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난담 Political

사회정의는 질서에 우선한다 - 홍세화

버블건 2007. 11. 18. 19:54
◎ 이름: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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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겐 사회정의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질서(안보)가 더 중요한가?"
이 질문에 독자는 어떤 대답을 할까? '사회정의' 라는 말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안보' 라는 말에 반해, '사회정의' 라는 말은 잘 말하지도 않고, 따라서 자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다. 한국에서 '사회정의'나 '연대'라는 말은 듣기 어려운 대신에, '고통분담' 이라는 말은 대유행이다. 아이엠에프 관리체제 이후 한국에서 실업률이 급등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실업률 12%에 육박하는 프랑스에는 미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 사회의 주된 화두는 '사회정의' 와 '연대' 이고, 한국 사회의 주된 화두는 '고통분담' 이다.

한국에서 아이엠에프 이후 어려운 시기였는데도 1년 동안 고위관료의 83%와 국회의원의  62%의 재산이 오히려 늘었다.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동안에 이른바 국민의 공복(고위관료)과 국민의 대표는 부(富)를 늘렸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서 주장하고 있는 '고통분담'의 실상이다.

프랑스에서 '고통분담' 이라는 말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당장 "누구의 고통을 누구에게 분담시키자는 말인가?" 라는 반발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위정자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애당초 그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 반면에 사회정의라는 말은 끊임없이 나온다. 정치인들이 벌이는 토론에서 안보나 질서라는 말은 듣기 어렵지만 사회정의라는 말은 빠지는 일이 없다. <르 몽드>의 도쿄 특파원인 필립 퐁스는 김대중 정부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병행 발전' 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르 몽드> 1999.2.26).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시장경제가 실현시킬 수 없는 사회정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필립 퐁스에게는 한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속에 사회정의가 빠져 있다는 점이 바로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 눈은 기자의 눈이라기보단 프랑스인의 눈이다. 프랑스인의 눈이 곧바로 "민주주의는 사회정의를 전제로 하는 것" 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다.

그 런데 프랑스에서 말하고 있는 사회정의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프랑스에서 말하는 사회정의는 한국에서 말하는 사회정의와 달라서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어느 법학도가 "나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법학을 지망했다" 라고 말했을 때의 사회정의는 프랑스에선 거의 논의 대상도 되지 않는 사회정의이다.

한국 법학도의 말이 담고 있는 속뜻은 결국 "나중에 판검사가 되거나 변호사가 되어 허물어진 '법질서'를 바로 세우겠다"에서 그리 먼 얘기가 아니다. 즉 오늘날 한국 사회에 만연된 권력의 부정부패, 정경유착, 권언유착 그리고 법조계를 포함한 사회 각계각층의 비위등으로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보고 그것을 바로 세우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법학도로서는 당연한 포부이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에서 부정부패, 정경유착, 권언유착, 각계각층의 비위는 한국에 비해 그 정도도 미미하거니와 그런 것들은 사회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법 적용의 대상이 될 뿐이다.

법학도의 말이 한국에서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프랑스에선 빗나간 얘기가 되는 까닭이 이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정의는 한국의 법학도가 말하는 사회정의의 윗단계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사회정의의 실현을 자아실현의 계기고 삼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철학, 역사학, 인간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을 먼저 선택하고 법학은 맨 나중에 선택한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에게 법이 담고 있는 의미란 '이미 획득된' 사회정의일 뿐이어서 결국 기존체제를 유지하는 장치가 된다고 파악하고 있다. 한마디로 법은 사회정의의 편이 아니라, 기존 질서의 편인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면, 젊었을 때 사회정의에 뜻을 품었던 한국의 법학도들이 나중에는 거의 모두 권력의 시녀들로 변해온 까닭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물론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프랑스에서 얘기되는 사회정의는 논의되는 범위가 넓은 만큼 그 개념 규정을 간단히 말하기 어렵다. 나의 능력을 벗어나기도 하거니와 이 글에 적합하지도 않다. 여기서는 다만 "사회 안에서 사유권이 중요하다면 사회구성원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더 중요하다" 라는 주장이 그 핵심이며 공통분모라는 것만 말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실제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서 '사유권 보장' 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국의 법률종사자들은 이 헌법 정신조차 제대로 천착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어쨌든 다시 처음의 질문, "사회정의가 더 중요한가, 질서(안보)가 도 중요한가?"로 돌아가자.

