무기로 노파의 방에 있는 화분에 물을 뿌리고 있다. <나레이션> K : 나는 몇 번이나 숨소리를 확인해야만 했다. K가 노파의 코에 화분에서 뜯은 잎사귀를 대본다. 나뭇잎이 노파의 가는 숨결에 파르르 떨린다. #4. 저녁 무렵. 가게 앞. K가 나무 사다리에 올라가 입에 몇 개의 못을 문 채 찌그러진 '처녀네 식당' 간판을 고치고 있다. 해가 뉘엇뉘엇 지고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간다. 얼추 구색을 갖춘 간판 아래서, K가 사다리에 한쪽 팔을 걸친 채 지는 해를 보며 담배를 꺼내 문다. #5. 오후, 가게 안. 두 다리를 나무 바에 걸쳐 올려놓고 의자에 깊숙히 몸을 파묻은 K가 러닝 셔츠 바람으로 잠들어 있다. 활짝 열려 있는 문 밖에는 남자 아이 하나가 몸을 뒤로 숨기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때 나무 바닥위로 '퍽'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K가 놀라며 잠에서 깬다. K와 눈이 마주친 꼬마는 얼른 내빼 버리고 K는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주의를 둘러보며 일어서서 노파의 방으로 간다. 나무 바닥에는 밥그릇 하나와 숟가락 하나가 뒹굴고 있고, 침대 위에는 눈을 껌벅거리는 노파가 있다. #6. 오후, 방안. K가 노파의 입에 수저로 물을 떠 넘겨주고 있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물을 떠넘기고 난 후 젖은 수건을 가져와 노파의 얼굴에 눈꼽을 떼내고, 얼굴 구석구석을 닦아낸다. 이불에서 손도 꺼내 뼈만 남아있는 마디마디를 깨끗하게 닦아낸다. #7. 오후, 가게 안. K가 의자를 받치고 올라서서 선반 위의 술병들을 하나하나 닦으며 다시 진열하고 있다. 그 때 갑자기 가게문이 덜컥 열리며 Q가 들어온다. K는 닦던 술병을 든 채 Q를 바라본다. 땅딸막한 키에 다부진 체구를 가진 50대쯤의 Q는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K쪽으로 다가온다. Q : (앉지도 않고 K를 보며) 막걸리 한잔 주게. K가 의자에서 내려와 박스에서 막걸리 하나를 꺼내 선반에 있는 대접하나와 함께 Q앞에 내려놓는다. Q는 막걸리를 대접에 가득 들이붓고는 무척이나 목이 말랐던 듯 벌컥벌컥 마셔버린다. Q : (다 마신 대접을 탁자에 '탁' 내려놓으며, 그-윽 트림을 하고는 손으로 입가에 줄줄 흐르는 막걸리를 훔쳐내며 K를 바라본다.) 노인네한테 일가친척이 있는 줄은 몰랐구먼... K : (나무 바에 기대 서서) 아니에요. 저는 그냥... 부탁을 받고 온 거예요. Q : 음..(돌아서며) 달아놓게. 어차피 여기 오는 사람이래야 나밖에 없으니까.. K가 문을 열고 나가는 Q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또 나무 바닥에 그릇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K가 얼른 방을 쳐다본다. 물그릇이 바닥에서 데구루루 구르고 있다. #8. 오후, 가게 안. K가 그릇에 떠온 물을 노파의 입에 떠넘기려고 하는데, 노파가 입을 꽉 다물고 열지를 않는다. K가 숟가락으로 입을 벌려 넣자 물이 얼굴을 타고 옆으로 죽 흘러내린다. K가 다시 물그릇을 가까이 갖다대자 노인네가 어디서 힘이 났는지 그릇을 '탁' 쳐버린다. 바닥에 물그릇이 엎질러진다. K가 가스 렌지 앞에 서서 얼굴에 구술 땀을 흘리며, 뭔가를 끓이면서 주걱으로 젖고 있다. <나레이션> K : 노인네는 죽을 달라는 거였다. 나는 죽을 끓이줄 몰라 밥숭늉을 끓였다. K가 노파 옆에 붙어 앉아 멀건 숭늉같은 미음을 호호 불며 노파의 입에 떠 넘겨주고 있다. 노파는 큰 눈을 껌벅이며 이 사람이 누군가 하는 듯한 눈으로 K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K가 떠주는 데로 떨꺽 떨꺽 미음을 받아먹고 있다. <나레이션> K : 노인네는 미음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나는 그날 장롱 서랍에서 낡은 종 하나를 찾아냈다. K가 노파의 머리맡에 손잡이 줄을 길게 늘어뜨려 종을 달고 있다. #9. 