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
"나는 올라가고 싶지 않아. 게다가 이 술, 내일 아침까지 말짱하게 깰 것 같지 않고……."
"그래도 선생님……."
"그러니까 상선사는 너희들이나 올라갔다 내려오너라. 완허 스님 찾아보는 거 잊지 말고……."
한재기 교수가 전날 밤에 이렇게 분명히 일렀는데도 불구하고 학생 대표는 신새벽에 한 교수와 내가 자고 있던 여관방 문을 두드리면서, 함께 상선사 오르자고 졸랐다.
"선생님께서 올라가 주시면 저희들은, 저희들 눈으로 볼 수 없던 것들도 볼 수 있게 됩니다."
"지금 그 눈으로 보고 와도 좋아. 내가 본 것은 내 것이지 너희들 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힘 좋은 너희들이나 올라갔다가 내려오너라."
"하지만 선생님께서 보신 것을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시면 저희들은 선생님 눈으로……."
"네가 나에게, 가르치는 방법까지 귀뜀해 줄 것은 없다. 나는 이렇게 가르치는 수도 있다고 믿으니까 이걸로 되었다. 완허 스님을 찾아봐라. 내 이름 대면 잘 안내해 줄 거다."
학생 대표는 한 교수에게, '알면 보이고, 그렇게 보인 것은 전에 본 것과 같지 않다'니까 더 보고 더 알게 해주기를 소원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한 교수는 전날 밤 학생들에게, 선방(禪房) 들여다보고 와서는, 선생님, 아무것도 없던데요, 하고 묻더라는 얼빠진 학생들 얘기를 한 적도 있다. 학생 대표는 그러니까, 저희들이 잘못 보지 않도록 선생님께서 인솔해 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뜻에서 부득부득 우겼던 것 같다.
"하여튼 나는 산 오를 기분도 상태도 아니니까 너희들끼리 다녀오너라."
"선생님,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는데……."
"나는 처음부터 이곳이 탐탁지 않았다. 이리 오자고 조른 것은 너희들이 아니냐?"
"참, 할 수 없네. 그런데 선생님, 완허 스님의 법명 한자로는 어떻게 쓰는데요?"
"'완허'면 되었지……. 나도 모르겠다."
"완허 스님 안계시면요?"
"없으면 없는 거지……. 그 책임도 내가 지랴? 너희들 제발 연줄 찾는 거 좋아하지 말고 올라가 보아라. 올라가서 너희들 느낌으로 보고 오너라. 절 찾아가는 맛에는, 중 모르고 불쑥 들어가 느껴 보는 맛도 있다. 완허 스님, 거기에 없다고 하거든, 어이로 가셨는지 한번 알아보아라. 중을 두고 괜히들 '운수행각(雲水行脚)'이라고 하는 줄 아니? 여직 상선사에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만, 혹 아니? 떠나서 떠돌다가 다시 상선사에 와 있을지……."
"선생님과는 어떻게 아신 사이이신데요 ?"
"그 친구 말 많네……. 그냥 내 이름 대면 알아."
한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돌아누웠다. 학생 대표가 또 뭐라고 했지만 한 교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선생도 아니고 제자도 아닌, 한 교수 술친구로, 'MT'를 빙자한 봄맞이 남도 여행에 묻어간 처지여서 한 마디 할 계제가 아니었다. 나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멀어져 가는 학생 대표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학생들이 빠져 나가서 물밑처럼 조용해진 여관방에 가만히 누워 있자니 어쩐지 느낌이 이상해서, 이불을 걷고는 한 교수에게 물어 보았다.
"……한 교수, 상선사에 당신 친구 있다는 말, 금시초문인데요?"
한 교수는 이불을 살짝 걷고 내 얼굴을 잠깐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도 다시 이불 뒤집어쓰고는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상선사도 구경하고 완허 스님도 뵐 겸, 학생들 따라 올라갈걸 그랬나, 싶었다.