이 질문은 프랑스인들에게 정치적 성향을 결정케 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질문 앞에서, 각자의 계급적. 계층적 입장 차이가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 사이의 갈림길은 이 질문으로 갈라진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눈치를 챈 독자들도 있겠지만, 한국 사회와 프랑스 사회의 차이점 중에서 단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프랑스 사회는 사회정의가 질서(안보)에 우선하는데, 한국 사회는 질서(안보)가 사회정의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말할 것이다. 한국 사회나 프랑스 사회나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두 사회가 이처럼 서로 다른 까닭은, 프랑스의 기득권층 중에는 정치적 신념으로 자신의 계급적. 계층적 이해관계를 떠나 사회정의를 택하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에, 한국에선 거꾸로 비기득권층 중에서 질서(안보)를 택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산술 역학적 구도에서 보면, 한국의 기득권층이 분단상황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안보를 강조함으로써 비기득권층에게 기득권층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최근에 불었던 각종 바람(총풍, 북풍, 황풍.......)들이 비근한 예에 속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정의를 이룩하는 데 분단상태가 중대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기득권층은 분단상태를 직접적으로 이용할 뿐만 아니라, 분단상태로 확보한 국가안보 이데올로기를 아무 데나, 그리고 아무 때나 끌어와 사회정의의 요구를 막는 방패막이로 활용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활동을 '국가전복기도' 라고 비난했던 일이 그런 것이다.

프랑스에서 "사회정의는 질서에 우선한다" 라는 화두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알베르 카뮈가 처음 선언한 뒤로 지금 이 시간에도 예컨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 이냐시오 라모네는 줄기차게 이 화두를 붙잡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체제는 기존인 까닭에 질서의 이름으로 사회정의를 무시하려는 관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재확인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정체되거나 퇴행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981년에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사회정의가 없는 곳엔 질서도 안보도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실제 사회 안에서 사회정의와 질서가 정면으로 부딪치는 곳은 파업 현장이다. 우리가 '파업' 하면 곧 '경찰'을 떠올리게 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노동자들이 사회정의를 요구, 관철시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 파업이라면, 그 파업은 또한 기존질서에 도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파업이란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파업노동자들과 질서유지를 원하는 정부 사이에 "사회정의냐, 질서냐"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때 배심원은 국민이며, 판결은 국민의 여론으로 결정된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 최근에 있었던 프랑스 노동자들의 파업현장을 찾아가 프랑스 사회에서 사회정의와 질서가 어떻게 맞부딪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총파업:95년 11월-12월
파 리의 대중교통수단이 완전히 멈춰버린 지2주를 넘겼다. 그 동안 단 한 차량의 지하철도, 고속전철도, 전차도, 기차도 없었고, 단 한 대의 시내버스도 운행되지 않았다. 시민들은 평소에 대중교통수단의 중요성과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불평하기 일쑤다. 그러던 파리 시민들이 여간 혼나고 있는 게 아니었고, 그렇게 혼나면서야 대중교통수단의 중요성과 고마움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자 동차의 홍수 그리고 또 홍수. 총연장 500킬로미터 이상 막히는 신기록. 평소 출퇴근 합쳐 평균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던 게 5-6시간을 길에서 보내게 되었다. 때아닌 자동차 함께타기 운동. 상점에서 완전히 동난 자전거와 롤러 스케이트. 새로이 교통수단으로 등장한 쎄느 강 위의 배. 성탄과 연말연시를 앞두고 대목을 기대했던 상인들의 울상과 아우성........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시민들의 불평, 불만의 소리가 높아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 불평, 불만이 꼭 파업노동자들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불편하지요. 하지만 나는 파업노동자들을 100% 지지하고 있습니다."