아침, 가게 안. K가 탁자 두 개를 이어 붙이고 그 위에서 얇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은 채 자고 있다. 방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K가 이리 돌아누웠다가 저리 돌아누웠다가는 결국 여기저기 제비집이 진 머리를 이불에서 꺼내며 간신히 탁자 아래로 내려온다. K가 졸린 눈으로 미음을 끓이고 있다. 노파에게 미음을 먹이던 K가 뭔가 이상한 냄새를 맡고 이불에 코를 대고는 킁킁거린다. #10. 오전, 가게 안. 활짝 열려진 가게문. K가 슬리퍼 끄는 소리를 찍찍 내며 방에서 노파 이불을 들고 나와 탁자에 놓고 자신의 이불을 방으로 가지고 다시 들어간다. 잠시 후 방에서 나와 노파의 이불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11. 오전, 가게 앞. K가 이불이 담겨져 있는 가마솥 만한 크기의 커다란 고무 대야에 호스를 길게 빼어 물을 받고 있다. 바지를 걷으며 대야에 발을 담그려는 순간 그의 앞에 남자아이 둘이 나란히 서있는 것을 본다. 꼬마1 : 아저씨... 사탕 있어요? K : 사탕?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K가 햇빛을 받으며 쭈그리고 앉아 물이 줄줄 흐르는 호스를 들고 미소를 지으며 앞을 보고 있다. 그의 앞에는 아이 둘이 대야에 들어가 팔짝 팔짝 뛰며 이불을 빨고 있다. #12. 저녁 무렵, 가게 서늘한 바람이 불고, K가 가게에서 나와 이불을 걷어 내리자 그 자리에 Q가 커다란 수박을 한 덩이 들고 서 있다. Q : (K를 지나 가게로 들어서며) 막걸리나 한잔하게. K : (Q를 보며 이불을 가슴에 싸안고 Q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탁자 위에 잘 익은 수박이 K가 주방에서 가져온 칼을 대자 쭉 쪼개진다. Q : (한 조각을 들어 입에 꾸역꾸역 넣으며...) 노인네가 여름엔 수박을 좋아했었지. K : 할머니를 잘 아세요? Q : 그럼. (술을 한잔 따르며) 이 동네 산지가 50년인데... 벌써 노인네 주변만 30년이 넘 었지. (술을 벌컥 벌컥 마신다) 세월이야 빠르지... 지금이야 저렇게 쭈구렁 할망구가 됐지만, 옛날엔 이런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이뻤지. (김치 쪼가리를 집어들며) 저- 위 부대 사람들을 죄다 홀려놨었으니까. (자기 대접을 허공에서 몇 번 턴 후) 자네도 한잔하지. (K에게 술을 따른다.) 근데 일가도 아니라면서 자네 같은 젊은이가 왜 이런 촌구석에 와있나? K : 부탁 받은 거예요. 돌아가시면 이 가게를 저희 어머니한테 넘겨주시기로 했대요... (막걸리를 입에 대며) 임종을 지켜주는 대신. (한 모금 죽 마신다.) Q : 자네 모친하고 노인네는 어떤 사인데? K : 사정은 잘 몰라요. 옛날에 할아버지가 극단에 있었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어머니가 좀 어릴때, 여기에 맡긴 적이 있었대요. Q : (입을 오므리고 놀란 눈을 하며) 그럼 자네 모친이 혹시? (뭔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어. 자네 모친이 꽃봉인가 보군. K : 예? Q : 그런적이 있었지. (옛 기억을 더듬으며) 나이에 비해 몸은 한참이나 작은데 얼굴은 예쁘장해서 꽃봉오리라고 여기 사람들이 죄다 꽃봉이라고 불렀지. (사내의 얼굴을 가만히 본다) 저는 콩알 만해도 아들은 아주 잘 나놨구먼. 그래 모친은 잘있나? K : (자기 앞에 놓인 대접 가장자리를 문지르며) 돌아가셨어요. 한참 됐는걸요. Q : (놀라고 안된 표정을 하며.) 아직 젊을 텐데, 어쩌다가... (K 앞에 놓인 대접을 보며) 그 술 안 먹을 거면 나 주게. (술잔을 받아든다.) 그럼, 자네가 여길 넘겨받으려고? K : (주위를 둘러보며..) 글쎄요. 