한 교수는 나와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 아내들 주선으로 만나고 보니 동향이어서 가까워진 나의 산행 친구다. 내가 그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 것은 이 년 전의 늦은 봄, 나 혼자서 계룡산 중턱에 그림같이 자리잡고 있는 도예 마을 다녀온 직후다. 도예가들의 감수성이 배어 있는 듯한 계룡산 중턱의 서양식 작업실과 살림집들이 놀라우리 만치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그릇 사는 것은 고사하고 도예가들의 작업실 구경도 하지 않고 산을 내려왔다. 그 잘 지어진 양옥의 그 잘 가꾸어진 잔디밭에서 자동차를 닦고 있는 사람을 여럿 보고는 그만 심정이 팍 상해 버렸던 까닭이다. 바로 그 해 봄에 나는, 절 구경하러 올라가다가, 젊은 중이 맑은 산골물로 주지(住持)의 자동차 닦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심정이 팍 상해 산을 내려와 버렸다는 한 교수를 만났다. 한 교수는 소싯적에 승적(僧籍) 가진 적이 잠깐 있다는 사람이라는데도 절을 욕하고 스님들 욕할 때는 가차없었다. 따라서 그와 나는 친구 사이라고 해서 옛친구인 것도 아니고, 산행 친구라고 해서 팔도 명산을 다 뒤지고 다니는 장거리 산행 친구인 것도 아니다. 우리가 찾아다니는 산은 기껏해야 관악산이나 청계산, 그것도 주봉이 아닌 갈래 야산 자락이다. 우리는 느릿느릿 야산 자락을 뒤지고 다니다 좌향(坐向)이 좋은 무덤을 만나면 그 무덤 상석에다 가지고 간 가짜 막걸리와 음식을 벌여 놓고 마시고는 했다. 마시기 전에 먼저 무덤에다 잔 치고, 고수레하는 일 거르지 않는 정성과, 봄이면 무덤 위로 솟는 아카시아, 떡갈, 자귀나무 등 속을 뿌리째 뽑아 주는 잔손길로, 그 무덤 돌보는 자손들로부터 면죄부를 얻고자 했다.
4월에 그와 내가 어울리면 술을 많이 마신다. 술집에서 마시지 않고 산이나 들이나 남의 무덤 곁에서 마신다.
산이나 들에서, 남의 무덤 곁에서 막걸리 취하도록 마시고 하늘을 향하여 게트림을 하면 나는 무조건 아득하게 행복해진다. 죽을
것들이 무수히 태어나는 4월의, 진달래와 산벚 흐드러지는 남의 조상 무덤가는 얼마나 좋은 술자리인가? 4월에 무덤가에서 술을
마셔 보면 T.S.엘리엇이,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부른 까닭이 헤아려지고는 한다.
4월이 오면 한 교수와 나는 집 안에서 잘 견디지 못하고 걸핏하면 산과 들을 헤맨다. 4월은,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데는, 사람의 발길이나 손길이 덜 닿는 산이다. 산을 덜 좋아하는 사람이 나들이꾼으로 섞이면 대공원에 가기도 하지만 휴일에는 무조건 대공원을 피한다. 인문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이 섞이거나 나무 보고 꽃 보고 다니다 지치면 지근거리에 있는 현대미술관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야산이 가장 좋고, 대공원이 그 다음으로 좋고, 현대미술관이 그 다음이다. 예술가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매봉의 굽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는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어떤 예술품에 견주어도 저만치 윗길이다. 야산 나무 구경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면 미국 시인 조이스 킬머가, '나 같은 바보도 시는 쓰지만 신(神) 아니면 나무는 만들지 못한다'고 읊은 까닭이 헤아려지고는 한다. 한 교수는 풀과 나무에 놀랍게 집착하는 사람, 자연의 생태에 놀랍게 박식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와의 산행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안기는 깨달음의 산행이면서도 때로는 그가 지나치게 집요하게 설명하는 바람에 적지 않게 성가신 산행이 되고는 한다.
그는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성가실 것입니다. 저도 저 자신에게 물어 보고는 하지요. 꽃 이름 풀 이름을 더 알면 더 행복해지겠느냐고요. 하지만 알고 싶은 걸요. 꽃 이름 풀 이름 외면서, 저들과 함께 아파하면서 살고 싶은 걸요. 저는 이렇게 살면서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사는 저를 매우 불쌍하게 여기는 목사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이 목사 친구가, 어느 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더랍니다. 찌잉, 텔렉스를 쳤더랍니다. 하느님, 어떻게 하면 한재기라고 하는 저 이교도를 하느님 앞으로 끌고 올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아들로 거듭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기도의 응답이 찌잉 날아오더랍니다.