공 영방송인 프랑스 제2텔레비전의 화면에 비친 한 중년부인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 그녀의 웃는 표정은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연대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금 불편하다고 파업에 반대한다면 그 반대의 목소리가 나중에는 자신한테도 돌아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여론조사는 국민과 과반수가 대중교통수단에 대해 최소한의 서비스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55-65%의 국민이 파업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합하면 100%를 넘는 두 숫자가 보여주는 모순은 바로 똘레랑스로 설명될 수 있다. 즉 똘레랑스로 불편함에 대한 불평, 불만을 털어내고 파업 노동자들의 사회정의 요구에 연대하는 것이다.

파업은 알랭 쥐페 수상이 사회보장적자 감축안을 의회에 제출하면서 촉발되었다. 총 2,500억 프랑에 이르고 있는 사회보장적자를 줄이기 위한 해결책이라며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쥐페 안'의 골자는 모든 소득에서 0.5%의 '사회부채 상환세'를 원천 징수한다는 것, 현재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37.5년 근무=연금률 100%'인 것을 사기업과 똑같이 40년으로 늘이는 등 연금체제를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특히 철도원, 지하철노동자, 버스운전자에 적용해왔던 특별 연금체제를 없애겠다는 내용이 관련조동자들을 가장 분노케했다. 일생 동안 어려운 조건에서 일한다는 것을 무시하는 처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 소득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노동소득에만 손을 댐으로써 노동자들의 희생만을 강요한다고 판단한 그들은 "사회정의는 어디에!"를 외치기 시작했다.

파업의 불길이 당겨진 곳은 프랑스 국영철도(SNCF)였다. 철도노동자들은 각 사업장 단위로 총회를 열고 '쥐페 안'을 놓고 토론을 벌인 뒤 즉각 파업을 결의했다. 그들은 전광석화처럼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노동총동맹(CGT),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과 '노동자의 힘(FO)' 의 모든 노조가 함께, 그리고 비노조원도 가세하여 거의 만장일치로 파업을 결의했다. 마르세이유에서도, 르망에서도, 파리 동역에서도, 북역에서도, 몽파르나스 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곧 프랑스 전역에서 열차는 단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고 모든 역의 안내판에는 "오늘은 출발열차도 도착열차도 없습니다"라고 표시되었다.

국철이 파업을 시작한 지 나흘 뒤, 파리교통공사(RATP)와 각 지역 교통공사들의 노동자들이 국철 노동자들을 뒤따랐다. 지하철 입구에는 철문이 내려졌고 시내버스 배차장은 문이 닫히거나 파업노동자들의 농성장이 되었다. 우체국의 우편분류소도 하나 둘 파업에 가담하기 시작하여 편지들이 2주씩 분류소에서 잠을 자게 되었고, 쥐페 수상이 시장으로 겸직 중인 보르도 시에서는 청소부들도 파업에 참가하여 '포도주 보르도'는 '쓰레기 보르도'가 되었다.

철도와 지하철 노동자들보다는 참가율이 적었지만, 병원 근무자, 교사, 세무 공무원, 사회보장처 직원, 시 직원, 프랑스 전기가스공사(EDF) 노동자, 프랑스 통신(France Telecom) 노동자들도 파업에 참가했다.
그 리하여 프랑스 사회가 반(半) 마비 상태에 빠졌다고 신문과 방송이 말할 정도로, 그리고 1968년 5월 이후 처음 보는 심각한 사태라고 말할 정도로 파업은 공공부문의 거의 전 분야에 확산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영향을 미친 부문은 역시 대중교통 부문이었다. 다른 부문이 부분파업에 머물렀던 반면에 100% 완전파업이었고 또 기간도 길었기 때문이다.