팔아야죠. Q : (마시던 잔을 입에서 떼며) 이까짓거 팔아서 남는거나 있겠어, 뭐. 옛날이라면 또 몰라두. 막말루 여긴 저 위 군인들 상대로 하는 장산데, 아래 읍내에 좋은 술집 생기구부터는 장사안돼. 될 리가 없지. 이쁘고 젊은것들 많은데 누가 여길 와? (대단한 말이라도 한 듯 술을 한잔 쭈욱 들이킨다.) 나나 되니까 옛정 생각해서 들여다 보기라두 하지... (남은 술을 마져 마신다.)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Q는 엔간히 취했는지 탁자에 얼굴을 받치고는 꼬이는 발음으로 지껄이고 있다. Q : 옛날엔... 참.... 좋았지. (딸기코에 눈을 감은 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에 잠긴다.) #13. 밤, 가게 안. 밖은 깜깜하다. 식당 안에는 창마다 낮은 촉수의 백열등이 약한 빛을 흘려내고 있고, 젓가락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두어 명의 걸쭉한 남자 목소리에 섞여 착착 달라붙게 간드러지는 여자 목소리가 고음을 타고 울려 퍼진다. 창문 아래 탁자 양쪽으로는 흐트러진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 술에 취해서 한 명은 젓가락을 두드리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숟가락을 들고 노래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 여자를 무릎에 앉힌 채 역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탁자 위에는 쌓여있는 술병들과 거의 비어 있는 안주 접시들이 보이고, 예쁘장한 얼굴에 작은 몸집을 한 소녀 아이가 옆 테이블에서 혼자 젓가락을 두드리며 흥얼거리고 있다. 어둠침침한 주방에는 K가 이불을 가슴에 안고 노래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바라보던 K가 앞으로 걸어 나가면 노니던 이들은 온데간데없고 조용한 가게 안에 양쪽으로 탁자 두 개만 썰렁하게 놓여있을 뿐이다. K는 탁자 두 개를 이어서 붙이고 그 위에 올라가 이불을 덮고 팔베개를 하며 옆으로 돌아눕는다. Fade Out. #14. 오전, 가게 안. K가 행주로 탁자를 닦고 있다. 종소리가 울린다. K가 행주를 들고 방으로 간다. K가 노파의 입에 물을 떠 넘겨준다. 한 숟갈을 더 떠넘기려는데 노파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K가 일어나서 방문을 나와 탁자로 다가가는데 종소리가 다시 울린다. K가 뒤돌아본다. 이번에는 K가 미음과 간장이 있는 쟁반을 가지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식당으로 나온 K가 쟁반을 나무 빠 위에 쟁반을 아무렇게나 탁 올려놓고 탁자로 가서 다시 행주질을 시작하는데 또다시 종소리가 울린다. 어이없이 노파 방을 쳐다보던 K가 힘없이 행주를 탁자 위에 던져 버린다. K가 노파에게 밥을 조금씩 떠 입에 넣어주고 있다. 밥한 숟갈 넣어주고, 간장한번 찍어 넣어주고. 노파는 뚫어지게 K를 쳐다보며 주는 데로 잘도 받아먹는다. <나레이션> K : 노인네가 드디어 밥을 먹었다. 이러다가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가게 안을 휘젓고 돌아 다닐 것만 같았다. K가 다리를 벌리고 의자에 깊숙히 턱을 괴고 앉아있다. <나레이션> K : 그리고 5분마다 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때 종소리가 다시 울린다. <나레이션> K : 이제 부터는 3번 이상 종소리가 울려야만 노인네에게 가기로 했다. 종소리가 또 한번 울린다. K가 꿈적도 안하고 세 번째 종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종소리는 다시 울리지 않는다. 무관심한 척 앞만 보고 있던 K가 슬슬 노파 방쪽을 본다. K가 슬쩍 방안을 들여다보다가 껌벅거리고 있는 노파와 눈이 마주친다. 