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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것들의 스쾃 (2005. 12. 23)

버블건 2008. 3. 14. 14:46
사라져 가는 것들의 스쾃
  [전시 리뷰] 《열다섯 마을 이야기》전 [변길현 _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2005-12-23 오전 10:56:20
 
보자기로 싸인 구 전남도청
▲ 보자기로 싸인 구 전남도청

전남도청 건물을 바깥에서만 바라보다가 처음으로 건물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차가운 벽돌건물이 암울했던 시절의 상징이 되어버린 현실만큼 무겁게만 존재하던 전남도청 건물이駭? 막상 도청 안에 들어가 보니 의외로 작은 현관, 복도, 사무 공간 등은 그야말로 소도시 구청보다도 더 작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건물은 일제가 1930년에 지은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 건물은 지금은 구 전남도청이라고 해야 맞다. 몇 달 전 진짜 전남도청이 광주에서 전남 무안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무안 근처에 남악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여 일종의 행정타운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구 전남도청 건물은 한국현대사를 증언하는 역사적 유물로 남을 것이다.

이 건물에서 영상전시회가 열렸다. 단순히 건물 한 편을 장식하는 정도가 아니라 구 전남도청 내 3개 층의 모든 공간에서 영상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일종의 공식적 스쾃(squat)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때는 행정권력의 상징이었고, 한때는 민주화를 위해 젊은이들의 피로 젖었던 이곳에서 영상아카이브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복합적 표현 방식이 생활사의 단순성 극복

이 전시의 기획자인 큐레이터 전승보는 사라져가는 광주시민들의 삶의 애환이 서린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이 전시를 기획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기획자는 전시 주제가 되는 ‘열다섯 마을’의 선정을 위하여 지난 7월 일차적으로 각 구청에 연락하여 각 지역의 차별성 있는 내용을 가진 마을들, 혹은 소멸되기 쉽거나 사라지고 있는 이야기를 가진 마을들을 추천받았다. 특히 양림동, 양동, 남광주 시장 등은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서린 곳으로 이런 추천 과정을 통해 선정하였다.

또한 몇 차례의 자문회의를 거치며 광주시민들의 역사를 대표하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꽃잎처럼-5.18 광주민중항쟁을 선정하였다. 그 외에도 시민들의 삶의 경제를 살펴보는 충장로 상인, 말바우 아줌마 등이 있고 사회문화상을 엿보는 광주천변의 일상, 반룡마을 하숙생, 우리동네 골목길 등을 선정하였다. 이러한 기획의도와 진행과정은 전시주제를 살리는데 있어 큐레이터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타낸다. 이런 거대 전시에서 큐레이터 개인의 독단에 의하지 않고 체계적인 절차에 의해서 진행되었다는 것은 전시기획의 합리성과 전문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진시영 <골목길 아이들>


기획자는 기획의도에 가장 충실하기 위하여 미술분야 중 영상매체를 선택하였고 그리하여 영상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작가군 15팀(광주지역작가 14명, 기타 지역작가 9명)이 선발되었다. 참여작가들에게는 전시꼭지인 ‘15개마을’을 각각 할당하였고 2개월 동안 작가들은 해당마을의 역사를 공부하고 해당마을의 현장에서 자신의 스타일로 영상작품을 제작하였다. 이 때 마을이란 양동, 충장로, 남광주역처럼 지명이기도 하고, 골목길처럼 보통명사이기도 하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이나 5.18광주민중항쟁처럼 광주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청년작가 참여는 '미래를 향항 소통'