정부도 처음에는 완강했다. 니콜 노타 CFDT 노조위원장은 쥐페 수상 편을 들어 기초사업장 노동자들의 분노를 샀다. 그리고 알랭 투렌, 자크 쥘리아르 등 좌파로 행세했던 지식인을 포함한 일군의 지식인들이 쥐페 안에 찬성한다는 내용의 호소문에 서명하였다.

이지지 호소문이 나오자마자 곧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 피에르 뷔달 나케, 에티엔 발리바르를 비롯한 다른 일군의 지식인들은 '파업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호소문' 에 서명함으로써 지식인들은 두 진영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두 진영의 불꽃 튀기는 논쟁은 좌우정치인 사이의 논쟁보다 더 격렬했다. 쥐페 안 지지파들은 세계화로 기존의 사회보장제는 이미 낡은 것이 되어 성장에 걸림돌이 되었다고 주장한 반면에, 파업 지지파는 쥐페 안이 신자유주의의 관철 형태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부와 파업노동자 사이의 힘겨루기 싸움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파업은 장기화되었다. 그러나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국민의 지지여론은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파업노동자들의 투쟁 열기는 식지 않았다. 각 농성장엔 가족들도 호응하여 함께 어울려 식사를 했고 '앵테르나시오날' 등의 노래를 같이 불렀다. 그리고 3주 동안 여섯 번에 걸쳐 '행동의 날'로 정해 거리시위에 나서, 파업의 최정점이었던 12월 12일에는 전국적으로 200만의 노동자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툴루즈에선 학생들이 연대하여 노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행진하였다.

파리의 시위에서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는데도 20만의 시위대가 공화국광장에 운집하였다. 시위대는 바스티유 광장을 거쳐 국민광장까지 행진하였다. 집합 장소인 공화국광장, 통과하는 바스티유 광장 그리고 시위를 마치는 국민광장은 모두 프랑스의 사회투쟁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파리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시위는 거의 이 길을 택한다.

시위대의 선두에는 처음 파업을 일으킨 국철 노동자들이 섰다. 루이 비아네 노동총동맹 노조위원장과 마르크 블롱델 '노동자의 힘' 노조위워장이 그 뒤를 이었고 그 다음에 파리교통공사의 노동자들이 뒤따랐다. 교원노조, 병원노조 등의 노동자들 그리고 일부 대학생들이 뒤를 이었다.

"손대지 말라! 우리의 사회보장" "쥐페 안은 가고 사회정의는 오라!"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대는 북을 치거나 불꽃연기탄을 터뜨려 기를 올렸고 구호를 외쳤다. 연도의 시민들은 박수를 보내 호응했다. 그 모습은 흡사 어른들이 벌이는 어린이축제처럼 보였다. 12시에 시작된 시위는 날이 저문 6시 이후에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결 국 정부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빈 과반수가 등을 돌린 것으로 나타났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회부채상환세는 그대로 남았지만 연금체제 관련 부문은 쥐페 안에서 사라졌다. 쥐페 수상은 말만으로 안심하지 못하겠다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서면으로 폐기를 약속해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렇게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파업과 거리투쟁으로 당시 의회 의석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우파 정부를 이겨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리고 3주 동안 일체의 궤도차량과 시내버스를 정지시키고 파업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저력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은 간단히 '노동자들의 단결' 과 국민 과반수의지지' 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대답은 프랑스인에겐 통하지만 한국인에겐 불충분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노동자들의 단결에서 국민 과반수의 지지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막기 위한 숱한 통제와 억압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장치들과 연관지어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3 주 동안 파업이 계속되고 200만에 이르는 노동자가 거리시위를 벌였는데도 단 한 사람도 체포, 구속, 수배되지 않았고 해고도 징계되지 않았다. 공공부문의 노동자들이었는데도 그랬다. 프랑스에서 군인을 뺀 모든 사람에게 노동 3권은 불가침이다.