노파가 무슨 말인지 입모양을 움직이지만, 무슨 말인지 전혀 들리지 않는다. K가 귀를 노파의 입에 갖다 댄다. #15. 오후, 가게 안. K가 어깨에 거다란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비닐 봉지를 바리바리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커다란 수박을 한 덩이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들어서자마자 빠에 혼자 앉아 벌써 몇 병째 술을 비우고 있는 Q를 보고 놀란다. Q : (뒤돌아 K를 한 번 보고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읍내 갔다오나? 먼저 한잔하고 있었지. (한 모금 마시고) 그-윽. K : (읍내에서 사온 짐들을 빠 위에 올려놓으며 물건들을 하나 둘 꺼낸다.) Q : (수박을 보고는) 노인네가 또 수박을 찾았구만. 그때 방안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K와 Q가 동시에 방쪽을 바라본다. 방으로 들어온 K가 노파를 보고 멍하니 서있고, 그 옆으로 Q가 들어와 서서는 그의 놀랬을 때의 특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오므린다. 노파의 침대에서 물이 줄줄 흘러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고 바닥에는 물이 흥건히 고여 있다. #16. 오후, 가게 안. K가 방문 옆에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기대어 서있고, Q가 걸레통과 노파의 이불을 들고 방에서 나온다. Q : (이불과 걸레통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잘 먹는다고 받아먹는 데로 주면 어떡하나? 그래야 자네만 고생이지.(술병이 놓여 있던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K : (Q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당기며 앉는다.) Q : (술잔을 따라 한잔 벌컥 벌컥 마시고) 그저 새파란 것들만 좋아하더니.. 저렇게 똥오줌 못 가리게 늙을 줄 몰랐지. 흐.. (빈 잔을 따르며) 흥. (K를 쳐다보며) 자네, 저 노인네가 왜 저 세상으로 못 가는지 알아? 그게 그 짓을 못해서 그래. 그 짓을 못해서. (술잔을 들며) 하루도 안 빠지구 젊은 것들 끼구 자다가, 군인들이 죄다 저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바람에 아주 그냥 순식간 에 폭삭 늙어 버리드라구. (점점 격분하며 목소리가 커진다.) 나는 죽어도 싫대드니 만, 천년 만년 세월 좋을 줄 알았지. 아마 저대루는 죽어두 눈두 못감을 거다. (남은 술을 마저 마시며) 자네두 이거 팔아서 얼마나 나온다고, 그렇게 애쓰지 마. (큰 목소리로 외치듯이) 돈벌구 싶으면 저 뒤뜰에 땅이나 파봐. K : (의아스런 눈으로 Q를 쳐다본다.) Q : 거기파문 이거판돈 열 배 아니 백 배는 나올거다. (슬슬 일어나며) 그때 번 돈 다 뭐했겠어? 읍내 한 번 안 나가던 예편네가.. (옆에 세워 놓았던 농기구를 들고일어나 돌아선다.) 지독한 늙은이. K는 가게문을 나가는 Q를 멍하니 바라본다. #17. 밤, 가게 안. K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탁자 위에 누워 있다. 종소리가 울린다. K가 일어나 앉아 방을 보며 한숨을 쉬고는 슬리퍼를 찍찍 끌며 노파 방으로 간다. 노파의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는데 노파는 꿈적도 않고 누워만 있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K는 탁자 위에 올라가 눕는다. 누운지 얼마 되지도 않아 종소리가 또 울린다. K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좁은 탁자 위에서 괴로운 듯이 '으으'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구른다. 