이런 절차를 통해 제작된 영상작품들은 전남도청 전층의 각 사무실에서 광주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지정된 광주면은 1931년 광주읍으로, 1935년에는 광주부로, 이어서 해방 후 1949년에는 전라남도 광주시로, 1986년에는 광주직할시로, 1995년에는 광주광역시로 변화하였는데, 이러한 발전과정의 수면 하에 있는 광주사람들의 삶의 진솔한 모습들과 애환이 영상으로 기록되어 전남도청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마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임정마을 벅수제(이이남, 김시하), 말바우시장 아줌마(안현숙), 양동과 대인시장(신재호), 반룡마을 하숙생(이정록, 이수영), 양림동이야기(박보나, 백종록), 우다방이야기(방우송, 이수경), 충장로 상인(김영태), 남광주역-시장(박상화), 광주천변의 일상(김혜선, 이진경, 인터미디어), 금곡마을(정기현, 접는 미술관) 등이다. 이 작품들은 마을생활사아카이브라 할 만 하며, 급격히 변해왔던 20세기를 겪은 광주의 생활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기획자는 농촌 사회를 근간으로 했던 광주의 주변부도 더 이상 전통적인 삶의 양식은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모든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고, 오랜 시간동안 우리의 이웃이었던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여 기록보존과 일반관람객을 위한 소통의 전략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마을의 역사와 생활사에 대한 아카이브적 접근은 자칫 단순 반복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러므로 기획자는 이러한 내용의 생활사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에 대해 답해야하고, 다른 지방의 생활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켜야하고, 영상작품을 통해 광주 마을의 생활사로서 모든 한국인의, 아니 모든 세계인의 보편성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도 기획자는 ?전시가 광주만의 전시가 아니도록 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어느 한 영상작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전시를 위해 수고한 모든 작가들의 작품들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보편성이 나온다. 참여 작가들의 작품은 인터뷰-영상스케치-개념적인 작업-실물 오브제의 등장-관련 사진과 사운드-음악-만화 등으로 이루어진, 보다 복합적인 표현방법이 등장했다. 예술적 감동의 깊이와 힘에서 부족하지 않으며 젊은 세대들뿐만 아니라 기성세대들에게도 익숙한 표현 매체들이다. 작품들은 오늘날 예술적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예술 표현의 영역을 짐작케 한다. 더욱이 광주지역 미술대학생들을 포함해 청년작가들의 대거 참여는 ‘미래를 향한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이 전시의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백종록 <양림동 이야기>


광주 사람이자 세계인 김남주 영상 압권

출품된 영상작품 모두를 다 관람하자면 걷는 시간 포함해서 약 2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 작품들을 보고 나서 필자가 느낀 개인적 소감은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로 갈음하고자 한다. 사평역이란 가상의 역이다. 아마도 전시주제 중 하나인 남광주역이 아닐까 추정하는데,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들, 보따리 행상들, 젊은 아가씨, 삶에 지친 중년 남자가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 남광주역의 애환과 기억들은 그대로 광주에 있는 보통사람들의 역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남광주역은 전남도청에서 지근거리여서 전남 화순, 보성 등지의 농어민들이 기차를 타고 농수산물을 함지박이나 보따리에 담아왔고 자연스럽게 남광주역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남광주역도 2000년도에 경전선의 폐선으로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불러와 보통사람들의 삶의 문화를 되새겨보고자 한 이 전시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했다고 본다.

우리동네 골목길(김창겸, 김태준, 진시영)은 광주뿐 아니라 서울 산동네 어디라도 해당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특별히 뛰어난 영상미는 아마도 다른 작품들이 기록성에 치중했다면 이 작품군은 골목길이라는 소재로서 순수 작품성을 취하기 위하여 작가의 개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박일구), 꽃잎처럼-5.18(김석현, 임영남)은 특별히 어느 마을에 관한 것은 아니고 일본식민세력이나 독재권력과 맞서 항거하였던 자랑스러운 광주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일견 열다섯마을이라는 구체적 생활사에 포함시키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지만 정신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보통사람들이 그러한 항쟁에 참여하였다는 측면에서 전시주제로 설정한 것은 옳았다고 본다.

이 전시의 압권은, 다시 말해 이 전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은 1층 복도 끝에 설치된 김남주시인의 시낭송이 나오는 영상작품이다. 김남주시인은 농민으로, 지식인으로, 투사로 한평생을 보낸 광주사람이자 세계인이었다. 70년대에는 반유신투쟁과 농민활동으로 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으로 한평생을 바친 그의 삶과 정신은 곧, 열다섯마을이야기전의 전시주제를 관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영상미나 예술미가 없이 단순 편집된 화면이지만 김남주시인의 육성은 아직도 살아남은 자들에게, 문화중심도시를 꿈꾸는 이들에게, 재개발로 인해 보상금이 얼마나 나올 것인가를 걱정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이 전시를 보는 이들에게 광주의 진정한 역사가 무엇인가를 들려준다.

그러나 보아다오 동지여! / 피의 양분없이 자유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했으니 / 보아다오 이 나무를 / 민족의 나무 해방의 나무 민족해방투쟁의 나무를 보아다오 / 이 나무를 키운 것은 이 나무를 이만큼이라도 키워 낸 것은 / 그들이 흘리고 간 피가 아니었던가 / 자기 시대를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 자기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 데 /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들 /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김남주 「전사 2」)


김혜선&이진경 <광주천변의 일상-쉬어가는 풍경>




인터미디어 <ON AIR CH5-휘트니스 클럽 천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