경찰에게도 쟁의권이 있어서, 파리에선 종종 경찰시위대를 경찰이 막는 기이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경찰이 시위를 벌이는 모습은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 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 정이 이렇다 보니 파업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소리가 당연히 나온다. 사회생활과 국민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부문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서비스를 보장하도록 파업권을 제한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이번 파업 중에도 같은 주장이 되풀이되었다. 이에 대해 파업노조측은, "파업권을 줄인다고 불만이 줄어드느냐!" 또는 "환자에게서 온도계를 뗀다고 열이 떨어지느냐!" 라고 응수했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이 즐기는 '수사학' 에서도 노조측은 점수를 얻었다.

한편 프랑스의 어느 신문도 "근로자들은 이성을 되찾아라!" "노동자파업, 불경기에 부채질" 따위의 사설을 싣지 않았고, 대신에 미리 노조와 협상을 벌이지 않은 쥐페 수상을 비난했다. 또 어느 방송에서도 "파업이 국가경쟁력에 미치는 악영향" 운운하는 전문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사회정의 없는 국가경쟁력은 무의미한 것이다. 서울에서 3주 동안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지하철과 시내버스가 운행 정지됐을 때 한국의 언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 보자. 그것은 나보다 독자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자크 시락 대통령은 3주 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국가전복기도'였다면 이번 파업은 물론, 프랑스의 모든 파업이 국가전복기도의 정도가 아니라 '전복 행위'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그런데도 시락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공화국의 대통령이지, 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파업은 프랑스의 사회운동사에서도 중요하게 자리매김될 것이다. 이 파업의 특징은 노동자들이 새로운 요구조건을 내걸고 먼저 시작한 게 아니라,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자 함에 대한 방어적 파업이었다는 데 있다. 우파 정부는 기존의 사회보장제도에 신자유주의를 도입하여 칼을 대고자 했다가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후퇴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 파업의 승리는 쥐페 정부에 대한 승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공격을 물리친 것이기도 했다. 또 1년 남짓 뒤에 좌파가 정권을 잡게 되는 정국 전환점이 되었다.

이 파업을 불러일으킨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은 파업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피에르 부르디외파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12월> 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쥐페 안 지지 지식인들 특히 그 중에서도 기득권 좌파 지식인들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여 날카롭게 '사회학적 테러리스트들' 이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다. 신자유주의에 관한 논쟁은 급기야 기득권 좌파에 관련된 논쟁까지 불러왔던 것이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기초한 선언문의 한 예로 '파업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호소문'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보고자 한다. 이 호소문은 드레퓌스 사건 이후 프랑스의 지식인운동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문건으로 길이 남게 될 것이다. 호소문은 <르 몽드> 1995년 12월 5일자에 실렸다. 제재비용 5만 프랑은 단일노조연맹(FSU)이 우선 지불하였는데 호소문에 참여했던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수표(기부금)가 답지하여 곧 상환하였고 남은 돈은 파업노동자들에게 전달되었다.



파업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호소
우 리는 현 정부의 공세에 맞서서 지난 몇 주 동안 투쟁에 돌입한 모든 이들에게 전적인 연대감을 표명함으로써 우리의 책무에 임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운동이 특정 계층의 이익이나 특권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공화국의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사회적 제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파업노동자들이 벌이고 있는 투쟁은 다만 그들만의 투쟁이 아니다. 남녀노소, 실업자와 봉급생활자, 공무원, 공공부문 노동자와 사기업노동자, 이주노동자와 프랑스인등 만민의 권리와 평등을 위한 투쟁이다.

사회보장과 은퇴자들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여 노동자들이 수호하려는 것은 오늘날 단기적인 수익성 추구로 위협받고 있는, 평등과 연대의 보증인 공공서비스인 것이다. 대학생들이 교직원 충원과 추가 예산을 요구하면서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단계에 열려 있는 공교육, 연대를 보증하며 지식과 고용의 권리를 실제적으로 평등하게 보증해주는 공교육인 것이다.