종소리가 계속 울리고 결국 K가 이불에서 얼굴을 빼어 노파 방을 바라본다. K가 노파의 머리맡에 의자를 갖다놓고 그 위에 올라서 종소리를 요란히 내며 종을 떼어내고 있다. 종을 떼어낸 K는 밖으로 나가더니 의자를 세 개 더 가지고 와 노파의 침대 옆에 나란히 놓는다. 그리고는 그 위에 이불을 깔고 드러눕는다. 너무나도 조용하다. #18. 아침, 방안. 방안에 아침 햇쌀이 들어오고 노파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나란히 놓여있는 4개의 의자 위는 텅 비어 있다. K가 침대와 의자 사이에 떨어져 이불을 둘둘 말고 자고 있다. K가 잠에서 깨며 천천히 일어나 앉아 노파를 비롯 멍하니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무심결에 침대 앞에 있는 화분을 쳐다본다. 화분에 비해 나무가 너무 자라 나무 뿌리가 화분을 뚫고 밖으로 돌출 되어 있다. #19. 정오, 뒤뜰. 노파의 방안에 열어놓은 창문으로 한낮의 햇빛이 들어오고 노파의 머리 맡에 달려있는 긴 종줄이 바람에 조금씩 살랑거린다. Q가 경운기를 끌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야산을 돌아 비포장 도로의 흙먼지를 뿌옇게 날리며 오고 있다. Q가 멀찍이 가게 뒤뜰에서 땅을 파고 있는 K를 발견한다. Q : (경운기 핸들을 잡은 채 K를 보며) 허-허. 저 친구 정말루 땅을 파네. 어이- 어-이. 이봐. 열심히 땅을 파고 있던 K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허리를 펴며 Q를 본다. 반가운 K는 Q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Q도 한 손을 흔들며 K에게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K는 너무 멀리 떨어진데다가 경운기 소리에 묻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듣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끄덕 끄덕 거리며 웃고 있다. Q가 사라지고 K는 파던 땅을 마무리 짓고 삽을 옆으로 내려놓고는 뒷문 옆에 눕혀 놓았던 노파 방에서 가지고 나온 나무를 낑낑대며 들고 온다. 나무를 구덩이 안에 넣고 두 손으로 나무를 붙잡은 채 발로 흙을 조심스레 구덩이 안에 부어 넣는다. #20. 오후, 가게 안. K가 김치만 놓고 밥을 먹고 있다. 입안에 밥을 한가득 넣고 꾸역꾸역 씹고 있는데 방안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K가 일어나며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안에 있는 밥을 마저 씹으며 방으로 간다. 방으로 들어온 K는 씹던 밥을 멈추고 뚫어지게 노파를 쳐다본다. 침대 이불이 살짝 들쳐 지더니 거기서 신문지 뭉치를 든 노파의 손이 스-윽 나와 바닥으로 신문지 뭉치를 "툭"하고 떨어뜨린다. K가 저도 모르게 손을 입으로 가져가 인상을 쓰며 코와 입을 막는다. 한 손으로는 코를 잡고 다른 한 손에는 신문지 뭉치를 든 K가 가게문을 박차고 뛰어 나온다. 가게에서 나온 K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사방을 둘러보며 이쪽으로 저쪽으로 왔다 갔다 뛰어 다니더니 결국 들판 쪽으로 죽어라고 뛰어간다. 집이 저 멀리 보이는 곳까지 뛰어온 K는 있는 힘을 다해 신문지 뭉치를 멀리 집어던진다. 그제서야 K는 코를 잡고 있던 손을 떼고 허리를 구부려 두팔을 무릎 위에 올리고 어깨를 들썩들썩 거리며 '헉헉' 숨을 내쉰다. #21. 저녁 무렵, 가게 앞. K가 가게 앞 처마 밑에 한쪽 다리에 팔을 괴고는 축 늘어져 앉아있다. #22. 밤, 방안. K가 어두운 방안에서 침대 옆에 나란히 놓여진 나무 의자에 이불을 덮으며 눕는다. <나레이션> K : 나는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라 해가 지고 나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노인네는 배네똥을 싼거였다. #23. 