바다 건너 호젓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대자연 속에서 너의 사명을 다하거라……이런 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저는 이 친구와 함께 제주도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도 바다 건너 있는 호젓한 땅이니까……배수진을 치라는 메시지였던 모양이지요? 한라산을 함께 올랐습니다. 제 친구가, 산 오르면서 자꾸만 기독교 사투리로 뭐라고 해쌌는데, 아이고, 성가시더라고요. 그래서 나무 얘기 풀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초봄에 하얗게 꽃이 피면 귀신도 두 눈이 휘둥그래진다는 귀룽나무 이야기, 메밥 몇 알 훔쳐 먹다가 시어미로부터 욕지거리를 듣고는 목매달고 죽은 며느리 얘기와 그 혼이 몸을 바꾼 며느리밥풀꽃 얘기를 들려주었어요. 마디 풀과에 속하는, 세모난 잎과 줄기에 가시가 촘촘하게 나 있는 '며느리밑씻개'는 뜯어서 보여 주었어요. 독초이니까, 필경은 먹지 못하는 풀이니까 더러운 이름을 얻었겠습니다만, '화냥년속고쟁이가랑이'와 '개좇방망이'같은 풀도 보여 주었지요. 참나물, 밀나물, 이팝나물, 산마늘, 산미나리, 엘레지, 원추리, 달래, 두릅, 고비 등 그 어렵고 어렵던 시절에 우리를 먹여 살리던 푸성귀를 일일이 가르쳐 주었어요. 살아 있는 숲에는 살아 있는 물이 있는 법입니다. 그 물에는 살아 있는 생태계의 하부구조가 살아 있는 것이고요……. 계곡물을 뒤져, 물에 떨어진 낙엽을 먹고 사는 날도래 강도래 유충을 보여 주었지요. 날도래 강도래의 유충이 물 속에서 나무나 모래를 접착제로 붙여 집을 만들고 살고 있지 않아요?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목사에게, 우리가 날도래 강도래 유충보고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그 목사님 왈, '너 이교도라는 것을 알기는 알았다면 바야흐로 병이 고황(膏 )에 사무쳤구나.'
그럽디다.
한라산에서는 신경전을 벌이던 그가 이제는 저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니, 그 물건의 크기는 저의 크기에 견줄 바가 아니지요.
제 친구 목사,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리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매우 공격적인 자연보호주의자가 되어 있습니다. 머리띠 매고 다니면서 반핵 서명도 받고, 이부자리 싸 들고 가서 쓰레기 소각장 건설을 결사 반대하는 시위대와 동숙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비로소 인간이 된 것입니까? 저는,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 하면서도 싸움터에는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호……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보호하는 것입니까? 자연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소통하는데 어떻게 보호합니까? 자연이 다 무엇입니까? 장자(壯子)님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심으로 도를 버릴 수 없고 사람이 하는 짓으로 하늘을 도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더하기 빼기를 하는 마음으로는 천명을 좇아서 살 수 없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천명에 순응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목사에게 그랬지요. 네가 자연 보호 어쩌고 하는 것은 가상하지만 어떻게 횃불로 태양을 더 밝힐 수 있겠느냐, 네가 자연을 보호한답시고 이 궁리 저 궁리를 일쑤한다만, 네가, 혹은 사람이, 자연을 보호할 능력이나 자격이 과연 있기는 있는 존재냐? 이것을 깨닫고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고 자연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도 자연의 한 자락이나 우선 함께 참회하고 아파하는 일부터 시작하자. 이랬더니, 이번에는 땅이 꺼지기라도 할 듯이 한숨을 쉽디다.
'자, 어찌 살아야 하는 것이냐?"
지금은 그 친구도 저도 무척 허탈한 상태입니다.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었다가 다시 카오스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거든요. 카오스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코스모스가 될 테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고 사랑하는 이 자연을 지키자는 우리 결심을, 우리가 좋아하는 장자가 허물어 놓고 있는 형국 아닙니까? 달은 없고 도처에 손가락뿐입니다. 언필칭 지월지교(指月之敎), 해쌌는데, 좋지요. 달 가리키면 달 보아야지 손가락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좋고 말고요. 하지만 제 눈에는 아직 손가락밖에는 안 보입니다. 도처에 손가락입니다. 우리는 번번히 손가락에 걸려 달 앞에서 코방아를 찧고 맙니다. 손가락에 걸리고 개똥에 미끄러져 쇠똥에 코를 박는 형국입니다. 금생에는 완전히 허탕을 친 것이 아니가……이래서 저나 그 친구나 허탈합니다."