여성의 제권리에 대한 침해에 맞서 거리투쟁에 나선 모든 이들이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평등이다. 이 모든 것은 과연 우리가 앞으로 어떠한 사회를 건설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동시에 어떤 유럽이어야 하는가, 즉 우리가 강요받고 있는 자유주의의 유럽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바라는 바인 시민들을 위한 복지사회이며 환경친화적인 유럽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오 늘의 운동은 정부정책에게만 위기일 뿐이며 시민들에게는 더 나은 민주주의, 더 나은 평등, 더 나은 연대 그리고 1946년에 제정되고 1958년에 다시 채택된 헌법 전문의 실제적인 적용을 향한 출발점이다. 우리는 모든 시민들에게 이 운동에 동참할 것과 이 운동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앞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 임해주길 바란다. 우리는 모든 시민들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파업노동자들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1995년 12월 4일).



트럭운전사들의 파업:96년11월
1996 년 11월 18일 스트라스부르에는 진눈깨비가 내렸다. 스트라스부르는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독일 땅과 만나는 국경도시이며 유럽의회가 자리잡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라는 것은 유럽의회가 이곳 독불 국경도시에 자리잡았다는 것과 라인 강을 건너는 다리의 이름이 '유럽의 다리' 인 것으로도 조금은 느낄 수 있다.

그날 한 무리의 트럭운전사들이 각각 몰고 온 트럭으로 유럽의 다리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쪽 다리였다. 노조측의 협상과 중재 요구에 사용자측과 정부측이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트럭운전사들의 실력행사가 시작된 것이다. 승용차만 겨우 지나갈 만한 폭만 남겨두고 트럭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곧 독일과 프랑스를 잇는 유럽의 다리는 사람은 넘나들 수 있지만 화물은 넘나들 수 없는 다리가 되었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 나오는 칼바도스는 노르망디 지방의 칼바도스 도(道)에서 생산하는 사과 브랜디이다. 칼바도스 도의 도청소재지 이름은 캉인데 이 도시의 나이 많은 시민들은 미국에 대하여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마구 폭격하여 아름다웠던 도시가 90% 이상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트럭 바리케이드는 이 도시의 주변도로를 모두 막아버렸다. 근처에 있는 정유소도 봉쇄되었다. 차츰차츰 프랑스 곳곳의 주요도로가 막혔다. 프랑스 트럭은 물론 프랑스 땅에 있던 영국.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러시아. 폴란드 국적의 트럭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파업에 는 노동총동맹(CGT),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 노동자의 힘(FO), 프랑스가톨릭 노동동맹(CFTC)과 트럭운전사독립노조등 관련노조가 모두 참가했다. 그 중에서 노조원 숫자가 제일 많은 프랑스민주노동동맹은 바리케이드 봉쇄에 따른 행동지침을 마련했는데 다음과 같았다. 첫째, 승용차는 지나가게 한다. 둘째, 술을 마시지 않는다. 셋째, 외국 트럭운전사들을 이해시키도록 한다. 그들은 요구 사항을 각 나라말로 번역하여 알렸고 특히 이번 처우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려고 노력했다.