오후, 가게 안. K가 가게 안을 서성거리고 있다. K가 슬쩍 방안을 들여다본다. 노인네는 꿈쩍도 하지 않고 누워있다. K가 노파의 침대 옆에 걸터앉아 무릎에 미음과 수저가 놓여 있는 쟁반을 올려놓고 멍하니 숟가락으로 미음만 휘젓고 있다. K가 창틀에 기대 문밖을 내다보다가 지루한 듯 돌아서더니 진열대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사탕통 안에서 막대기가 달린 사탕하나를 꺼내 입안에 넣는다. 그리고는 다시 지루한 얼굴로 사탕을 쪽쪽 빨며 누굴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창틀을 잡으며 밖을 내다본다. <나레이션> K : 그날 이후로 노인네는 날 부르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지루해 졌다. 어쩌다가 종소리를 들은 것 같아 (밖을 바라보던 K가 뒤돌아 방을 본다) 방으로 가보 면(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노파의 모습) 노인네는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있었다.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더위만 점점 더해갔다. #24. 오후, 가게 안. 빠위에 야채들을 다져놓은 그릇이 놓여있고 K가 도마에 당근을 올려놓고 썰고 있다. K가 능숙한 솜씨로 냄비에 기름을 둘러 야채를 볶는다. #25. 오후, 방안. 노파는 '푸우 푸우'숨소리만 내며 잠들어 있고, K는 창문 앞에서 물구나무를 서있다. 일어나서 노파에게로 다가와 의자위를 보면 아까 끓여놓은 야채죽이 식어서 액고 상태가 되어있다. 가만히 노파를 내려다 보던 K가 종이 잘 울리나 확인이라도 해보려는 것처럼 살짝 줄을 땡겨본다. 종소리가 울리고 K가 얼른 두 손으로 종을 잡지만, 노인네는 그럴 필요도 없을 것처럼 여전히 잠들어 있다. 노파를 보던 K, 뒤돌아 서서 괜히 장롱 위의 물건들만 하나씩 하나씩 들었다 놨다 한다. 잠시 후, 장롱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마루 바닥에 털썩 앉아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K 앞에는 서류 봉투 하나와 봉투에서 나온 사진뭉치 들이 여기 저기 흩뜨려져 있다. 한장 한장 사진을 들여다보는 K. 사진 속에는 노파의 젊은 시절의 추억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젊은 군인의 팔짱을 끼고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이고 어떤 사진들은 젊고 잘 생긴 남자 혼자 찍은 사진들도 많다. 남자들만 바뀔 뿐 똑같은 포즈에 똑같이 팔짱을 끼고 있는 여러 장의 사진을 넘기고 넘겨 이번에는 여느 사진과 다르게 젊은 시절의 노파 혼자 찍은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에는 머리를 틀어 올린 너무나도 곱고 고운 여인이 그윽한 눈으로 K를 쳐다보고 있다. 뚫어지게 사진을 보던 K, 손으로 사진 속 여인의 얼굴을 쓰윽 훑어 내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잠들어 있는 노파의 얼굴을 바라본다. #26. 오후, 방안. 마루 바닥에는 K가 어질러 놓은 사진들이 그대로 흩어져 있고 K는 노파의 사진 한 장을 들고 바닥에 앉아서 얼굴을 침대 위에 묻고 잠들어 있다. 뭔가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깬 K, 눈을 떠보니 노파가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 올려 덮고 있다. 깜짝 놀라 일어난 K는 밖에 나가서 이불을 가지고 와 노파의 이불 위에 자신의 이불을 마저 덮어 주고는 노파가 숨쉬기 쉽게 얼굴에 덮인 이불을 코까지 내려 준다. 