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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무관심을 건드리는 물음 (2008. 1. 31)

버블건 2008. 3. 14. 14:14
침묵과 무관심을 건드리는 물음
몰상식 코믹다큐 <지금 보고 계신 거죠>?
남신희 기자  

ⓒ 전라도닷컴
장면 하나: 세계여성평화포럼이란 행사가 펼쳐지고 있는 건물 안.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여성이 주체가 돼서 해결하기 위해…경험과 철학을 공유하고…” 박광태 시장의 열변이 이어진다. 말씀인즉슨 지당하고 훌륭하다. 그러나 말씀이 현실을 배반하거나 능멸할 때 그 말씀은 ‘엄숙 개그’가 된다.

안에서 가짜 말씀이 공허하게 쏟아지는 동안 밖에서 진짜 말씀이 절박하게 메아리친다. 시장님 말씀대로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나선’ 아줌마 노동자들의 복직 요구 목소리다.

행사장 안과 밖이 절묘한 한 짝을 이루는 그 풍경은 부조리한 현실을 극명하게 일깨운다.
광주시청 비정규직 청소 용역 노동자들의 복직투쟁을 담아낸 <지금 보고 계신 거죠?>(44분·호남인권영상공모전 대상작)의 한 장면이다.

비정규직 철폐 프로젝트 영상제작단 ‘비상’의 김영순·백종록·이정훈 감독은 이 작품에 ‘몰상식 코믹 다큐’라는 이름을 달았다. 너무 말이 안되면 웃음이 나오는 법이다. 그 웃음의 정체는 헛웃음, 혹은 쓴웃음.

장면 둘:
카메라는 시장님의 가식없는 발언도 공정하게 담아냈다. 바로 “나는 민주노총이 없어져야 된다는 사람이여”라는 소신을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장면. 이 당당한 커밍아웃을 누가 말기랴.

시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복직투쟁에 얽힌 이야기들
장면 셋: 시청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의 시청 주변 100미터 이내 출입과 시위를 금한다는 엄중한 목소리를 담은 표지판 뒤로 보이는 민망한 문구는 ‘문화수도 1등광주’.
들키고 말았다. ‘문화수도’ 팻말보다는 ‘접근 금지’ 표지판이 위압적인 시청 건물, 소통과는 담쌓은 행정의 모습에 더 어울린다는 것을.

장면 넷: 지난 해 3월8일 새벽 아줌마 노동자들이 시장면담과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속옷차림으로 저항하다 이불에 둘둘 말려 끌어내지는 장면들도 만난다. 광주 오월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해 층수마저 ‘5’층과 ‘18’층으로 지어 올렸다는 시 청사 안에서 저질러진 폭력이다. 숫자 따위야 정신의 얍삽한 위장일 뿐. 민주·인권·평화는 광주시가 우리 일상과 제도 속에 심으려 노력하는 가치가 아니라 그저 ‘상품화’시키고 싶어하는 구호나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도 확인시켜 줬다.
시가 지난 해 11월 시청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놀이패 신명의 5·18기념문화관 공연을 불허하고 작품지원금을 반환하라고 한 것도 같은 사례. ‘제 발 저린’ 증상에 대한 정직한 처방이긴 했지만 공연작품에 대한 시대착오적 탄압은 시가 자랑해마지 않는 ‘문화도시 1등광주’를 스스로 부정해버린 꼴이 됐다. 그 ‘반(反)문화’가 ‘5·18기념’이란 이름을 단 건물을 거느리고 벌어짐으로써 몰상식의 코믹함을 두 배로 늘리는 효과도 거뒀다.

‘문화수도’ ‘민주·인권도시’ 구호 뒤의 현실 담아
장면 다섯: 업무시간 중 시청사 출입문들의 셔터가 갑자기 내려지는 장면도 있다. 해고 노동자들의 항의공문을 접수하지 않기 위해서란다.

‘우리집에 왜 왔니’ 혹은 ‘문닫아 걸면 그만’이라는 식의 소심한(?) 대처가 못내 안쓰럽다. 하필 이 때 나타난 배달맨. “밥 먹었으면 그릇은 내놔야 될 것 아닌가”라는 자막이 농담처럼 끼여든다.

장면 여섯: 지난 해 4월 어느 아침의 시청 앞. 아줌마 노동자들의 동향을 감시하는 충성 공무원에 대고 한 아줌마가 “권불십년이여. 정의롭게 살아. 못써, 비겁하게 살문…”이라는 말씀을 날리는 장면도 만난다. 해고된 현실은 아직도 달라지지 않았으나 300여 일 긴긴 날들을 싸워오는 동안 아줌마들이 세상을, 사람을 보는 눈은 달라졌다.

ⓒ 전라도닷컴

장면 일곱:
지난 해 12월 광주인권영화제 이후 관객을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지금 보고 계신 거죠?>는 지난 1월10일 광주 충장로 삼복서점 앞에서 길거리 상영을 했다. 관객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선 것이다. 그러나 화면 앞에 발걸음 멈추는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난 해 5월 아줌마 노동자들은 노무현대통령 차량이 지나가는 국립5·18묘지 길목에서도 시위를 했었다. 경찰들이 아줌마들을 둘러쌌고,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 때 확성기를 든 이는 “우리를 둘러쌌던 이 수만큼만 우리와 함께 했었더라면…”이라 말했다.

 <지금 보고 계신 거죠?>는 침묵과 외면, 무관심을 건드리는 물음이다. 몰상식한 현실에 함께 분노하는 사람들 많아질수록 영화 바깥에 ‘진짜 웃음’이 찾아들 수 있겠다.

※<지금 보고 계신 거죠?>는 공동체상영운동으로 관객들을 지속적으로 만난다. 원하는 관객들에 맞춰 장소를 잡고 상영한다. <우리학교> <대추리전쟁> 등도 이같은 배급방식을 통해 많은 관객들과 만났다. 상영문의 062-366-1895, 010-6318-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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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출력  2008-01-31 18:03:32  
ⓒ 전라도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