파 업이 일주일을 넘기면서 총 바리케이드의 숫자는 240개에 이르렀다. 정유소는 첫째 봉쇄 목표였고 고속도로와 주요 간선도로도 모두 봉쇄했다. 파리의 청과물과 해산물 도매시장도 봉쇄대상에 들어갔다. 결국 프랑스의 화물 육로교통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프랑스의 위치를 보면, 프랑스 육로교통의 마비란 곧 유럽 육로교통의 마비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의 다리가 끊겼듯이 북유럽과 남유럽을 잇는 다리도 끊긴 셈이었다. 영국의 도버 항구는 프랑스로 가거나 프랑스로 돌아올 트럭들이 묶이는 바람에 대단한 혼란에 휩싸였다.육로교통의 마비가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리용, 마르세이유, 보르도 시 등에선 주유소에 기름이 한방울도 남지 않아 긴급차량을 위한 징발이 시행되었고 일부 학교는 난방을 할 수 없어 문을 닫아야 했다. 닭 기르는 사람, 돼지 치는 사람들은 사료와 연료 부족을 호소했고 슈퍼마켓에서 우유, 요구르트, 야채, 과일, 생선, 고기류 등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제조업 분야에서도 부품 부족에 따른 조업중단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미슐랭은 일부 타이어 생산을 중단했고 퓨조와 르노 자동차공장도 부분생산에 들어가야 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스페인과 포르투갈, 독일의 공장에서도 조업중단 사태가 속출하였다. 영국은 야채와 과일을 스페인에서 비행기로 공수하기도 했다.

"프랑스 경찰은 도대체 뭐하고 있는가? 우리 나라였다면 바로 첫날에 경찰이 출동했을 것이다."

남 의 땅에서 졸지에 발이 묶인 영국의 트럭운전사가 이렇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어느 독일인 트럭운전사는, "사용자측과의 협상이 끝내 결렬되었을 때 행동에 옮겨야지 지금 협상중이라면서 이럴 수가 있는가?" 라고 따지기도 했다. 둘 다 그 나라 사람다운 반응이었고 항의였다. 그들은 프랑스에서는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물론 이 원칙이 있다 하더라도 자크 시락-알랭 쥐페 정권이 국민의 신임을 얻고 있다면 트럭운전사들의 도로 봉쇄 파업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다르게 나타났을 수 있다. 국민의 74%가 파업노동자들에게 연대감을 표시했는데, 당시 시락 30%와 쥐페 22%의 신임도와 역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파 업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55세에 조기 은퇴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자리에 젊은 실업자들을 대신 채용할 것, 임금을 인상할 것 그리고 운전 외 근무시간도 근무시간으로 계산할 것 등이있다. 이 요구에 대하여 국민 87%가 정당한 것이라고 지지했다. 파업노동자들의 요구사항에 대하여 국민들이 이렇게 높은 지지율을 보내게 된 이유를 알자면, 트럭운전사들의 노동조건을 알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약 3만 5천 개의 운수회사가 있는데, 여기서 일하는 봉급운전자의 숫자는 20만 명을 조금 넘는다. 두 개의 수치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운수회사의 80% 이상은 10명 미만의 운전자를 고용하고 있는 영세한 기업이다. 80년대 말 신자유주의 물결이 들어오면서 느슨해진 기업 규정을 업고 새로운 운수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여기에다 최근 불어닥친 불경기로 덤핑가격이 형성되자, 운수회사 사이에서 노동비용을 줄이는 경쟁이 벌어졌다. 그 길만이 살아남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임금을 동결시키는 한편, 화물을 싣고 내리는 시간 등을 근무시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15시간 일하고도 9시간만 인정받는 게 보통이었다. 주당 60시간씩 일하고도 월급은 수당까지 합쳐 9천 프랑에서 1만 2천 프랑에 지나지 않았다. 트럭운전이라는 격무와 주 60시간 일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프랑스의 급여 수준으로 보아 엄청난 박봉이었다. 그래서 과격한 파업임에도 국민들이 높은 지지율을 보였던 것이다.

실상 그들의 파업은 과격했다. 특히 다른 나라의 트럭운전사들까지 볼모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라고 해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영국의 존 메이저 수상은 프랑스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겠다고 선언했고 독일에서도 같은 요구가 나왔다. 그런데 프랑스 국민은 이렇듯 과격한 파업방식에 대해서도 59%가 동의했다. 국민 과반수의 동의를 얻고 있으니 정부는 함부로 경찰을 동원할 수 없었다.