한 교수는, 우리는 번번이 손가락에 걸려 달 앞에서 코방아를 찧고 만다고 했지만 사실 한 교수만큼 손가락으로
사람을 잘 걸어 쓰러뜨려 코방을 찧게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한 교수는 논리적 허구, 혹은 논리의 오작동(誤作動)을
손가락이라고 했던 것일까. 자연에 대해서는 시시때때로 깊은 사랑을 드러내는 한 교수가 이 손가락으로 사람을 쓰러뜨리는 예를 나는
한 번 두 번 본 것이 아니다.
한 교수가 말하는 손가락은 가령 이런 것이다.
"대구 신천동에 있는 대도극장 앞에서 나는 목격했어요. 아버지 앞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는 소녀를요. 아버지는 길을 건너다 말고 딸이 잘 따라오는지 뒤를 돌아다보더라고요. 그 순간에 딸은 트럭 바퀴 밑으로 말려 들어갔고요……."
"대도극장이 신천동에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한 교수의 손가락에 걸려드는 사람이 된다. 한 교수는 이렇게 응수할 것이다.
"60년대에 칠성시장에서 동신교 건너서 동촌으로 가는 길 왼쪽에 있던 극장이 대도극장 아닌가요?"
"그건 대도극장이 아니라 신도극장이지요."
"아, 그런가요? 신도극장이었군요."
"그래요. 신도극장이었어요. 그 건너편에 있는 극장은 신성극장이었고요."
"미안하군요, 대도극장이 아니라 신도극장이었어요. 나는 그 앞을 목격했어요. 아버지 앞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은 소녀를요."
"……."
"문제는 극장 이름이 아니지요."
"그러면요?"
"내가 신도극장을 대도극장으로 오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가 목격한 것을 무효로 하는 것은 아니죠."
"아닐 테죠."
"무효로 하기는커녕 강화했다고 보아야 옳죠."
"그것은 무슨 말인가요?"
"나는 아버지 앞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는 소녀를 목격한 일이 없어요. 그런데도 대도극장이니 신도극장이니 하는 과정에서, 내가 아버지 앞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는 소녀를 목격했다는 사실은 기정 사실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쩌면 이런 논리 오류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달은 없고 손가락만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하는 겁니다."
한 교수와 나는 일요일 오후면 슈퍼마켓 지하에 있는 재래 시장에 들르고는 한다. 가벼운 산행은 곧 저녁 자리로 이어지고는 했는데, 장보기를 지휘하는 사람은 먹거리에 정통한 한 교수인 것이 관례였다.
그는 정육점에서는 고기를 가지고, 야채 가게에서는 야채를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을 여간 즐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무와 풀에만 정통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 교수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알 리 없는 단골 정육점 주인이 그에게 물었다.
"대체 뭐 하시는 분이신데 고기를 그렇게 잘 아세요?"
"저요? 사실은 삼류 호텔 한식부 주방장이랍니다."
사람 좋은 한 교수가 먹거리에도 정통한 것은 어쩌면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오는 악우들 술 치다꺼리를 하느라고 시장을 뻔질나게 드나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육점 주인은 그가 정말 한식부 주방장인 줄 알고, 한식에 서투른 주부나 새댁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혹 한 교수가 가까이 있으면 한 교수의 자문을 구하고는 했다.
나는 한 교수가 몇 차례 그 재래 시장에서 하던 현란한 말장난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나와 함께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한 교수에게 정육점 주인이 물었다.
"주방장님, 이 새댁이 육개장을 끓인다고 하는데요, 육개장을 끓이는 데 숙주 나물을 넣는 게 좋은가요, 안 넣는 게 좋은가요? 의견이 분분해서요."
한 규수는, 넣는 게 좋다든지, 넣지 않는 게 좋다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앞에 서 있는, 새댁처럼 보이는 여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인이 비만형인가요. 아니면 마른 사람인가요?"
"마름 편인데요."
새댁이 대답했다.
"그러면 숙주 나물은 넣지 마세요."
한 교수가 명령하듯이 대답했다.
"마른 사람에게는 숙주 나물은 좋지 않다……무슨 근거라도 있는건가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그냥 한번 해본 무해무득한 소립니다. 그냥 가르쳐 주는 대신, 남편의 체형까지 묻고 나서 가르쳐 주면 맹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곧이듣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세상입니다."