잠시 후, 침대 위에는 몸을 구부린 채 작게 자리를 차지한 K가 노파와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다. <나레이션> K : 밖은 한 여름이었는데, 노인네는 왜 그렇게 추워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잤을까? 자다 깨어 보면 노인네는 자고 있고 그러면 나도 다시 잠들었다. 내가 깨어 있는 건지 꿈 속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창 밖은 해가 지고 있다. #27. 오후, 가게 안. K가 의자 깊숙이 파묻혀 졸고 있다. 갑자기 종소리가 울리고 동시에 K가 눈을 크게 뜨고 팔딱 일어나 앉는다. K가 천천히 발소리를 내며 노파 옆에 다가와 선다. 노파가 머리맡에 있는 등긁개를 집으려고 가느다란 손을 뻗치고 있다. K가 등긁개를 집어들어 노파의 한 쪽 어깨를 들춘 다음 그 안으로 등긁개를 집어넣어 천천히 시원하게 긁어 준다. 내친김에 K는 반대편도 마저 긁어주려고 노파의 몸을 조심스럽게 들어 돌려서 엎어놓고 웃옷을 들어올린다. 그러다가 K는 노파의 등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노파의 등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빽빽이 욕창이 퍼져 있다. 잠시 후, K가 젖은 수건을 가지고 들어와 앉는다. K가 천천히 노파의 등을 깨끗이 닦아낸다. 저녁 노을 빛이 낮게 창문을 뚫고 들어와 엎드려 있는 노파의 어깨를 감싼다. 노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K는 이불을 노파의 등위로 올리고 노파의 아랫도리를 마저 벗겨내고 발과 다리를 닦아내기 시작한다. 노파의 가는 뼈에 축축 늘어진 하얀 살들이 K의 손으로 문질러진다. 엎어진 채 가만히 누워 있던 노파가 눈을 뜬다. K는 노파를 닦아주는 걸 멈추고 한참을 그렇게 노파와 함께 가만히 있는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노파의 젊었을때의 사진이 놓인 침대가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순한 아이처럼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있던 노파의 얼굴은 삐그덕 거리는 침대 소리와 함께 천천히 위아래로 밀어 올려진다. 밀어 올려지는 속도가 조금 빨라지고 노파는 눈을 '꿈벅꿈벅'거린다. 침대에 엎드려 있는 노파와 한쪽 다리를 침대에 걸치고 서있는 K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러운 의식을 치룬다. 이제 주위로 정적이 흐른다.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엎드려 있던 노파는 노을 빛에 부신 눈을 깜박거리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노파의 주름 있는 얼굴이 마치 처녀때처럼 곱고 하얗게 환해진다. #28, 저녁, 방안. 지던 해는 거의 넘어갔고 침대 위에 똑바로 눕혀져 있는 노파의 시신과 옆에 놓여진 의자에 맨발에 바지만 입은 채 걸터앉아 노파를 바라보고 있는 K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29. 정오, 가게 앞. K가 '처녀네 식당'에 처음 도착했을 때하고 똑같은 차림에 가방을 메고 가게 앞에 서있다. 다만 이제는 '처녀네 식당'간판을 등지고 서있을 뿐이다. K가 잠시 서있더니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나레이션> K : 할머니는 눈을 감고 가셨다. 가게는 아저씨가 알아서 하라는 편지를 남기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덧붙혔다. K가 산비탈을 돌아 총총히 멀리 사라져 간다. 음악이 흐른다. 그 위로 자막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