국민의 지지를 얻자 파업노동자들은 추위도 잊었다. 각 봉쇄 바리케이드 근처에 있는 카페들은 파업노동자들의 토론으로 활기가 넘쳤다. 지역사회에서는 샤워장을 마련해 주었고 지역노조는 열심히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돈이 떨어진 스페인 운전사가 있으니 도와 줍시다" 라는 말에 지나가던 승용차 운전자들은 선뜻 10프랑, 50프랑씩을 내주었고 어느 수줍은 부인은 파업노동자들에게 빵을 한아름 안겨주고는 슬그머니 가버리기도 했다.

노사간의 협상이 지지부진하여 파업이 길어지자, 급해진 것은 정부였다. 정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아니라 사회 폭발이었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이냐시오 라모네 주필은 이미 가을 문턱에 사회 폭발의 가능성에 대하여 경고한 바 있었다. 그는 '붉은 9월' 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12.6%에 이르는 실업률, 그 중에서도 22%에 이르고 있는 젊은 층의 실업률, '시장전체주의' 인 신자유주의로 더욱 심해지고 있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 부랑자와 집없는 사람들의 확산 그리고 권력층의 부패상 등으로 이미 '국민적 항거' 하는 폭탄은 항시 존재하고 있으며 다만 도화선이 될 계기가 필요한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 폭발 가능성의 근거로 '프랑스 공화주의의 프랑스적 예외'를 거듭 강조했다. 즉 '사회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실제로 정부는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업이 다른 부문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CFDT의 니콜 노타 위원장, FO의 마르크 블롱델 위원장 등과 수시로 연락을 취해 점검했다. 그리고 파업을 빨리 종결시키기 위해 사용자측에 양보하라고 압력을 넣었고 정부도 조기은퇴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단안을 내렸다. 55세 퇴직에 따른 연금추가비용의 대부분을 정부가 책임지며 운전 외 근무시간에 대하여 100%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령으로 정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파업노조는 세 가지 요구 사항 중에서 55세 은퇴를 획득했고, 임금인상 부분은 미흡하지만 그 대신에 운전 외 근무시간에 대한 임금을 확보했으므로 결국 같은 성과를 얻었다고 보고 12일 간의 바리케이드 파업을 끝냈다.

이 와 같은 프랑스 정부의 굴복에 대해 앵글로색슨계의 신자유주의 신문들은 한결같이 비판적인 논설을 실었다. 뉴욕의 <월 스트리트 저널>은 "그것은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노조의 승리일 뿐이다. 경쟁력과 고용 부문에서 앞으로 오랫동안 부정적인 결과를 느끼게 될 것이다"라고 썼고, 런던의 <파이낸셜 타임즈>는 "영국은 이웃 프랑스에 교훈을 줄 게 있다. 70년대 노조의 거친 파업이 영국을 무정부상태로 몰아넣었을 때 정부는 무능력 자체였다. 그러다가 대처가 수상이 된 1979년, 단호한 법과 정치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해냈다. 1995년 연파업 일수는 1979년에 비해 85%가 줄었다"고 썼다.

두 신문은 결국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파업을 깨부수지 않은 프랑스 정부가 못마땅하다는 논조를 보인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신문들의 당연한 반응이었는데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게 있다. 바로 '프랑스적 예외' 이다. 또 "현재 미국과 영국 두 나라의 사회적 불평등은 30년대 불황 이후 가장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쓴, 같은 자유주의 계열이지만 세련된 <디 이코노미스트> 지의 경고도 무시하고 있다. 대처 집권을 전후한 20년 사이에 영국의 궁핍생활자 수가 500만에서 1,400만으로 늘어난 것도 신자유주의 논자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번 파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프랑스 땅에서 대처가 서 있을 자리는 없다. 그 차이로 프랑스인은 시민(Citoyen)이고 영국인은 신민(Subject)인지도 모른다. //

출처 http://blog.naver.com/kimseye3/130023322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