그가 정육점 주인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그때도 나는 그 곁에서 지갑을 들고 서 있었다.
"주방장님, 육개장을 끓일 때, 굵은 대파는 삶아서 넣어야 한다는 말도 있고, 그냥 넣어야 제 맛이 난다는 말도 있는데요?"
그러자 한 교수가 천천히 되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지요?"
"6월 29일 아닌가요?"
한 교수가 천천히 대답했다.
"하지가 지났군요. 삶아서 넣는 게 좋겠어요."
그날 나는 한 교수에게, 무슨 근거가 있는 소리예요, 하고 묻지 않았다.
정육점 돌아나올 때까지 가만히 있었더니 그가 잣아서 설명했다. "오늘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묻지 않는군요……. 실제로 부추, 자총이, 마늘, 평지, 무릇 같은 강정 식품은 오훈채(五 菜)라고 해서 절집에서는 삼가는 채소인데 견주어 숙주 나물은 이와는 반대되는 나물이어서 허약한 사람에게는 득될 것이 없다고 합니다. 대파만 해도 그렇죠. 가을이 가까워지면 파의 대궁이가 딱딱해지기 때문에 삶아서 넣는 편이 좋죠. 그냥 넣으면 신맛이 돌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렇게 말해 준 것뿐입니다. 하지만 보셨죠? 하나의 조건을 확인하는 절차만 끝나면 전제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되어 버리는 것을요? 눈치채셨죠?"
상선사에 올라갔던 학생들이 정오 조금 못 되어 내려왔다. 학생대표의 말로는, 정오에는 여관 방을 비워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내려왔다고 했다. 학생들이, 아침 겸 점심이 차려져 있는 여관 직영 식당 식탁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학생 대표가
한 교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마침 스님들이 절 앞의 텃밭에서 '울력'이라는 것을 하고 계신다길래 내려가서, 울력이 뭡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함께 농사짓는 일을 울력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완허 스님 계시느냐고 여쭈었더니 대답이, 이런 말을 써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중구난방이었습니다. 법명이 완전할 완(完)자, 빌 허(虛)자를 쓰시는 완허스님은 지금 지리산에 계시고, 구경할 완(玩)자, 빌 허자를 쓰시는 완허스님은 무주 적상산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합천 해인사에 계신다는 스님도 있고, 청도 운 문사에서 보셨다는 스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선사에 완허 스님 계셨다는 걸 기억하는 스님은 한분도 안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아시는 완허 스님이 저 위 상선사에 계신 것은 언제였습니까?"
"십이삼 년 되었다."
한 교수가 대답했다.
"에이, 한 절에 그렇게 오래 계시는 스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선생님?"
"그래서 내가 그러지 않았니? 상선사 떠나 한동안 떠돌다가 다시 상선사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선생님, 상선사 안 올라가신 까닭을 제가 알아맞혀 볼까요?"
"제대로 알아맞히면 용하지."
"흉해서 못 보겠습니다, 선생님. 길에는 시멘트를 쏟아 부어 놓았고, 석탑을 모두 새로 조성한 모양이던데, 기계로 박박 갈아서 세운 민짜 탑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보셨으면 욕을 많이 하실 것 같았습니다."
"아닌게아니라 그거 징그럽지, 너는 어떻더냐?"
"조성한 지 몇 년 되었다는 데도 탑에는 이끼 한 점이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표면을 기계로 갈아서 물이 머물 데가 없으니까 이끼도 머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질감도 도무지 없고요. 가지치기라는 것을 한답시고 나무를 온통 쥐어뜯어 놓은 것도 보기 싫었고요. 보셨으면 선생님, 욕 많이 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만했으면 되었다. 나도 욕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한 교수는 이 말 끝에 입을 아주 다물어 버렸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 교수와 나는 술을 더 마셨다. 아침에 상선사 올라갔다 내려온 학생들은 해장 등산에
녹초가 되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학생들 자리에는 코고는 소리만 낭자했다. 휴일 아니라서 고속도로가 붐비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교수, 완허 스님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지요?"
"……."
"아니면 한 교수가 금생에는 완전히 허탕을 쳤다는 그 완허 스님이거나……."
"절에서 얻은 내 이름은 그게 아니었는데……."
한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빙그레 웃었을 뿐, 더는 기라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